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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사용 - 소설가 함정임의 프랑스 파리 산책
함정임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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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파리는 어디에........ -함정임『인생의 사용-파리 산책』刊해냄.03

함정임을 통해 이젠 세계인의 보편도시로 불려지는 파리를 본다. 자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적 토양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혹은 보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습속習俗화 되어 있는 '서구에로의 경도된 사고'는, 여전히 최고의 관광지로써, 철저히 세계화된 '파리같은 도시'만을 허락한다. 그러나 사실 '14세기까지도 유럽은 몽골 지배하의 중앙아시아 영토를 중심축으로 태평양까지 뻗친 방대한 경제 체계의 북서쪽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고', '그 이전의 유럽은 주로 지중해와 흑해 주위에서 여러 제국이 멸망하는 모습을 연출'했으며, 콘스탄티노플, 런던을 비롯한 파리가 세계 10대 도시의 대열에 진입하게 된 것은 170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컬럼비아대 정치학교수 챨스 틸리(Charles Tilly)는 전한다.

때문에 글의 초반 '삶, 혹은 인생의 사용'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삶, 혹은 인생의 사용'을 읽고 있는 내게 함정임이 들려주는 육성은, 역사적 기억인 통시성通時性이 결여된 내적 고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소설가가 기록한 기행기록임을 감안하더라도 서구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을 부스럼처럼 지닌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글의 도처에서 그녀는, 적어도 파리에 체류할 동안만큼은 자신을 '파리지엔'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렇다라는 것을 알아챘음에도 그녀의 기록물을 읽기로 마음먹은 것은, 문학과 도시가 변주해내는 그 교직음을 못내 사랑하는 내 취향 때문이기도 한데, 보들레르가'파리의 우울'(p87)을 노래하고, '그 모든 방황을 끝마치게 한곳이 루브르'(p185)임을 러시아 출신 유대계 화가 마르크 샤갈이 고백한 곳, 그리고 '파리를 들이마시는 것 그것은 영혼을 보존하는 것'(p5)이라고 대문호 빅토르 위고로 하여금 문언文言을 이끌어낸 곳이 파리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본 책 프롤로그에 적힌 겸허한 그녀의 내면의목소리는, '함정임의 파리산책'이 허투루 엮어진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이 책의 파리는 내가 읽고 보고 겪은 파리이다. 다른 사람에게 어쩌면 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래야 하리라. 나의 무지와 오독이 저마다의 파리를 자극하기를, 그리하여 인생의 한 시기를 파리에서 사용하기를 감히 빌어본다.'(p9)

이 책을 통해 나도 그녀처럼 '나의 파리'를 가져 봤으면...... 그리하여 그녀처럼 나도 '나의 파리'를 씀으로써 나도 내 인생의 한때를 사용했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파리'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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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희망
권성우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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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우의 비평集 <비평의 희망>(刊문학동네.2001)을 읽고.....

1.
'비판'이 수반되지 않는 '성찰의 나열'은 깊이는 있을지언정 예리함과 치열함이 결여되어있고, '성찰'이 따르지 않는 '비판'에는 사유의 전복과 삶의 부정성은 충만할지언정, 성애 낀 어느 겨울날 유리창을 바라보는것처럼 '차가움'만이 가득하고, 전복된 기존의 사고와 부정된 삶의 표피만 빛날뿐 근원적이고도 시원적인 삶의 깊은 향취가 맡아지질 않는다.

더불어 '비판'은 타인에 대한 말걸기이고, '성찰'은 자신에 대한 말걸기일텐데, 자신에 대한 말걸기로서의 고독한 성찰이 없이는 타인에 대한 말걸기로서의 '비판'이 공소空消함으로 흩날리고 반향없는 메아리와도 같이 공허할 수밖에 없으며, 타인에 대한 말걸기로서의 '비판'없이 자신에 대한 말걸기로서의 '성찰'은 절대고독에 빠지기 쉽상이다. 문학으로서의 비평은 사뭇 자기고백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공적 담론화를 위한 공적 시도인 것이다. 바른 비평은 '성찰적 비평'이며 '비평적 성찰'이다.

2.
작년에 읽은 <비평과 권력>에 이어 지난 달 <비평의 매혹> 그리고 <비평의 희망>에 이르기까지 권성우의 비평집을 단숨에, 그러나 그 숨을 잘개 쪼개어가며 읽었다. 좋은 산문집 혹은 비평집은 위대한 소설,시에 못지 않는 삶의 매혹을 보여주고, 독자로 하여금 삶의 매혹에 도취당해 그 매혹적 삶을 꿈꾸게 한다는 권성우의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내게 삶을 매혹으로, 매혹적 삶을 꿈꾸게 만들었다.

권성우가 세권의 비평집을 통해 내게 던진 화두話頭는 단연 '성찰'이란 단어이다. 그 성찰은 자기갱신에 다름아닌데, 자기갱신은 질주하는 삶의 가속도에 시의적절한 에피스테메(인식소)를 부여한다. 이것은 요즘 들불처럼 유행하는 단순한 '느림의 철학'과는 다른 유類의 것이다.

느리거나 빠른 속도의 개념보다는 삶에 임하는 자가 얼마만한 진정성을 가지고 그러나 치열하게 삶에 임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갈고 닦아야 하는데, 단순히 기계적인 갈고 닦음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계적인 갈고 닦음 그 너머에 있다.

나는 오늘도 '비판'과 '성찰'의 경계선상에서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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