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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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분야에 빠삭한 기자가 말해주는 이야기들. 그래서 더욱 가감없이 말해 줄 것 같았고, 눈으로 직접 본 사건과 실태를 책상머리 논쟁으로 끝내지 않을 듯 해서 관심이 갔다. 고통의 재현에 대한 언론인의 자기 성찰만 하는 것이 아닌 동시대 언론 환경에 대한 저항적 성찰이라고 말한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이야기도 솔깃했다. 이러한 자극적인 소재가 단순히 '좋아요'로만 표현되는게 맞는건지. 무한정 리포스팅 되어가며 퍼지고 알려지는게 맞는건지. 필터 없이 너도나도 화재거리가 된다며 쉽사리 게시를 하며 단순 눈요기거리로 밀어부치는게 맞는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해 주는 글 이었다.

이러한 게시물을 너댓개 보다보면 알고리즘은 더욱 자극적이고 날이선 영상과 사건사고들을 꿰어 나를 고통에 무딘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어느 4월의 봄도 그랬고, 어느 10월의 끝자락도 그러했다. 어느 매체를 돌려봐도 똑같은 영상을 반복 재생시켰고, 필터 없이 쏟아내는 영상과 사진들은 블러처리없는 자극적인 프레임에 가두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다 정신차리고 나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눈앞에 자극 적인 상만 남겨져 일상생활에 피로감을 몰고왔다. 어느순간부터 뉴스를 보지도 않게되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은 휘리릭 넘겨보게되며 굳이 찾으려 하지 않

는 나를 마주 하게되더라. 이미 벌어진 일 이었고, 내가 이 걸 파고들며 수십번 본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으며, 그 상황에 있던 사람들도 알권리와 도움의 손길의 양자택일 상황까지 내가 가늠하며 피로도가 쌓이는 걸 체감했기 때문이다.


보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세상이니 대규모 구경이 되어버린 뿐인 현재. 거기서 구경만 할 지. 함게 슬퍼하며 내가 손을 거들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낼 지에 대한 상황인지와 성찰의 반복. 계속되는 사건과 현상을 나열하며 죄책감은 넘치게 받아뒀다. 이제 이걸로 우리는 방관의 자세로 방조하며 일을 더 키워 갈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입장에서 무어라도 해보려 머리를 쥐어 짜 내 볼지는 이 책을 다 읽어 갈 때 즈음 알아서 판단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보 전달의 목적을 두고 있는지, 아니면 지금 상황에서 화두로 떠오른 이 사건에 대한 많은 언급을 당하며 본인의 계정의 조회수를 올리는 단순한 의도가 담겨 있는지는 계정의 주인 본인보다 퍼다나른 게시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고통의 중계인이기보다 고통 중계를 함으로서 얻어지는 개인적인 이득이 더 큰 사람들의 계정은 영상이든 문장이든 감정의 온도가 없다. 그리고 애도의 글 조차 예의상 적어보며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막이 활자나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언론도 정보 전달이 목적이라며 이유를 내세우겠지만 이러한 근접적이며 자극적인 영상과 사진을 통해 더 많은 이목을 얻기 위함이었으니 모두가 이득을 위한 자동재생 기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이러한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기자와 언론인은 기레기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고, 특정 몇몇의 특종 우선 주의가 시청자에겐 피로도가 큰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게됨을 느낀다. 고통의 재현을 번복하며 이 기운을 유지하는게 맞을지, 짤막하게 전달 후 일상의 기사들로 채워 고통을 덜어내는게 맞을지는 시청자로서도 무엇이 맞다 단정 짓기 어렵다. 알 권리와 더불어 이 사건의 목소리를 키우는게 모두에게 이로울지, 자극을 키우지 않고 각자의 선에서 빨리 수습을 하는게 나을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매번 이걸 잘한다고 할지 그만해라 할지는 누구에게도 권한은 없어보인다. 다만, 인간이라면 자각을 하며 본인 스스로가 정도의 선을 지켜주길 바라는 것 외엔 힘이 없음 씁쓸해질 뿐이다.



📖좋아요와 리트윗, 그 이상_ 고통의 중개인인 동시에 현장의 목격자로서, 두 역할에 따라붙는 윤리적 딜레마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도무지 실패하지 않기 어려워진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촬영의 의도부터 영상을 공유하는 매체와 방법을 결정하는 것까지 윤리가 개입할 수 있는 빈틈은 너무 많고, 미끄러질 틈도 많다.

저널리즘이 갖고있는 난제겠지. 이 정보를 소비할 부류에게 정보와 지식 전달을 함으로서 더 나은 판단과 확실한 선례를 남길 것인가는 제작자의 의도일 것이고, 다르게 받아들일 청취자는 제작자가 의도한 것의 틈을 노려 컨트롤 되지 않은 부분만 공략당하는 언론 총알받이가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좋아요와 리트윗, 그 이상_ 고통을 판다. 고통을 본다. 고통은 눈길을 끌고...... 때로는 돈이 된다. 고통이 자주 구경거리가 됐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콘텐츠가 된 고통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클릭을 갈망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산업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버글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통을 착취하거나 구경하고, 모른 척 지나친다.

더 큰 자극, 더 과감한 영상을 갈망하듯 손가락은 다름 페이지로 끌어올리게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같은 것만 반복하게된다. 타인의 고통은 모르겠고 내가 보던 프레임에서 다른 각도로까지 찾아보며 감정에 무딘 인간이 됨을 느낀다. 그렇게 타인의 고통을 긁어 모아서 남는건 뭘까? 내가 그 상황을 더 잘 꿰뚫어보는 능력이 생겨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 할 수 있을까? 그도 아니면 사건 수습 현장의 헛점을 찾아내어 제보를 해서 잘잘못을 가려낼 날이 선 판단을 할 수 있는 걸까? 안타깝지만 그러한 능력은 전문가가 더 잘 하지 우리는 그저 영상 소비와 고자극에만 특화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처음 발 들여 놓는게 어렵지 빠져드는 건 한순간이라는 걸 실감한다. 고통에 무뎌진 채 식별이 어렵다면 그냥 안본눈으로 사는게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빠르게 바뀌는 시각적 효과보다 청각적인 앵커의 보도에서만 끝이 났을 때 더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걸 느꼈다. 구경거리 생겼다고 머리 들이민기 보단 그저 귀를 열고 있는 편을 택하고 싶어진다.



📖재해는 어떻게 문화가 되었는가_ 사실이확인되지 않은 수식을 붙이다가 유가족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어쩌면 연민을 끌어내기 위해 처참한 묘사와 더불어 '안타까운 사연'까지 동반해야만 비로소 산업재해 기사도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매체들은 지레 자포자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구를 위한 포장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만을 보도하되 약자의 편에서 서는 방식. 정보 전달을 하되 좀 더 극적인 요소를 통해 소비자가 빠른정보 흡수를 유도하는 방향. 그러한 방식을 위해 첨가되는 사항은 사실에 기반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기사가 아니라 소설을 씀으로써 모두가 불편한 상황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이건 자선행사를 하며 ARS 콜을 받으려 하는게 아니다. 정확한 정보 전달과 함께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점을 고발하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이를 쉬쉬하는 업주에 행태를 알리는데 중점을 둬야하는데 불쌍한 우리 소녀가장 좀 도와주세요 라는 식이 되어버리니 역시 언론이 언론 했다 싶어 혀를 차게 만든다. 사실만 던져 줘도 우리는 충분이 분노하고 현 실정을 바로잡길 원하고 있다. 이놈의 집구성이 이지경인걸 모르지 않는 국민이다. 이지경 되어버린 집구석 까발리는것에 통쾌한 것이지 누가 더 불쌍하게 사는지 불운 배틀이 아니니 매체에서는 스스로 소설가를 자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르고 산 세월도 아닌데 너무 우리를 과소평가 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한 거 같아 떫은 표정을 짓게된다.


이렇게 말하며 쓴소리를 보태고 있지만 나역시도 고통 방관자였다. 겪어 본 적이 없는 사건들이 대부분이었고, 설령 있었다 한들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 선에서 멈췄던 사건들 뿐이었다. 그러니 걱정은 되지만 코앞에 닥친 문제가 아니니 안타깝긴 한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딱 거기서 멈추게 됨을 느낀다. 그래서 다들 국민들도 공범이라며 기자와 언론, 그리고 알면서도 알기만하는 국민에 대한 질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론에 대한 고민은 이제 업계에서만 하는 고민이 아님을 느낀다. SNS가 활개 치고, 1인 미디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으니 생산과 소비의 범위가 광범위해짐을 자각하게된다. 정확한 인과관계도 모르면서 자신이 진짜 봤고 겪었던듯 퍼다 나르고 말에 살을 붙이고 몸집을 키우는 방식은 당신들이 그렇게 혀를 차며 말하는 기레기와 다를바가 없는데 직업 분류에 언론인과 국민으로 나누며 자신은 아니라는듯 손사래를 치는 걸 보게된다. 미디어가 가진 힘의 크기만 다르며, 시청하는 수치만 다를 뿐 똑같은 미디어 확성기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더더군다나 안되겠지만 고통을 구경하며 손가락질하는 사회로 몸집을 불리는데에 일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된다.

오늘도 다양한 SNS에 살고 있는 나와 당신들. 그래서 그 중 퍼다 나르고 외면하기 바쁜 시간. 또 사실인냥 착각하며 살고 있는 중 진실은 무엇인지, 실로 문제가 되고 있음에 주목하고 신경을 써야 하는건 또 무엇인지 알 긴 알고 보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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