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꿈꾸다 - 소설 작법과 텍스트 읽기
조동선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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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계속 하다보면, '나도 제법 하는데'라며 스스로 우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게 많다. 내게는 글쓰기와 피아노가 그랬다. 


소설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아, 나는 절대 소설을 쓸 수 없겠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적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단 한번도 없었지만, 

나는 절대 쓸 수 없겠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작가에 대해 

'경애의 마음'을 한가득 품고 수많은 밑줄을 선사해드린 후 책장을 덮곤 했다. 


대학에서 교양 국어를 수강했을 때, 내가 그동안 중고등학생 시절 들었던 국어 수업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내용의 강의를 들으면서 신세계를 영접했던 기억도 선명하다. 교수님이 원형과 통과의례,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나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 빠져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전공과목보다 온갖 문학 관련 교양수업에 더 열심이었고 그런 나를 친구들은 걱정 반, 호기심 반 어린 눈으로 쳐다보곤했다. 


젊었던 시절의 얘기는 늘 낭만의 형식으로 기억되는 법이라서, '소설을 꿈꾸다'를 읽고나니 그 시절의 내가 소환되어 쓸쓸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 시절에 이런 책을 읽었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소설을 읽고 더 깊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오랜 시간 일반인에게 소설 작법을 강의해온 저자는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초심자들에게 선배 작가들이 '그것'을 '어떻게' 썼는지를 살펴보라고 조언한다. 책의 전반부에는 

소설의 설계도 만들기, 소설의 유형과 형식 등 원론적인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만, 핵심이 되는 부분은 '주요 모티브의 소설적 형상화'를 다루고 있는 5장이다. 우리가 소설을 통해 접할 수 있는 43가지의 주요한 모티브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 모티브를 다른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어떻게 구현했는지를 독자가 직접 읽어보면서 체득할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하고 있다. 각 모티브 별로 수록되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쓸 계획이 '아직까지는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알려주는 친절한 선생님의 유익한 강의 노트처럼 다가왔다.  


부분일식이 있었던 어제 하지를 지나 오늘도 더위가 한창이다. 

'문득 졸음이 다가왔다가 또 문득 달아나

긴 해에 발 내리고 책을 펼친다. 하주 <청연당> 

강의 노트에 수록된 한국 소설 작품들을 읽으며 이 여름과 또 다른 계절을 엮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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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밖에 난 자들
성은영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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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되돌아보면 세상에 냉소적인 태도를 갖게 된 건 

생각보다 내가 훨씬 어렸을 때부터였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으슥한 동네 골목이나 인적 드문 공터를 지날 때면 '이상한 남자'들이 나타나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까 불안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쭈쭈바'로 불린 변태 선생님과 복도에서 마주칠까봐 조마조마했으며, 

버스를 타고 통학하기 시작한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붐비는 버스 안에서 심심찮게 

아저씨들에게 추행을 당했고, 여고 시절 상담선생님이 우리들에게 해주신 최선의 조언은 

'그 선생님'과는 가급적 단둘이 있게되는 상황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대학시절의 전철 통학과 직장에서의 회식 자리는 차라리 말을 말겠다. 

더러운 인간들, 피하고 말자, 이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오래 전 일이니 이제는 많이 변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달라진 것은 수법일 뿐 본질은 여전하다. 하긴, 내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피한 것 뿐인데

그런 비겁함으로 무엇이 바뀔 수 있었을까. 


 '눈 밖에 난 자들'을 선뜻 펼쳐들지 못했던 이유 역시 이제껏 피해왔던 기억들을 굳이 소설로 

다시 불러내고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더이상 비겁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고 첫 장을 읽기 시작했고, 단숨에 끝까지 달려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소설의 화자인 귀랑은 지금 바로 아무 포탈에나 들어가 사회 뉴스 몇 번만 클릭하면 만날 수 있는, 넘쳐나는 'N번방'의 수없이 많은 '익명들'이다. 지나치다 싶을만큼 전형적이어서 이 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과연 얼마나 밀도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지 초반부에는 조금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런 의문은 귀랑의 시선 너머로 등장하는 유정 씨와 박꼭지의 실루엣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세대가 몇 번 바뀌어도 고인물처럼 변하지않아온 귀랑의 평면 세계는 이에 맞서 싸워온 유정씨와 박꼭지의 입체 세계를 만나 균열하기 시작한다. 


가해자 귀랑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범죄라는 사실에 두려워하면서도 

'설마 할머니가 하나뿐인 손주를' 저버리고 피도 한방울 안 섞인 근본도 모르는 

촌계집애 편을 들겠냐며 주문을 외우듯 불안감을 떨쳐버린다. 


'말로는 혈육의 정에 이끌리면 안된다고 하면서도' 손주가 끝까지 반성하기를 

내심 간절히 기다렸던 할머니는 '대물림될 죄악은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는

피해자 박꼭지의 확고한 반박에 결국 손주에 대한 단죄에 동참한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그려나가는 세상의 물줄기는

혈연으로 지켜왔던 공동체에서 

입장과 세상관이 같은 사람들이 연대하는 공동체 쪽으로 그 흐름이 바뀌고 있다.

'눈 밖에 난 자들'을 벙커에 가둬두는 행위는 

바로 이런 연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관성으로 자라온 세상의 중심축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만큼 여전히 뿌리깊다. 

유정 씨가 만든 '아방궁'은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아직도 문제의 본질은 깨닫지못한 채 '사방이 막힌 지하 벙커'에서도 

'어딘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지 모른다' 여기는 수많은 귀랑이들이 활보하는

세상이라면, 박꼭지 이후의 세대에게도 희망은 멀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나면 벙커의 단죄가 주는 후련함보다는

그 이후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결국은 종착역이 아닌 경유역일 수 밖에 없는 유정 씨의 '아방궁' 

다음 역에는 언제쯤 열차가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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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트러블 - 그림으로 읽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 인문학
정일영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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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 책꽂이에 꽂아둔 채 아직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을 눈으로 훑어보며 생각한다. 이것은 사치일까, 허영일까. 사치라면 멈춰야하고, 허영이라면 반성해야하나. 힘들고 불안할때마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는 대신 책을 집어드는 내 모습을 돌아보며 책 읽기가 내게는 현실 도피 수단이라는 자책도 한다. 

작가 정일영의 '러브 트러블' 서문을 읽는 순간, '현실 도피 세계'의 동지를 만난 것 같아 기쁘고 반가웠다. 작년 초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니가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을 받은 후 뇌과학, 정신분석, 심리학, 그리고 결국 다다를 수 밖에 없는 철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책들을 두서없이 사다 읽으며 과연 이 책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작가 역시 나와 비슷한 맥락의 경험을 하고 있었다. 

'보편적인 감정이 담긴 그림 이야기'를 구상했던 작가가 치열한 독서와 사색 끝에 도달한 주제는 '사랑'이다. '내 사랑은 실패였다'는 작가의 고백은, '소설은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던 천명관 작가의 말과 포개졌다. 방점은 실패가 아니라 이야기에 찍혀있다. 이야기는 실패 그 이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빠지다, 앓다, 아프다는 말들은 열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와 연결되어 고통과 상실의 서사로 기울어진다. 대상(바이러스)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정말 ‘트러블’일까? 


이야기의 문은 그림을 통해 열린다. 사랑을 할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감정들이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독자에게 소개되고, 저자는 신화와 문학, 음악, 영화, 철학을 넘나들며 그 감정의 역사와 의미와 흔적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그리거나 쓰거나 고뇌해왔던 창작자들의 작품을 들여다보며 
그들에게 깊은 사랑과 연민과 질투와 연대를 동시에 느꼈던 듯하다. 
‘어리석었던 사적 사랑의 역사에 대한 반성문’이라는 
저자의 고백은 그 다중적인 감정들 속에서 길어올린 사유의 결과물이다. 

나는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그동간 실패해왔다고 여긴 사랑(트러블)의 치유(러브)에 닿았으리라 짐작해본다. 혹시 아직 그러지 못했더라도, 이 책을 읽고 독자로서 작은 위안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의 치유에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다. 저자와 독자의 ‘관계 인문학’은 그렇게 쓰여지고, 결국은 비동시적일 수 밖에 없는 대화의 즐거움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제껏 한번도 봄날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앞에서 나는 늘 우울해지고 
의욕을 잃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잔인한 봄으로 기억될 2020년 봄을 보내며 
나는 처음으로 길가의 꽃들에게 마음이 열렸다.  
사람과의 사랑에 늘 서툴러 
내 속에 사랑따윈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호기롭게 외면해왔던 내가 ‘트러블’이었을까. 

벚꽃이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고 
벚꽃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듯이, 
무참히 가버린 봄날을 굳이 사랑으로 기억하려는 
자기 기만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보인다는 
저자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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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 - 조현병 환자의 아들들이 들려주는 열두 가지 이야기
수잔 L. 나티엘 지음, 이상훈 옮김 / 아마존의나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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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가슴을 졸이며 100일 넘게 바이러스로부터 우리의 일상을 지켜내려 함께 노력했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가족인 240여명은 세상을 떠났고, 며칠 전에는 역시 누군가의 가족인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불길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그리고 누군가를 지켜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때로는 그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고 

우리는 그저 무기력한 존재라는 생각에 이제껏 버텨왔던 마음이 무너지기도 한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이런 상황 자체가 일상이 되어있을 것이다. 

특히 '부모가 환자'이고 '그 가족이 자녀'일 경우,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자녀들이 겪게 될 내적 외상은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듯하다.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은 '조현병 환자의 아들들이 들려주는 열두 가지 이야기(부제)'이다. 심리치료사인 저자 수잔 L. 나티엘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부모를 가진 열두 명의 아들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저자 역시 어머니가 조현병을 앓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됐고 

이 책에 앞서 딸들의 이야기를 다룬 <광인의 딸>을 썼다. 아들 버전의 두 번째 책을 쓰게 된 것은 출판사의 제안도 있었지만 자신의 오빠가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사실도 중요한 집필 동기가 됐다. 


정신질환을 앓는 부모를 가진 자녀들은 가정과 가정 밖에서 내적, 외적으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가정에서는 대개의 경우 그 일에 대해 침묵하거나 비밀에 부치면서 가족간의 신뢰와 연대감을 키울 여건을 상실하게 되고 가정 밖에서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 때문에 소외되어 상처받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지못한 채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자기도 부모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의 이야기에서 얻은 해답 중 하나는 '회복탄력성'이다. '회복의 순간을 붙잡는 아이들의 능력'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능력이 자녀들의 삶을 관통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려주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그 일은 너희들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부모와 부모의 병을 구분해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무엇이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개방성, 자유로운 대화, 그리고 이해'에 달려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대중적이지 않은 주제에 대한 책을 펴냈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그것 말고도 이 책이 돋보이는 점 중 하나는 이 책을 옮긴이와 편집자의 전문적이고도 창의적인 시선이 주제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여준다는 것이다. 원서를 읽지 못해 비교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저자가 한국어 버전을 본다며 훨씬 더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만족했을 듯싶다. 서구적인 

접근방식과 문화적 차이 때문에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도 이런 노력을 통해 

좁혀지고, 옮긴이가 챕터마다 들려주는 후기를 통해 한국 현실에 맞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심리적으로 그들을 마주할 마음의 항체를 만들게 되고 

그 자체가 집단 면역의 힘으로 우리 사회를 조금은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집단 면역'이라는 말이 다소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결국 누구도 섬일 수 없으며 율라 비스가 <면역에 관하여>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며 세상은 우리가 함께 가꾸는 경계없는 정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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