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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보이네 - 김창완 첫 산문집 30주년 개정증보판
김창완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3월
평점 :

새로 쓴 글 8편과 직접 그린 그림 20점을 더해 나온 책. 가수, 연기자, 라디오DJ, 화가의 김창환이기 이전에, '사람'김창완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에세이. 회고로서의 글들이 아니라 그 시절 한 컷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글 속에서 여전한 저자의 감성을 느낀다. 따뜻한 시선, 담백한 성찰, 좀 더 괜찮아지길 바라게되는 내일의 무탈한 하루를 기대하게 만드는 글이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나래이션을 해 주고 있는 듯한 아저씨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할 테니 이 담백한 글들을 통해 삼삼한 생을 바라게된다.

📖아픔 담아둘 서랍 하나_ 그러니 괴로움도 아픔도 없애려 하지 말고 다 담아두세요. 이것도 내 건데. 그리고 나중에 보면요, 거기서 심지어 향기도 나요. 그런 것들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나이가 들어서 느끼는 상실감은 어릴적 느끼던 감정과는 사뭇 달랐다. 어린시절에 반해 상처가 나더라도 아무는 것이 더디기도하고, 더 쓰리게 느껴지는 것. 아파도 티를 내어선 안 되는 듯 하다. 여기저기 투정부릴 곳도 마땅치 않아 속앓이만 하다보면 곪아지는 마음도 눈에 보이는 상흔도 아리게 다가온다. 그렇다보니 줌치 저 구탱이로 몰아넣고 영영 안 꺼내고픈 마음으로 몰아 세운다. 허나 마음이 단칸방인데 그리 쥐구멍처럼 쑤셔둔들 뭔 소용일까. 그러니 그냥 두자, 그냥 냅둬 버리자! 두어도 괜찮을거다. 다만 너무 미워만 말자. 그 순간에도 나였고, 그걸 버텨낸 것도 나니까. 쟤를 지우려하면 나라는 존재 자체도 일부 소실되는거니까.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사랑하라_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사랑하라. 그리고 기뻐하라. 삶은 고달프지만 아직 더 먹을 나이가 있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비록 임종일지라도.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아이들, 스무 살이 된 청소년들, 스물 몇엔 '~님'이나 '~씨'로 불리울 당신들, 세상이 익숙한 서른 즈음의 당신들, 익숙을 넘어 우화(羽化)해진 마흔 대여섯의 그대들, 새삼 모든게 다시금 새로워보이지만 정작 자신은 묽어진 쉰의 여려진 시절까지. 우린 이렇게 몇 번의 과정을 넘어왔고, 몇 번의 계절을 돌아 내고 있었다. 때 마다, 철 마다 저자는 사랑하라 말하고있다. 이 찰나를 지나쳐버리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임을 알기에 아주 노력하여 사랑하며 기뻐하라고 말해준다. 당신이 살아봤는데 어떠한 문명의 발달이 온들 세월은 역행 할 수 없고, 다시 살아볼꺼라고 되감아 버릴 수 없는걸 알아 더욱 진심을 다해 말해주고있다.
이렇게도 사랑하고, 저렇게도 기뻐하다보면 삶은 생각보다 유순하게 흐르고, 다음 연령 회차의 사랑이 기대되기 때문이겠지.
어떤 이는 사랑하기도 부족한 시간이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사랑하기 딱 좋은 날이라 하지 않던가. 나보다 한 줌이라도 더 산 사람들이 해준 이야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느낀다. 겪어 본 만큼의 사실감 넘치는 조언은 없으니까.

📖주정뱅이 올림_ 오늘 꼭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 '축하합니다'라고 쓴 편지.
오늘 꼭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은 / '사랑합니다'라고 부른 노래.
백만 송이 꽃보다 더 주고 싶은 것은 / 당신이 조각한 내 속의 나.
하늘보다 땅보다 더 주고 싶은 것은 / 내가 조각한 내 속 당신.
주정뱅이 올림.
이 주정뱅이 아저씨를 어찌할꼬. 잠시라도 한량이 되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술의 힘들 빈다는 걸 알기에(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게되면 또 나무라실게 뻔해보인다. 나이들어도 말 안 듣는 아들인걸 아시겠지만 걱정을 그득히 하시겠지) 아내는 가시돋힌 말 대신 북엇국으로 남편을 달랜다.(이렇게 달래주니 아저씨는 더 미안해 했겠지) 어쩌면 짠하고, 또 어쩌면 한 없이 측은한 사람을 대하며, 저리라도 풀어내야 살지 싶은 안쓰러움이 그득한 아내의 말에 저자는 정신이 번뜩 든다. 그리고 아내의 학위 수여식이 오늘이라는 것도 알아차리며. 짧막한 시에 마음을 전하는 저자만의 애정표현을 들여다본다. 때론 구구절절한 사랑의 말보다, 두손 두둑하게 만드는 애정의 물질화보다, 담백하고 응축된 애틋함의 마음. 그리고 반성하고 있노라는 글쓴이의 닉네임까지. 한 없이 쭈구러든 덩치로 아내를 맞이할 저자의 현관앞을 생각하면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진짜배기 기다림_ 그들은 행복을 기다린다. 성급한 사람은 이런 기다림 자체가 곧 행복일지 모른다고 애써 행복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은 착각과 다르다. 행복은 조건을 바라지 않는다. 기다림이 행복을 향한 길일 수는 있으나 행복 그 자체는 아니다.
행복을 향하는 길에서 벌써부터 행복하다 여기는 착각. 그 과정부터가 즐거운 마음이겠다만 오롯한 행복의 자체는 아니라는 점. 그래서 어렵고 단정짓기 어려운 마음이다. 기다리는 행복, 향하는 행복, 도달한 행복, 회귀하는 행복. 행복을 꾸며주는 단어들이 달라 행복인지 아닌지 아리까리해지는 틀린그림찾기 같은 감정들.
지금의 내가 겪는 감정은 진짜배기 감정일까 진짜배기에 닿기 위해 한 없이 달려가고있는 순간의 감정일까. 화려하게 꾸며진 것보다 수더분하고 푸석한 찰나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며 진짜 남편과 아내라면 나는 거진 도달한 상태라고 믿고싶어지는 마음의 결이다.

📖길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_ '남의 길 기웃거리지 말고, 너의 길을 걸어라.' 어떤 청춘이라도 겨울나무가 가진 잠재력이 있거든요.
저자가 딛은 길마다, 갈려진 방향마다 선택했던 찰나를 적어두었다. 후미진 구석방에 살 시절, 면접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차비가 없어 한참을 걸어야 했던 그날의 도로, 나 하나만 건사해도 될 순간을 넘어 스물여섯에 아이를 낳아 아버지가 되어 했던 다짐. 자신의 삶에 있어 이러한 것들이 제일 커 보이는 결심의 정점이라 여기지만 결국 매 순간 선택했고, 그 이전에 고뇌했던 순간이 있음을 알렸다.
거창하다 여기는 것 말고, 매일매일 해내야 하는 일들 속에서도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못하겠으면 한번 정도는 빙 둘러도 가고, 영 자신이 없다면 오늘은 못하겠다고 말끔히 두 손을 머리위로 번쩍 들어보는 깔끔한 포기. 다 해내야하고 다 이겨야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도 죄다 나여야 함은 아니라고 알려준다. 못하겠으면 돌아도 갈 수 있는 미련 없는 이른바 개쿨한 마음. 못했다고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진 말자고 말한다. 스스로 초라하게 여기는데 어느 누가 자신을 귀히 여겨주겠냐는 마음으로 자신을 애틋해하고 그래도 된 다는 마음을 새겨보게 만든다.
내 삶은 고속도로의 초록, 분홍으로 그려진 유도선도 없고 구간단속으로하며 다그치는 지점도 없다. 쭉쭉 직진이 가능하고, 가끔은 오른쪽으로 빠져 우회해도 되는데 모두가 추천하는 최단거리만 생각한 내 삶의 방향을 반성하게 만든다.
공기가 부드러워진 봄날의 어떤 하루. 책이 주는 온도와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봄바람의 촉감이 닮아있어 더욱 집중하게 되어 글 속에 흠뻑 젖어들게 만들었다. 과장도 미화도 없어 담백하지만 그렇다고 밍숭하지 않은 글. 책 속에 남겨있는 아저씨의 구석구석을 보며, 나 역시도 모순과 결점을 폐기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잘 숙성된 청춘이었노라 말할 수 있는 인생을 바라게된다.
드라마 삼순이의 초콜릿 상자처럼, 또 창완아저씨가 말했듯 삶의 순간 대신 입속에 훅 하고 털어넣을 쓴 커피처럼, 나의 순간이 좀 더 부드럽고 달게만 느껴지길 바라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