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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8년 3월
평점 :
요즘 해가 짧아져서 그런지 꽤나 씁쓸한 생각이 많았어요. 제가 사랑하는 것들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심지어 무언가를 아끼고 좋아하는 제 마음조차 손 위의 모래처럼 움켜쥘 수 없다는 걸 알고나니, 여기까지 와서 떠오른 거지만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전 어쨌거나 부모님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은 살 수 없다는걸 애진작에 알았으니 평생 제 쪼대로 살아가는걸 결심했으나 사실 이 ‘쪼대로 살아가는 것‘에는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했던거죠. 부모님의 걱정에 미안해하면서도 어떻게든 받아치는 것, 결혼하는 미래만이 진실된 것이라고 믿는 초등학생의 눈을 비껴가기, 점점 달라지는 대화주제, 외부의 시선, 미래에 대한 불안, 불확실성, 외로움...
이런 삶에 대한 고민에서 지지않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달리기‘입니다. 작년의 저였다면 ‘또 건강한 몸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식의 식상한 말이군‘하며 책을 덮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읽고보니 비슷한 경험이 떠올라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올해에 기쁜 일들이 많았지만 무엇이 가장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전 아직도 올 여름 제주도의 실패한 여행이 떠오르거든요. 새별오름이라고 밑에서 봤을때는 야트막한 언덕처럼 보이는 오름이 있습니다. 저 정도면 금방 다녀올 수 있지, 하고 원피스를 입은 채로 호기롭게 올랐지만 오름 중턱부터는 인생샷이 아닌 생존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가팔라 크게 후회했었어요. 돌아가고 싶었으나 이제와서 뒤를 돌 수도 없고(뒤돌면 죽을 것 같아서...) 헛디디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로프를 잡는 손과 내딛는 발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다보니 다 내려오고 나서는 온몸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너무 신기해서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야 해, 하고 내려온 즉시 쉬지않고 차를 몰고 예약해 둔 갈치조림집을 운전해가는 내내 저는 계속 웃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없었고, 힘들어서 미쳤구나 싶었는데 작가는 그것이 삶이고, 삶에게 이겨낸 모습이라고 말했어요.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추락하는 존재이니 추락할 때쯤엔 다시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추락하고, 다시 끌어올리고... 이런 반복되는 오르내림 속에서 추락하는대로 그냥 두지 않고 날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을 찾아 결코 삶에서
게 지지않는 것. 날 때부터 경쟁심이 강했던 저에게 지지 않는다는 말은 얼마나 달콤하던지요 ㅎㅎ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연필로 글을 쓰면 점점 글자가 아래로 내려가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꽤나 하향곡선을 그리며 글자를 쓰고 있었지만 타이밍 좋게 이 책을 읽었고,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만한 좋은 경험을 한 덕분에 다시 제 궤도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했던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 제게 힘이 되어 돌아왔다는게 뿌듯하기까지 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또 제 버릇을 이기지 못해 글자를 내려 쓰겠지만 그래도 지지않고 반듯하게 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멀리서 볼 땐 제법 괜찮을 모양새로 썼다고 느끼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