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꽃이 아직 피지 않은 나무 곁에 서 있다. 겉옷을 벗고 무릎을 꿇는다. 수면에 서린 김을 밀어내며 왼손으로 물을 조금 떠낸다. 목욕하던 여자가 잠시 움직임을 멈춘다. 엄지손가락 없는 손이 잔 구실을 하기엔 얼마나 쓸모 없는지 알아챈 모양이다. 바로 그 순간, 마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듯 나비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내 그림자에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곳에서 날개를 치며.
P.138 중에서 - P138
잠옷을 입은 소녀가 깊이 잠들어 있는 게 보였습니다. 아이의 머리칼은 마룻바닥 위에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고, 방 안은 어질러진 흔적 없이 평온했습니다.
P.195 중에서 - P195
비명 소리가 아래쪽 만까지 메아리 쳐 내려갔다. 한 젊은 남자가 한 여자를 부축해 벤치로 되돌아가고 있었고, 사람들이 손그늘을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일이 더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은 일몰을, 배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수영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로 돌아갔다. 바위 위에 올라가 하나둘씩 석양이 비치는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P.88 중에서 - P88
우린 이 생을 살다가 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야. 네 생각도 그렇지 않니? 너는 이 생을 살았지만, 내일이면 금방 또 다른 누군가가 돼서 또 다른 누군가와 살게 될 거잖아 . 그런 변화를 두려워해선 안 되는 거야. 그걸 받아들이고 더 강해져야 돼. 지금 이 남자의 혼이 그늘 밑에서, 새로 피어난 이 색색깔의 꽃잎들 아래서, 비와 눈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가지들 아래서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P.97 중에서 - P97
나는 밖으로 걸어 나간다. 오후의 날씨는 한결 나아져 있다. 공기 중에 한기가 감돈다. 저 멀리 한 무더기의 언덕 너머로 후지산이 조그맣게 보인다. 산꼭대기에는 눈이 덮여 있다. 내 눈에는 주위를 둘러싼 낡아빠진 건물들, 수리가 절실히 필요해 보이는 건물들보다 이런 풍경이 더 잘 들어온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역참보다 이곳에 있는 게 나은 것 같다. 좋은 역참은 훨씬 더 분주할 테고, 사람들이나 다른 영주들도 많은 테니 말이다.
P.112 중에서 - P112
나는 궁금해진다. 조선인 사절단의 일원으로 이 땅에 와 여러 도시에서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만난다는 건 어떤 일일까. 그들은 서로에게 진정으로 무엇을 느낄까. 그런 방문에, 그들이 여기서 보내는 나날들에 숨어 있는 진짜 동기는 무엇일까. 나는 궁금해진다. 그들의 방문을 부추기는 건 혹시 조롱이나 증오는 아닐까. 십년이라는 세월은 전쟁을 잊기에 충분한가. 아니, 어쩌면 전쟁은 이 일과는 아무 관련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그저 서로를 불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P.113 중에서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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