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변기의 역학 TURN 3
설재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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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기반으로 한 배경에 판타지적 요소를 얹어서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음과 함께 내가 원하는 것이 가장 평범한 삶인데, 그 평범함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로 보였다. 그리고 내가 익히 아는 그 소설과 많이 닮아 있어서 설재인 버전의 정보라의 '머리' 외전이라 봐야 하나 생각하며 소재만 당겨 왔기를, 중후반부는 또 다른 이야기이기를 바라며 읽었던 듯 하다.

그리고, 이 책은 정보라의 머리를 읽을 때 만큼이나 뭘 먹으며 읽지는 못한다. 책을 읽을 때에 항상 커피나 차를 곁에 두고 가장 편한 자세로 읽는 사람인데 무얼 마시거나 먹으며 볼 수 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변기가 나와서 만은 아니다. 모친의 신체 일부를 깎아 버리는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자식의 자존감이 한몫했다. 사회가 필요로하고 쓸모있는 사람으로서의 확장이 변기속 버려지는 무언가 만큼이나 속을 꿀렁거리게 만들었다. 부모와 자식간의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홀대받는게 익숙해지는 환경과 사랑받지 못함으로서 쌓여가는 분노와 거리감은 애틋함의 관계와는 정 반대의 시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아침에 회사가고 저녁에 퇴근 하는 삶을 영위해 가는 것에 발판이 되거나 이 나이 대에 다들 그렇게 사는 것처럼 독립해서 내 공간을 이루며 사는 삶. 제 목구멍에 풀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쓸모있는 인간으로 구분 할 수 있는 구실로 부모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어떤이는 501호와 401호의 남녀가 요즘 말하는 다단계에 빠져버린 귀 얇고 세상물정 모르는 청년들이라 치부 할 수 있겠지만 그 시대를 같이 겪어 나가는 또래인 내가 보기엔 오죽했으면 이라는 말을 읊조리며 딱하고 짠하게 보게된다.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지속적인 무시와 하대를 받는 이들이 유일하게 대우받고 응원받았던 집단이 그곳이었는데 어느 누가 그 달콤한 이야기에 넘어가지 않을까. 봉수파괴는 그 건물 청년들의 자존감도 함께 하수구로 끌어내린 것으로 다양하게 의미를 부여하게된다.


📖진짜 마지막 효도다, 하고 갔다가 진저리를 치며 돌아오고. 그런데 또 몇 달이 지나면 그래도 연락은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전화를 걸고. 그럼 엄마가 막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고 울잖아요. 그러면 내가 되게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어요.

열 손 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열 손 가락 깨물면 다 아프긴 한데, 유독 더 아프고 더 아린 손가락이 있다. 일정하게 배분되는 공통의 애정은 없다는 걸 나누는 부모는 모르겠지만 받아본 자식놈들은 다 느낀다. 그래서 속으로만 미워할 뿐이다. 아프다고 악을 쓰고 더 울어대면 영영 봐주지 않을까봐 눈치를 가득 보는 손가락들은 이 악순환이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괜히 저 혼자 걱정하고 저 혼자 짐작하는게 습관이 된 것을 보면 아정은 장녀라는 포지션과는 별개의 손가락이다. 유독 그런 자식들이 있다.



📖과장님, 어렵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냥요.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불행한지 생각하고 그 불행의 원인을 제거할 방도가 무얼까 고민해보면 돼요. 없던 방도를 우리가 만들어주는 거거든요. 그 자리만 긁어 줄 수 있으면요, 아무리 돌려 말해도 고객들은 척하면 착 알아들어요.

사람을 혹하게 하는 대단한 언변과 함께 이른바 우쭈쭈해주는 직장 상사와 동료가 있는 공간. 그러니 뭘 더 잘 해보려 애쓰게되는 두근거림이 가득한 모습을 보면 아정이나 상기나 자라오는 과정과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인정욕구의 충족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이 실버스파클의 집단에 목을 메는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직장이 있어야 낮에 모친과 한 공간에서 티격태격 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남들이 다 갖는 소속감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필요성을 맛봤기에 더욱 결연해짐을 알 수 있다. 자신만이 자신같은 사람들을 구제 해 낼 수 있다고 여기는 히어로의 환상이 너무 크게 씌워졌다.



📖제가 진짜 막막할 때마다 엄마가 마지막 보루였거든요? 무조건 내 편 들어주고 돈도 어떻게든 끌어다가 메꿔주고. 그런데 이제 엄마가 말을 못 하잖아요. 그럼 내 편은 누가 들어주지. 없는 거예요. 정말 아무도. 엄마 목소리를 못 듣게 되니까 바보처럼 그제야 알겠는 거예요. 이제 나 완전히 혼자라는 걸.

미운데 계속 미워 할 수 없고, 싫은데 안 보면 마음에 걸리고, 끊어내고 싶은데 그럼에도 자신의 마지막 끄나풀 같은 존재가 모친이라서 서로를 할퀴는 조합. 상기는 엄마가 마지막 보루였다 했고, 아정은 엄마가 마지막 핑계거리였으며 자신을 이 좁고 막혀있는 화장실에서 구제 해 줄 유일한 존재로 인물설정을 다시 하게된다. 사랑하니까 걱정되고, 사랑하니까 계속 신경쓰며 싫은 소리도 하게된다는 그러한 애증의 표본처럼.

당신이 빚어낸게 난데, 나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뭐하냐는 식의 상기와 아정의 투정어린 변명. 이 지긋지긋한 관계는 한쪽만의 액션으로 이뤄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쟤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쌍방과실이지 모.


📖맞아본 적이 없는 애들은 꼿꼿하게 앉아 있는 자세에서부터 티가 났다. 걔들은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주로 관찰했고 자주 경탄했으며 무엇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집이라는 이름의 방공호가 있기 떄문에. 집이 방공호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어린 아정에게 집은 가장 위협적인 곳, 몸을 가장 아프게 하는 곳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모성애를 얻어 내진 못했으나 남들이 차고 넘치게 얻어가던 그 모성애를 눈으로 봐오며 자랐기에 그게 필요로 하지 않은 성인이 된 지금에도 채워지지 않은 그 결핍에 욕심을 내게된다. 재물의 부유함이나 여건의 풍족함보다 아정은 심적으로 채워지지 못한 그 결핍이 봉수파괴 만큼이나 하수구로 쓸려내려간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로 설정을 해 둔 듯 했다.


저자는 이들과 비슷한 여건으로 이 이야기의 시작점을 얻어냈다. LH에서 공급하는 전세형 청년매입 임대주택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청년들을 위한 하나의 제도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곳을 가고싶어도 못 하는 부류, 그 곳에 안착하게되었지만 영원하지 못한 임시의 공간이라 불안해 하는 부류, 더 나은 더 그럴듯한 조건과 비교하며 한없이 작아지는 부류간의 갈등도 길게 이어가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의 감정봉수파괴를 드러낸 것이다. 그게 정보라의 머리와 맞물린 것이고, 그 단편에 외전이라는 또 하나의 갈래로 결론을 짓게된다.

후반부에 아정이 갖혀있는 욕실에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가며 모친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맞추는 과정은 웃프면서도 찌질의 끝을 보여준다. 혈연으로 엮인 존재의 덩어리였다가 제 손으로 깎아내어 소각되지 못한 채 하수구로 버려지는 무쓸모의 그것을 긁어모아서라도 제 삶에 끄나풀을 만들려는 간절함. 지속적으로 하대하던 모친의 잘못일까, 사랑하는 이로서 남겨두지 못하고 깎아내어서라도 야금야금 없애버리고 싶었던 아정의 잘못을까. 그저 봉수파괴로 인해 욕실에 가둬질 수 밖에 없던 상황의 잘못일까. 모든것을 그 변기 탓이라 하고 싶지만 연대 책임으로 한대 묶어 쓴소리 한판 하고 싶어지는 현실감 낭낭한 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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