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8
한수산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한수산, 샤갈 그리고 나! (한수산의 「부초浮草」를 읽고.........)
<- 유년의 뜨락엔 별빛이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

1.
새벽 두시 삼십분. 한수산(1946-)의 처녀작이자 출세작 「부초浮草」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지난 삼일동안 나와 동거동락했던 공중곡예사 하명, 마술사 윤재아저씨, 삐에로 칠룡이, 통굴리던 석이네, 총무 명수 후견인 덕보, 줄타던 연희, 지혜를 한 명 한 명 기억의 강에서 호명해본다.

'기억의 강물 속'에서 걸어 나온 일월곡예단의 그네들이 러시아 비테프스크 태생 샤갈(1887~1985) 의 후기작, <서커스>연작에 나오는 정경들과 오버랩되면서 나를 환영으로 이끌었다.

2.
환영 속에서 걸어나온 저들은 나를 유년의 뜨락으로 이끈다. 눈을 뜨니 고향 정읍터미널 뒷켠 가설무대에 설치한 동춘서커스단 앞마당이다. 만국기가 천막 입구 꼭대기에서부터 더없이 파아란 가을 하늘 위로 펄럭이고, 난 한 마리 철없는 망아지가 되어 이리 폴짝 저리 팔짝 뛰어다니고 있다.

그네들(동춘서커스단)이 정읍터미널 뒷켠에 올 즈음이면, 시절은 어김없이 추석전야 혹은 전후였고 내 호주머니는 두둑해져 있었다. 갓 구워낸 쥐포 한 마리를 게아침(주머니)에 구겨 넣고 한 껏 까치발을 한 체, 서커스가 시작되기를 목빠지게 기다리는 한 소년이 검표를 마치고 가마니 하나를 꿰차고 앉아 공연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시작을 알리는 둥∼둥∼둥∼ 북소리에 장내가 흥청거린다. 굵은 쇠줄에 매달린 오토바이가 천막 한 가운데서 검은 매연을 휙 내풍기면 장내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어린 내 마음도 두둥실 떠울라 샤갈의 전작全作에 자주 나타나는 공중을 유영하는 사람들마냥 천막 안을 날아다니고, 천막 천정 끝까지 올라간 오토바이가 검은 연기에 보이지 않을 즈음 나의 상상력은 최고조로 올라, 급기야 오토바이아저씨가 아마 천정 너머 하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즈음이면 장내의 모든 불이란 불이 확 켜져 버리면서 내 머리 속의 상상력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내 상상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토바이아저씨가 내 코앞에서 양손을 쫙 벌리고 여전히 오토바이를 탄 체 싱긋 웃음을 건네는 것이었다. 오토바이 묘기는 동춘서커스단의 하일라이트였던 것이다.

서커스가 끝나고 뚝방길을 따라 달빛을 받으며 나보다도 먼저 저만큼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발자국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무척 아름다운 밤이었다,라고 적어 두련다.

그래! 일년에 두어 차례 내생에 불현듯 찾아오는 서커스단은 불청객이었다. 그러나 싫지 않은 낯선 손님이었고, 난 기꺼이 낯선 손님을 기다렸다. 서커스단과 천막, 만국기와 사람들의 흥청거림 그리고 귀가길의 달빛과 뚝방 위로 길게 누인 내 그림자 위로 매혹적인 유년의 추억이 켜켜이 쌓이면서 나는 성장했다.

3.
작가는 후기에서 '창조의 정신이란 자기가 가지는 공간空間에 대한 끝없는 파괴와 수정을 통해서만 그 깊이와 폭을 넓혀 갈 수 있다.'고 곱씹고 있다. 누구에게나 삶은 일회적이다. 그러나 일회적 삶은 기억의 집적을 통해 시대를 달리하여 복원되기도 하고 재창조되기도 한다.

한수산의 소설 「부초浮草」는 이야기의 결을 따라 내 유년의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고 과거의 집적체集積體의 산물인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도 한다. 필시 이것이 이야기가 지닌, 소설이 지닌 힘일 것이다,라는 독백을 하고 있는 내게, 황혼의 나이에 접어든 샤갈의 그림 [하늘의 연인과 꽃다발](1983作)이 하늘 가득 넘실거린다.

수줍게 고개를 돌리는 여인에게 작은 꽃다발을 내밀며 사랑을 고백하는 초로의 마르크 샤갈에게 '고향이라는 기억의 풍경'이 화폭을 가득 채워나가면서 이 모든 풍광을 슬며시 바라보는 나를 잡아 이끈다.

지금 내 유년의 뜨락에선 별빛이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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