누군가와의 이별은 언제나 쓸쓸한다. 하지만 그건 단지, 이별이란 본래 그런 것이어서다.

P.14 중에서 - P14

예전에 나를 소중히 대해주던 기억에 매달려서, 배신조차 덮어주며 용서하는 쪽으로 도망친 건 나였다. 그를 사랑해서도, 내가 착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내 나약함 때문이었다. 상처 입고 피폐해지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도망쳐야만 했다.

P.15 중에서 - P15

이제부터는 나를 더 소중히 아껴줄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굳고 강하게 다짐했다. 고개를 들자. 창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여긴 도쿄지, 하는 생각이 물 흐르듯 들었다. 내일은 롯폰기에 가서 영화라도 볼까. 그런 생각이 일자 가슴 언저리가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건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니, 그 또한 오랜만에 마주하는 여자의 얼굴 같았다.

P.16 중에서 - P16

나는 예전의 그 사람을 소중히 하지 못했지 만, 이 사람만은 꼭 소중히 하리라 다짐했다. 따뜻한 바람을 함께 오래 누리며, 때때로 찾아올 추위와 괴로움 속에서도 끝내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리라. 그리고 나도 반드시 행복해지리라. 각오하듯이,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다짐했다.

P.46 중에서 - P46

팽팽한 긴장이 이 작은 방 안을 달리는 소리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표면장력이 한계에 다다른 물이 작은 진동에 흘러넘치듯, 이성이 통제되지 않는 곳에서 무심코 터져나온 말에 당황했다. 심장은 안쪽에서 사정없이 가슴을 때렸고, 나는 그 고동에 지배되어갔다.

P.62 중에서 - P62

그의 말과 행동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이제 진저리날 만큼 잘 알고 있다. 무책임하게 쾌락적인 말과 행동을 되풀이한다는 것도, 눈앞의 여자를 희롱함으로써 자존심과 허영심을 채운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P.63 중에서 - P63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한 채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이 독특한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기대나 기쁨 같은 것은 없고 은근한 공포가 느껴진다. 늘 나를 즐겁게만 해주던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말로 유혹하는 이 남자의 험상궃은 옆모습을 나는 이유 없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P.90 중에서 - P90

우리가 장애가 있는 파트너와 언제까지 잘 지낼 수 있을지, 언젠가는 지쳐버릴 날이 올지, 아니면 반대로 그들이, 그건 모른다. 지금은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상처를 서로에게 안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인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파트너가 장애를 지녔기 때문일까. 알기 쉬운 이유를 찾으려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쪽이 아닐까. 그렇게 자문하면서도 끝내 선명한 답은 얻지 못했다.

P.101 중에서 - P101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 연기가 꽤 언저리에 달라붙어 점점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고, 말을 꺼내려고 하니 마음과는 달리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다시 급히 숨을 들이마시고, 공기가 어깨까지 번지도록 천천히 삼켰다.

P.131 중에서 - P131

그는 늘 옳다. 언제나 그의 말이 맞다. 어쩌면 이번에도 내가 잘못한 걸지 모른다. 아니, 그는 늘 나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정말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그와 헤어질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옳은 선택일 것이다.

P.132 중에서 - P132

머리를 숙인 내가 옳은지는 모르겠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테이블 위에 억지로 끌려온 듯 놓여 있는 이 종잇조각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 될지 어떨지 모른다. 유치하고, 인내심 없고 끈기 없는 내게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가지가 불확실했다. 하지만 언제나 자기만 옳다는 그의 곁에, 더는 있을 수 없다는 마음만은 확실했다.

P.133 중에서 - P133

십자가를 짊어지는 게 죄의 대가라면, 이것이 십자가라면 조금은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더러운 비밀을 안고 산다는 건 다듬어지지 않은 돌덩이가 가슴 언저리에 달라붙어 몸과 하나가 되어가다, 날이 갈수록 일그러지며 단단한 암석이 되어 몸속에 둥지를 트는 것 같았다.

P.152 중에서 - P152

육아가 있는 삶. 매일 똑같고 분주한 날들 속에서 그 안에 있는 행복을 미처 느끼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남편과 아이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웃고 있는 이 광경이 내 마음을 평온하게 채워주는 샘 같은 존재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P.156 중에서 - P156

남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도, 여성 사원 외모를 두고 하는 농담도, 설령 그 화살이 자기에게 향하더라도 대충 웃어넘기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정도쯤은 흘려보내면 될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걸까. 무슨 고집일까. 조금 더 유연하게 살면 될 텐데,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P.169 중에서 - P169

웃기지 않은 농담에도 적당히 웃어주고, 불편한 질문은 애교 섞인 태도로 얼버무리며, 상처 주는 말을 들어도 마치 상처 받지 않은듯 넘어가면, 그들에게는 ‘편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요령이라고 여겼다. 포기와 영합은 결국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아가가 위한 지혜이자 요령이었다.

P.169 중에서 - P169

무서우시죠? 기존의 여성상에 없던 사람이. 비위를 맞추지 않는 존재가. 그야 편하겠죠. 당신들 앞에서 바보인 척, 모르는 척해주면 안심이 될 테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나나, 우리가 그런 짓을 해야만 하나요? 요즘 여성 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면 시끄러워진다며, 마치 사회와 여성에 정통한 척하지만, 겉치레일 뿐, 건드리면 곪아 터지는 종기처럼 성가신 존재라고 배척하는 데 지나지 않잖아요.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상처받지 않은 척 웃어넘기고 맞장구쳐 주는 게 ‘분위기 아는 여자‘가 되는 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몰아세워서 마음이 편해지는 건, 결국 당신들뿐이잖아요.

P.177 중에서 - P177

나도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저 성가신 존재라고만 생각했어요. 고집 세고 융통성 없고, 트집이나 잡는 여자라고만 여겼어요. 하지만 아니더라고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건 우리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우리 여성들 사이에서도, 체념에서 굳어진 방식을 서로에게 떠넘겨 온 거예요. 그 무심한 한마디에 다 드러나요. 우리를 깔보고 있고, 줄곧 그렇게 깔보고 싶어 한다는 게요. 이렇게 말하면 피해망상이라며 지적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겠죠. 당신들에게 성가시고 귀찮은 인간으로 찍히는 게 두려워서, ‘분위기 아는 여자‘ 로 보이고 싶어서, 나는 언제까지나 입을 다문 채 변하길 두려워하며 살아왔어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떠맡아야 할 게 너무 많았고, 어떻게든 버티고 싶었기에, 그런 것들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P.178 중에서 - P178

첫 향은 달콤하고 신선하며 화려한 꽃들이 한데 모인 듯한 플로럴한 향이 나는데, 잔향에는 샌달우드가 스며든 머스크가 온은히 감도는 그 향수를 뿌린 나는 행복했을까. 분명, 무척 행복했다. 행복했을 터인데, 어째서 행복했는지 어땠는지를 이렇게도 끝없이 되묻게 되는 걸까.

P.188 중에서 - P188

눈앞 진열대에 줄지어 놓인 화려한 병들 가운데, 내가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향수를 하나 사자. 설령 누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해도, 내가 좋아하니까, 하고 자신있게 계속 뿌릴 수 있는 향수를 하나, 그리고 그것을 뿌리며 살아갈 내 인생을 하나, 손에 넣고 싶다고, 점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내민 티슈조차 받지 않은 채, 진열대 조명에 비쳐 색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향수들을 기도하듯 바라보았다.

P.189 중에서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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