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트러블 - 그림으로 읽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 인문학
정일영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다 책꽂이에 꽂아둔 채 아직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을 눈으로 훑어보며 생각한다. 이것은 사치일까, 허영일까. 사치라면 멈춰야하고, 허영이라면 반성해야하나. 힘들고 불안할때마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는 대신 책을 집어드는 내 모습을 돌아보며 책 읽기가 내게는 현실 도피 수단이라는 자책도 한다. 

작가 정일영의 '러브 트러블' 서문을 읽는 순간, '현실 도피 세계'의 동지를 만난 것 같아 기쁘고 반가웠다. 작년 초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니가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을 받은 후 뇌과학, 정신분석, 심리학, 그리고 결국 다다를 수 밖에 없는 철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책들을 두서없이 사다 읽으며 과연 이 책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작가 역시 나와 비슷한 맥락의 경험을 하고 있었다. 

'보편적인 감정이 담긴 그림 이야기'를 구상했던 작가가 치열한 독서와 사색 끝에 도달한 주제는 '사랑'이다. '내 사랑은 실패였다'는 작가의 고백은, '소설은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던 천명관 작가의 말과 포개졌다. 방점은 실패가 아니라 이야기에 찍혀있다. 이야기는 실패 그 이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빠지다, 앓다, 아프다는 말들은 열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와 연결되어 고통과 상실의 서사로 기울어진다. 대상(바이러스)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정말 ‘트러블’일까? 


이야기의 문은 그림을 통해 열린다. 사랑을 할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감정들이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독자에게 소개되고, 저자는 신화와 문학, 음악, 영화, 철학을 넘나들며 그 감정의 역사와 의미와 흔적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그리거나 쓰거나 고뇌해왔던 창작자들의 작품을 들여다보며 
그들에게 깊은 사랑과 연민과 질투와 연대를 동시에 느꼈던 듯하다. 
‘어리석었던 사적 사랑의 역사에 대한 반성문’이라는 
저자의 고백은 그 다중적인 감정들 속에서 길어올린 사유의 결과물이다. 

나는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그동간 실패해왔다고 여긴 사랑(트러블)의 치유(러브)에 닿았으리라 짐작해본다. 혹시 아직 그러지 못했더라도, 이 책을 읽고 독자로서 작은 위안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의 치유에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다. 저자와 독자의 ‘관계 인문학’은 그렇게 쓰여지고, 결국은 비동시적일 수 밖에 없는 대화의 즐거움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제껏 한번도 봄날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앞에서 나는 늘 우울해지고 
의욕을 잃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잔인한 봄으로 기억될 2020년 봄을 보내며 
나는 처음으로 길가의 꽃들에게 마음이 열렸다.  
사람과의 사랑에 늘 서툴러 
내 속에 사랑따윈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호기롭게 외면해왔던 내가 ‘트러블’이었을까. 

벚꽃이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고 
벚꽃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듯이, 
무참히 가버린 봄날을 굳이 사랑으로 기억하려는 
자기 기만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보인다는 
저자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