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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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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니발리즘 : 인간이 인육(人肉)을 상징적 식품 또는 상식(常食)으로 먹는 풍습. 

  육식이야기라는 제목에 '아주 음험한 영혼을 지니고'있다는 파리지옥이 그려진 이 책의 겉표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 처음 생각난 것이 바로 '카니발리즘'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신청한 도서가 아니었기에 전혀 모르던 이 책을 처음 펼쳐들었을 땐 단편집인지도 몰랐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아마 나처럼 이 책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혀 없이 책을 펼쳐 들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아무 기대도 없이 해괴한 표지장식에 괴기스러운 제목의 이 책을 펼친 순간 당신은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닐 수도 있는 세계로 가게 될 것이니. 

  얼마 전 서점에서 우연히 영화 속에 나온 책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을 보게 되었다. 꽤나 재밌게 봤던 영화들 그리고 나 역시 관심을 가졌던 그 영화들 속 책이 책으로 엮어진걸보니 훑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책에서 소개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영화 속 책들을 찾아본 기억이 있다. '더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소설 원작의 영화 속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란 책이 나온다.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문맹이었던 여주인공이 삐뚤비뚤한 글씨로 "A woman with a dog"를 써내려가는 장면을 인상깊게 보며 자연스럽게 그 책을 기억할 것이다. 그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된 러시아의 대문호 체호프는 짧지만 강렬한 그의 단편소설들로 (나같이 무식한 사람만 몰랐을 정도로) 굉장히 저명한 작가이다. 육식이야기를 읽는 내내 '아, 누구의 소설을 닮았는데 닮았는데'를 되뇌이고 있었는데 책의 중반부를 조금 넘어서 '체호프'라는 이름이 딱 한 번등장한다. 이 단편소설집은 꼭 체호프의 글을 닮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아마 이 작가는 나의 이 한마디를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다시 훑어보며 처음에 읽지 않고 넘어갔던 서문을 살펴보며 생각난 작가가 한 명 더 있다. 박민규의 카스테라. 단순히 단편소설이기에 닮았다하는 것은 아니다. 뭐라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모르게 닮은 그 느낌이 있다.  

 무작위로 외국 이름을 10곳만 말해보라 한다면 그 중에 속하지 않을 확률히 다분히 높은 나라인 벨기에. 프랑스문단에 떠오르는 젊은 작가인 그의 책을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내가 읽고 읽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확실히 단순히 영어식이나 불어식이 아닌 좀 더 복잡한 소설 속 이름들은 집중력을 떨어트리기도 하고 약간 이질감을 느끼게도 한다. 게다가 가끔씩은 작가가 만든 나라가 등장하고 너무나 현실적인 것처럼 계속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이 단편소설집은 한 권의 소설이라 칭해도 그리 비판을 받지 않을만큼 전체를 뚫어내는 무언가가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우리가 전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한 도시가 있다고 할 때 그 도시 이곳저곳에 설치되어 있는 각각의 CCTV화면이 모자이크를 이루어 하나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얼마전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 말하는 김연수씨의 블로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우연찮게도 (시간이 나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바로 육식이야기가 등록되어있었다. 나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댓글목록을 눈으로 훑으며 세계 곳곳에서 모두들 열심히 쓰고 있다는걸 느꼈다는 작가님의 댓글을 발견하곤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마음에 콕 박혀버렸다. (모른척 시치미 뚝 떼고 나의 리뷰에 넣어버리고 싶은 말이지만 세상엔 보는 눈이 많으므로...) 정말로 이 젊은 작가는 열심히 쓰고 있단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 있지만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의 나오는 일종의 청각적 수신의 다른버전으로 들리는 듯 하다. "아, 이 얘긴 제가 그랬으면 하고 상상해본거구요, 저건 제가 직접 해본겁니다. 그리고 이건 제 불알칠구 얘기이고 다음장엔 제 아버지의 일기를 참고한 글이 있습니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진실이 아닐까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 카니발리즘이 인간이 인육을 상징적 식품 혹은 상식으로 먹는 일이라면 '육식이야기'는 당신의 상식을 먹어치운다는 점에서 분명한 육식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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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소설 >세계문학 

백설공주 - 그림 형제의 기묘한 이야기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9   

그림형제(지은이),천은실,김양미(옮긴이)|인디고|2010년 9월
→보고싶은 이유: 너무나 유명한 백설공주 이야기, 몇 달전 흑설공주이야기를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흑설공주 이야기를 보고나니 다시금 백설공주가 보고싶어지고 어렸을 때 읽었던 얇은 동화책 문체가 아닌 그림형제가 적었던 내용을 다시금 보고싶습니다.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라고 해야할지, 관점에 대해서 다시금 살펴보고 싶어 신청합니다. 


2.소설>한국소설 

자전 소설 2 - 오, 아버지 

전경린,조경란,하성란,권여선,전성태,김연수,이혜경,천명관,백가흠,윤이형,김사과 (지은이)  

 |2010년 -10-07  
→보고싶은 이유: 언젠간 꼭 써보고 싶은 글이 부모님에 관한 글, 특히 아버지에 관한 글입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아버지에 대해 쓴 자전 소설이라니 당연히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김연수 작가님을 정말 좋아하는데 너무나 기대됩니다. 김연수님의 신간에 목말라있는 애독자로서 이렇게라도 꼭 접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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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소설 >세계문학 

백설공주 - 그림 형제의 기묘한 이야기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9   

그림형제(지은이),천은실,김양미(옮긴이)|인디고|2010년 9월

2.소설>한국소설 

자전 소설 2 - 오, 아버지 

전경린,조경란,하성란,권여선,전성태,김연수,이혜경,천명관,백가흠,윤이형,김사과 (지은이)  

 |2010년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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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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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캐릭터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는 주인공을 보며 호감을 갖기도 하고 그들의 상황에 공감하며 이야기 속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캐릭터는 이야기 속에서 작가가 의도를 갖고 만든 허구적 존재로 특정한 기질을 통해 의미를 전달한다. 하나의 사건은 성격소가 되는데 성격소의 묶음을 특질이라 하고 특질이 모여 성격을 이룬다. 쉽게 말해 성격소를 일반화한 것이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성격소는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야기 속에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김승옥은 무진기행을 주인공 윤의 입을 통해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라는 말로 마무리 하고 있다. 무진을 떠나면서 윤이 뱉는 심한 부끄럼을 느꼈다는 말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작가 자신이 느낀 감정과 동일시된다고 생각한다. 이 부끄러움의 이유는 삶을 대하는 윤의 태도와 언행을 분석해 봄으로서 짐작해볼 수 있는데 이를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그 공통점과 차이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무진에 대한 말을 통해서도 작가의 주제의식과 인물들의 캐릭터를 알아볼 수 있다. 소설의 시작에 버스 속 사내들은 무진이라는 공간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이는 ‘그럭저럭’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될 수 있다. 무진은 항구로 발전하기에도 농촌이 되기에도 부족한 제대로 된 명산물 하나 없는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그럭저럭’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밖에 없는 무진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삶의 태도, 나아가서 독자들의 삶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인물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모습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먼저 주인공 윤을 살펴보자면 그는 삶의 전반에서 어떠한 일이나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외면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러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는 ‘결과적으로는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책임감을 회피하는 순간마다 무진을 찾았는데 이번의 무진행에서도 그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무진을 떠난다. 6.25 사변으로 서울의 대학에서 무진으로 내려온 그는 모두가 전쟁터로 몰려갈 때 골방에 숨어 수음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그는 ‘모두가 나의 홀어머님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양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편으로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를 모멸하고 오욕을 웃으며 견디는 내용들’의 일기를 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참전하지 않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애인이던 희가 떠나고 직장에서 해고되어 다시 무진을 찾게 되었을 때도 그는 서울에 남아 무언가를 하기보다 무진으로 일종의 피신을 온다. 이별과 실직의 회복수단으로 그가 택한 것은 돈 많은 미망인과의 재혼이었다. 스스로 탈출구를 꾀하기보다 어떤 운 좋은 기회에 편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삶의 패턴은 제약회사 전무자리 승진을 앞두고 무진을 찾음으로서 다시 반복된다. 그는 자신의 승진을 위해 일을 꾸미고 있을 장인을 생각하면 어머니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내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만다. 윤에게 무진은 늘 자신을 상실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현실인 서울을 떠나 무진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이미 반수면 상태에 빠져있다. 반수면의 윤이 결국 다시 자신을 상실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하인숙이라는 여인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진에서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하인숙이라는 여인과 관계를 맺고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은 그녀에게 아무런 인사도 남기지 않고 부끄러움만 가진 채 무진을 떠난다. 자신을 상실한 상태의 윤은 아내의 전보로 현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전보로 대표되는 현실과의 다툼에서 그는 다시 현실과의 타협안을 만들어낸다. 스스로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라 다짐하며 무책임을 긍정하고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이런 다소 비겁한 행동에서 그가 내리는 마지막 양심적 행동은 전보의 눈을 피해 편지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날의 일기가 그러했듯이 결국 그는 편지를 찢어버린 채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무진을 떠난다. 소설은 이렇게 마치지만 아마 서울에서 제약회사의 전무가 된 그는 훗날 자신의 무진행을 돌이켜보며 그 때 하인숙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무진을 떠난 것은 결론적으로는 잘 된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인숙과 사랑을 나누던 그때에 이미 그는 ‘감상이나 연민으로써 세상을 향하고 서는 나이’는 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으로 하여금 다시금 자신을 상실하게 한 인물인 하인숙을 살펴보자면 그녀는 옛날의 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어떤 개인 날」과「목포의 눈물」사이의 유사성에서 방황하는 인물로 무진에서 그녀의 삶은 타협안의 연속이라 볼 수 있다. 그녀는 늘 ‘내가 대학 다닐 때’라는 표현을 쓰며 무진을 지겨워하고 서울의 삶을 동경하지만 그녀의 고향은 무진보다도 못한 곳이기 때문에 결국은 무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조를 비롯한 세무서 사람들을 보잘 것 없다 생각하지만 심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교류를 하고 아리아로 길들여진 성대에서 유행가를 나오게 한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큰오빠 뻘의 윤은 그녀를 서울로 데려가 줄 백마 탄 왕자님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동화 속 왕자님을 기다리는 비현실적인 인물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윤이 무진에 머무는 동안만 근사한 연애를 하겠다는 선언을 하는 다소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인물형이다. 하인숙의 남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순수성과 속물성의 중간에서 타협하는 그녀의 모습들을 더욱 확연히 드러내준다. 그녀는 처녀는 아니더라도 조와의 잠자리는 거부하고 윤과는 관계를 가지며 자신을 좋아하는 박의 마음을 알면서도 박의 편지를 조에게 보여주는 등 박의 마음을 존중치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속물로만 치부해버리기엔 ‘정말 무서워서 떠는 듯 한 목소리로’ 윤에게 바래다주기를 청하고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 말하며 「어떤 개인 날」을 부르는 모습에서 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윤희중과 하인숙이 순수와 속물의 중간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인물이라면 윤의 중학동창인 조는 현실에 타협하는 것을 넘어서 성공을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조는 윤에게 약간의 열등감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는 손금을 파가며 성공한 소년의 얘기에 감동받으며 그 얘기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 조는 세무서 직원에서 고등고시에 패스함으로서 무진의 세무서장이 된 인물로서 이러한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조는 외양에 있어서도 얼굴이 옛날보다 윤택해지고 살결도 많이 하얘졌으며 자신의 집을 누추하다 말하나 ‘방은 결코 누추하지 않았다.’ 조의 자기 과시적 요소는 윤을 사무실로 초대할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흰 커버를 씌운 회전의자 위에 안자 있는 것과 일의 바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윤의 눈에 그의 모습은 오히려 초라하고 가엾게까지 보일 뿐이다. 이러한 윤의 평가는 조가 사람들이 동경할 만한 성질의 성공을 이룬 것이 아니라 단순히 출세에 눈 먼 속물인 것을 알려준다. 조의 속물적 성격이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은 그의 결혼관에 대한 생각이다. 조는 자신에게 중매들어오는 여자들을 ‘성기 하나를 밑천으로 해서 시집가보겠다는’ 형편없는 것들로 평가하며 하인숙을 그 대표적인 여자로 보고 있다. 하인숙을 깔보는 동시에 그녀의 뒷조사를 하고 절에 데려가는 속셈을 부리는 모습의 조에게서는 일절의 순수성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윤의 결혼에 대해서도 윤을 ‘약아빠진 놈’이라 칭하며 그의 결혼을 대놓고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은 것으로 평가한다.

  조가 순수성과 속물성의 스펙트럼에서 속물성의 극한에 위치한다면 윤의 후배인 박은 순수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박은 ‘아주 얌전하고 매사에 엄숙했고 가난하였던’ 인물로 윤의 무진행을 진심으로 반가워해준다. 박은 윤을 존경하며 짧은 기간 무진에 있는 윤을 위해 ‘심심하시지 않을까 하여 읽으시라’고 책을 두고 가는 모습은 윤에 대한 동경심의 구체적인 증거로 볼 수 있다. 하인숙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조는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편지로만 그 마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박은 하인숙이 유행가를 불러야 하는 상황도 견디지 못할 만큼 무진기행의 인물들 중 가장 양심을 지키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무결한 순수의 존재로 그려지기 보다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것을 크게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그마저도 사범대학 출신이 아니라 교원자격증으로 간신히 버티는 소시민적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인숙에게도 꽁생원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윤에게 보이는 충성심에 비해 큰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변변한 명산물 하나 없는 고장인 무진은 조, 박, 하 등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물들의 생활공간이다. 윤은 이러한 자신의 고향인 무진을 떠나 서울에서 삶을 살고 있지만 그에게 서울의 생활이란 책임으로 둘러싸인 곳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무진에 오는 길에 편안하게 잠들기를 바라며 수면제의 제조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윤의 타협적 삶의 태도는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술집여인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청산가리를 먹고 죽을 용기는 없고 몇 알의 수면제로 타협하는 인물인 윤은 술집여인의 시체를 보며 암묵적인 부끄러움을 느낀다. 술집 여자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모습은 그녀의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이 자신 안에 남아있는 부끄러움에 대한 항변이자 양심의 꿈틀거림을 느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술집여자가 자살한 곳이 서울이 아니라 무진이라는 점은 술집여자를 조, 박, 하 와도 대비시켜주는데 모두 그럭저럭 양심을 팔아가며 살아가는 곳에서 술집여자만이 결단적 행동을 취했음이 도드라진다.

  나는 무진기행 속 인물들이 작가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 존재라는 냄새를 풍기기보다는 삶 속 우리들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도덕을 추구하고 양심을 지키며 살기를 다짐하지만 현실에서 우리의 결정들은 결국 개인의 안위와 소욕을 추구하는 방향들이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후대에서 바라본다면 당연히 참전하는 것이 옳게 여겨지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지금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이는 그리 쉽게 결단할 수는 없는 사항이다. 결혼이라는 소재에 있어서도 결혼을 하나의 신분상승 수단 정도로 여기는 조를 보면 뭔가 욱하게 되지만 결혼=사랑이라는 공식이 깨졌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윤과 하의 관계에 있어서도 여자들은 하처럼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줄 사람을 꿈꾸지만 자신의 안정적인 서울 생활을 담보로 잡고 사랑하는 여인을 서울로 데려가줄 남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윤은 자신의 결정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이는 하인숙과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독자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낸다. 사회는 모두 저마다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동시에 모두가 그저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집합이기도 하다. 무진기행은 공통적인 것들과 미세한 차이들 사이의 균형을 꾀하며 각자 필요만큼의 수면제를 통해 반 수면상태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윤이 술집 여인의 시체를 마주했을 때 그를 자신의 일부로 느낀 것처럼 무진기행은 독자들의 양심을 건들이며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자신의 삶의 일부로 여기게 한다. 결론적으로 윤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무진을 떠났지만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서 부끄러움과 타협으로 뒤덮인 삶에서 일말의 각성을 요구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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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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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기만 한 타인의 백과사전- 라쇼몽, 덤불 속>

 




  세상을 평가하는 기준에는 크게 상대평가와 절대평가 두 기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쇼몽과 덤불 속은 상대적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들의 행동을 보여준다. 먼저 라쇼몽에서 백성은 먹고 살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도둑질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시체의 머리를 뽑는 노파를 만나게 된다. 백성은 노파의 행동을 보며 분노를 느끼지만 노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신이 머리를 뽑은 시체의 부정당했던 행동을 근거로 들며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이러한 노파의 태도 앞에서 백성 역시 도둑질이라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며 노파의 옷을 훔쳐 달아난다. 도둑질이라는 것은 절대적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할 그른 일이지만 노파는 죽은 여인에게, 백성은 노파에게 비추어 자신들의 행동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며 극악무도한 일을 행하게 된다. 이렇듯 상대적이기만 한 타인의 백과사전을 평가의 잣대로 들이댄다면 이는 주관적인 개인의 백과사전보다 훨씬 불공정한 평가기준이 될 수 있다.

  덤불 속은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사건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상대적 기준의 위험성을 라쇼몽보다 더욱 잘 드러내준다. 덤불 속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하여 도적, 여인, 남편은 각자 자신의 기준을 드러내어 사건 정황을 설명한다. 포청의 심문에 대한 나무꾼, 노파 ,행려승, 나졸들의 답을 종합하면 어느 정도 전반적인 사건의 윤곽이 드러난다. 하지만 남편의 시체가 있던 덤불 속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적, 여인, 남편은 각자 자신들의 백과사전에 따라 사건을 진술한다. 하지만 상대적이기만 한 타인의 백과사전은 진실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사건을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한다. 모두가 각자의 기준에서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발언을 할 뿐 진실은 알 수가 없다. 누구의 말도 진실이 될 수 없고 누구의 말도 거짓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덤불 속 인물들의 진술에는 절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포청이 그들을 심문하고 있지만 포청은 사건을 위에서 바라보는 절대자가 아니라 그 역시 하나의 개인으로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상대적 진술을 종합시키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라쇼몽의 서두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라쇼몽과 덤불 속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사회상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 법규와 도덕기준들이 무너진 상황의 일본은 공황상태에 빠져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절대적 기준이 무너지자 상대적 기준이 난무하기 시작했고 세상은 점점 더 아비규환의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양심은 무뎌지고 모두가 자신만의 백과사전을 기준으로 개인의 목소리를 내세우는 상황에서 진실은 점점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라 예상된다. 자신의 백과사전이 옳은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를 타인과 비교해보면 그 역시 상대적이기만 한 타인의 백과사전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라쇼몽과 덤불 속은 상대적 기준의 위험성의 단면을 보여주며 모두의 목소리만 높인다고 해서 정의롭다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결국 상대평가와 절대평가 두 가지 기준 중 하나의 목소리만 높이는 것은 치명적 결점이 있음을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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