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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계획한 독서 리스트가 있었으나 순서가 뒤바뀌게 되었다. 작년에 출간된 김금희 저자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챙겨보려고 염두해 두고 있었으나, 이번달에 출간된 '나의 폴라 일지'는 무심코 보게된 쇼츠영상의 인터뷰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이걸 먼저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최근에 방송된 토크쇼의 일부였는데 남극세종과학 기지의 37차 월동연구대 대원들의 이야기였다. 그 파트를 전체 다 보지 못했으나 1년만에 돌아온 대원들의 이야기와 나의 폴라 일지 책 표지는 어딘가 많이 닮아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대원들의 복장이나 책 표지의 사람의 옷차림과 배경. 알고리즘이 나에게 어서 김금희의 최근 에세이부터 읽어달라고 종용하는 기분이라는 점. 그리고 입춘이 오기 전 다시금 추워진 동장군의 기세까지. 모든 여건이 한 겨울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으니 나 또한 활자들의 세상이 알려주는 겨울의 꼭대기로 같이 올라가기로 했다.
작가 김금희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고뇌하고 사색하는 것,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을 적어낼거라 여겼던 작가의 에세이겠거니 싶지만 국내 소설가로 사상 최초로 남극 체류기를 담아 왔다. 어? 남극체류? 연구하는 연구자의 신분이 아니라 작가도 간다고? 라는 의문을 갖게하는 체류기. 저자는 작가가 되기 전부터 꿈꿔온 남극 기지 방문이라 책 소개를 하며 인터뷰에 응했다. 한겨레의 특별 취재기자의 자격을 부여받음으로써 극적으로 가능해졌다. 위촉 후 극지연구소에서 파견하는 하계 연구 대원이 받는 훈련에 준하는 생존과 안전 교육 과정을 여름 내내 수료한 뒤 2024년 2월 남극 땅을 밟았고 그간의 기록이다.
근 한 달 동안 직접 남극 세종 기지에 체류하며 그곳에서 서식하는 동식물들을 대면함은 물론 극지에서 행하는 연구와 이를 수행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을 취재하고 그 깨달음을 이 책에 남겨두었다. 한겨레의 기자 자격으로 간 만큼 10개월간 연재를 했고 이후 전면 개고를 거쳐 이 책으로 나온 것.
주권도 화폐도 국경도 없는 곳이자 세계의 끝. 그리고 인간이 상상 할 수 있는 지구의 가장 먼 곳이자 아스라히 여겨지는 얼음 땅. 연구자의 시선이 아니라 소설가의 시선으로 보는 기록은 아무도 표현 해 낸 적이 없었기에 더욱 기대 할 수 밖에 없는 글. 연구하고 사색하는 사람의 문장이 아니라 '사는 것'과 일상을 만들어 가는 것에 감정의 촉을 세워 적어둔 단어의 조합. 그래서 궁금했다. 문인의 시선에 담기는 남극은 같은 백색의 풍경이라도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고, 태어나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이라는 에필로그의 제목을 훑어보았을 때 꿈꾸던 걸 이뤘을 때 담뿍 얻어진 성취감의 표현은 어떨지 기대하게 만드는 초입이었다.

📖이상한 관찰자_ 눈으로는 망원경을 바라보았지만 머리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뭔가가 석연찮은지를. 그런 끝에 인정해야 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고 실수하고 잘못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뼈아픈 사실'이었다. 동시에 내가 여태까지 해온 패턴대로 남극 생활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경각심도 들었다.
인간이 주인행세를 하며 머무는 곳이 아닌 구역. 각자의 역할을 다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해야하고 그러한 상호작용에 익숙해져야 하는 환경. 하루의 일과를 묻고, 보고를 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야하는 체계가 잡혀인 공간. 저자는 적응해야했고, 맞춰가야 함을 터득한다. 예전과 똑같은 방식을 고수해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타인이 건네는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안부에 예민함 대신 그럴수도 있었고, 그걸 그제서야 알아차린 자신을 탓하긴 하지만 금새 적응해갔다. 진즉부터 자신의 터전인냥 살아온 물개나 해태, 펭귄들의 공간에 불쑥 발을 들이민것도 저자 본인이었고, 오랜 기간동안 이 남극기지에서 그들만의 룰을 만들어 공생하던 관계에 취재기자라는 역할로 비집고 들어온 것도 저자 본인이었다. 그러니 이상한 관찰자로 끝까지 겉돌아서는 안되는 조건이었다. 이상한 관찰자로 시작하였더라도 의가 상한 관찰자로 끝나서는 안됨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고래의 첫 숨_ 나는 남극에서 그냥 '나'로 머물러 있는 것이 좋았다. 동료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근처에 작가가 없어서 좋았고(?) 예민하게 일상을 대하지 않고 무던해지는 마음이 좋았다. 세밀하게 세공하던 일상을 아주 긁은 붓으로 쓱쓱 살아내는 기분이었다. 원고 작업보다는 내 발과 내 손과 내 눈으로 행하는 경험들이 우선이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공간이며, 가족의 반대가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내딛을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라 여긴 곳에서의 일상. 그러니까 저자는 새로운 글감을 위한 것과 문인으로서 보게되는 남극의 세상을 전달하는 목적인 동시에 숨통을 트이게 할 숨구멍 같은 세계가 남극으로 보였다. 피부로 와닿는 재촉이라던가 신경을 써가며 돌봐야 할 무언가에서 멀어진 곳. 오롯이 자신을 돌보는데에 집중하며, 그날그날 주어진 대원으로서의 임무만 완성하면 되는 그런 세상. 그래서인지 저자가 남극 기지에서 적은 글들에는 쥐어짜내며 고민한 흔적보다는 바로바로 와닿는 감정의 착실한 대답이 더 많다는 느낌을 준다. 대원들간의 관계라던가 날씨와 자연이 주는 현상에 대한 즉각적인 표현. 그래서 그런지 정말 근무 일지이면서, 아이들이 쓴 일기같은 느낌을 준다. 오늘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으며, 밖에서 누굴 만났고, 이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좋았다라던가 그래서 나는 오늘 반성을 하며 내일은 안 그래야지 라는 다짐을 해 보았다. 는 식의 일과 반성문 같은 뉘앙스.
저자가 취재의 목적으로 남극을 가지 않았더라면, 위험한 곳이라며 부모가 말리는 상황에서 순순히 수긍을 했더라면 이토록 담담하게 마음 터 놓을 순간이 몇번이나 되었을지를 생각하게했다. 항상 이야기를 지어내야하는 부담감이 늘 있을테니 말이다. 후반부에 저자가 했던 말이 있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라는 문장으로 그간 말하지 못했고 표현하기 주저했던 것들을 뱉어낼 대나무 밭이 필요했던건 아닐지. 그리고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 볼 수 있는 기회와 다른 공간에서도 살아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함은 아니었을지를 가늠해본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춰진 곳에서도 외로울 수 있고,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고, 모든게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도 뿌듯함을 느끼며 기쁨도 얻을 수 있다는 아주 상반된 삶을 살아 본 것 만으로도 다른 마음으로 살아도 된다는 확신을 준 느낌이 들었다.
에필로그를 통해 또 한번 저자는 다 갖춰진 곳에서도 힘들 수 있음을 바로 직시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버틸 재간을 마련해왔기에 그 남극의 여름을 떠올리며 견뎌내 주었다. 그 '잘한 일' 덕에 우리는 또 저자의 이야기를 얻어 들을 수 있겠지.
무언가가 가로막혀 있을 즈음. 나는 잘 걷고 있다 싶었는데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고 주위만 뱅뱅 돈다 느껴질 즈음. 저자가 했던 것 만큼의 극단적인 곳에서 다른 마음을 찾을 순 없겠지만 각자가 잘했다며 스스로 궁디 톡톡 쳐 줄 만한 '잘한 일'의 숨구멍을 찾길 바란다. 그리고 나도 그러길 바란다.
📖하니포터 10기로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