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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의 필요 ㅣ 청색지시선 11
김지윤 지음 / 청색종이 / 2025년 1월
평점 :

표제에 있는 '피로의 필요'라는 글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 소개를 보면 '피로'가 가진 이야기는 삶의 소모적 부산물이 아니라, 멈추어야 할 순간을 가르쳐주며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고 삶의 방향성을 다시 묻는 자리로 확장하는 단어였다. 피로는 존재의 내면을 파고드는 성찰의 도구,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진실을 마주하며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계기로 봐 달라고 했다.
'피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고 사색을 위한 어두운 방을 제공하며, 삶의 다른 국면을 열어주는 중요한 고비, 생의 문장 속에서 문득 등장하는 쉼표, 그리고 질문의 시작점과 같다'고 대담을 통해 전해두었다. 시인의 말 처럼 피로가 만들어 준 여백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기에 나는 또 어떠한 마음을 갖고 이 문장을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당연한 말_ 다 그런거지, 라는 말
상냥하고 무관심한 목소리 당연한 세상에 당연한 말은 왜 이리 많은지
바람결에 저절로 밀리는 문처럼 눈앞에서 무언가가 굳게 닫히는 소리
당연한 세상에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헌데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없었고 누군가에 의해 그리 만들어졌고 누군가로 인해 우린 편히 당연했었다고 기억하는 것들을 떠올려본다. 뒤에 이어질 몇몇의 시는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불러내며 잊힌 존재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묻고있다. 그 이야길 듣고 읽게된 시 들에도 팍팍했을 그 시절을 겹쳐보게된다. 이유없는 아픔과 이유없는 단념은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우산_ 햇빛 아래선 도무지 쓸모없어 보이는 그것을 어디선가 나도 몰래 떨구어 버리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우산을 힘껏 쥔 나는 이방인 같다
앞에서 당연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을 이어갔다면 '우산'이라는 시에서는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어진 것들을 나누는 마음을 떠올리게된다. 한 때엔 당연히 손에 쥐고 쓰이던 것들이 바뀐 환경에 의해 성가신 것들로 취급하게되는 과정. 영영 쓸모 없을 것은 아니나 당장에 발치에 거슬리는 것으로 취급하게되는 여건과 내 처지. 읽다보면 어디 이게 물건에만 한정된 마음일까를 생각하게된다. 사물을 너머 나라는 존재, 인간에 대한 쓸모와 필요도로 시선을 돌리게되면 서글퍼지고 마음이 아려진다. 맑은 날 우산을 쥔 내가 이방인처럼 여겨지듯, 모두가 제 할일을 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틈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은 채 어중이떠중이가 되어 붕 떠있거 같아 내 손에 달린 우산을 더욱 꽉 잡게된다. 내내 화창한 날에 한번 스칠 소나기를 위해 우산을 간직하는 마음처럼, 어느 순간에 내가 아니면 안될 그 타이밍을 기대하며 내가 나를 놓아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충분_ 작별을 배우지 못해서 기다리기도 했다
겨울나무 위에 남은 까치밥처럼 이미 때를 넘겼더라도 뒤늦은 쓸모라도 있다면 차라리 영영 충분해지는 일이 없기를
필요했고, 충분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만한게 없을 때를 기다리는 어떤 날을 생각한다. 꼭대기에 걸린 까치밥, 저놈은 작별을 배우지 못해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얇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고 있는 축 쳐진 것이 내 쭈그러든 마음을 닮아있는 것 같아 신경 쓰인다. 어째 사람에게도 손을 타지 않았고, 까치들에게도 선택받지 못해 이 추운 겨울 꼬챙이 같은 가지하날 붙들고 사는구나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마지막을 멋드러지게 장식할 때를 기다리는 진득한 놈은 아닐까 싶어 저놈이 진퉁일거라는 믿음을 전해보기도 한다. 충분에는 다 이유와 타이밍이 있을테니까. 그리고, 이 시를 읽은 청춘의 누군가 역시 아직 충분하지 못한 타이밍으로 출격이 보류되었을 수도 있을테니 두 눈 질끈감고 주변의 비교는 못본 채 하고 충분했을 어느날을 진득히 기다려주었으면 좋겠다.

📖놀이동산_ 그렇지, 우스울 뿐이지 장난스러울 뿐이지
바로 이렇기에 모든 게 놀이가 될 수 있는 걸 테지 전부 다 가까이기 때문에
모든게 신기하던 시절. 그러니까 어딜 가든 별천지 같던 어릴 때를 떠올려본다. 동화속으로 들어온 듯한 놀이동산은 내가 공주가 되고, 왕비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회전목마를 타고 있노라면 차가운 플라스틱에 조악한 색칠을 한 말이라는 현실 대신 백마탄 왕자님도 이 말을 타고 오지 않을까를 상상해 보기도 했고, 내가 이 회전목마 한바퀴를 돌고 나면 반짝이고 긴 모자를 쓴 요정할머니가 요술봉을 휘둘러 호박을 마차로 바꿔 줄 줄 알았다. 모든게 동화이며, 하는 행동들이 놀이가 되는 때가 있었다.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똑같은 나인데 마음과 시선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동화가 되거나 조잡한 현실이 됨을 경험했다. 온 세상이 반짝이며 화려했던 내 시선은 속세에 닳고 달아 눈이 시리거나 어딘가 모자라보이기만 한 어설픈 레이저쇼로 입꼬리를 삐죽 내려놓게 된다. 그런걸 보니 놀이동산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나만 시간에 닳아간 사람같아진다. 그 때의 마음은 어디에 팔아먹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행복했던 놀이를 이제서야 하찮고 시시한 가짜로만 보게되었을까.
이 시집을 다 읽고나면 잊혀지고 지워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질문과 사유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여백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땐 소중했고 그땐 애틋했는데 지금은 모든것에 흥미가 떨어진 밍숭밍숭한 사람의 내가 보였다. 일단 나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걸 알게되었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다음 시작으로 넘어가 어떻게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열어둘지를 다시금 정돈하는 마음을 고쳐먹어 보고싶어진다.
📖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된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