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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조금 망한 사랑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평점 :
요즘 흔하게 말하는 '망했다!'는 말. 그걸 책 제목에서 들어 보다니.각각의 이야기들을 듣는 입장으로 마주한다면 이거가지고 망했다고? 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때의 상황은, 그리고 그때의 내 마음은 완벽하고 견고하길 바랬던 순간이었는데 하나 둘씩 어그러졌으니 망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태라는 점을 각각의 단편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이 별거 아닌거 같다 느낀다 한들 내가 망했다면 그건 망한거라고 단정짓고 싶으며 더이상 수습하며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기마저 싫어지는 망한 사랑의 조각들이다. 그래서 차곡차곡 쌓아온 내 마음이 부정당하는거 같아 성질나게 만들고 왜 나한테 이러나 싶을 정도로 누구 하날 잡아두고 원망하고 싶어지는 짠한 속사정의 이야기였다.
📖포기_ 돈이 제일인 세상에서 그거만큼 확실한 안부 인사가 어딨어.
포기하는 것에 익숙한 인물의 이야기들. 연인사이였던 민재와 나. 사촌관계인 나와 호두. 그 둘은 나로 인해 친구가 되고, 호두는 민재에게 이천만원을 빌려주었고, 이 놈은 돈을 들고 잠적해버린다. 애매한 관계다. 이미 나와 민재는 헤어진 후고, 내가 중간에서 다리가 되지 않았다면 이들은 친구가 되지도, 돈으로 엮이지도 않을 사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서로에게 빚진것도 없고, 나쁘게 헤어지진 않았으나 나의 주변인물에게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 이게 참 애매한 것이 호두는 또 민재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으니 대놓고 신고하거나 엄포를 놓지도 않는다. 끊어내고 싶지 않은 관계이지만 돈은 받아야하는데, 둘 중 어느 방식으로도 단호함을 보여주지 않는 호두. 이 사람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클지, 이 사람에게 빌려준 이천만원이 클지는 호두만이 알고 있겠지.
📖반려빚_ 정현은 자신의 몫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행운을 그런 데 쏟아붓고 싶지 않았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아낌없이 다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런 값을 따지지 않고 셈하지 않고. 상대 또한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정현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셈하고 값을 따져보고 있었다.
반려자도 아니고 반려견도 아닌것이, 하다못해 반려식물도 아니고, 반려빚이다. 하긴, 나도 반려자랑 살고 있지만 반려빚이랑도 진득하게 살고있지. 정현과 서일이 헤어진 이유가 비단 돈 때문은 아니겠지만 돈도 일정 몫을 하긴 했다. 돈 때문에 같이 살았었고, 돈으로라도 상대의 근심을 해결해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주고 싶었던 삶의 고비였을 것이다. 모든게 끊어지는 사이가 되더라도 채무관계가 끝까지 물고 늘어져 좋았던 기억은 고이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헌데 진절머리나는 순간으로 만들어버렸다. 반려빚 이놈이 한몫했다. 빚이 또 그들을 만나게 했으며, 모든 연의 끊을 끊어내는 것에도 돈이라는 것이 제 몫을 톡톡히 해버렸다. 이 모든 관계를 둘러싼 것에 사랑 너머의 돈이 존재함을 알려줬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세상이고,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지켜내는 과정에서도 돈이 든다. 그래서 반려자보다 반려빚이 내 안에 머무는 기한이 늘어남에 설령 존재가 소멸된다 하더라도 후련함보다는 존재의 일부가 소실된 것 처럼 허무해진다. 있었다가 없어지면 그 틈을 메운 행복이 아귀가 맞아 떨어져야하는데, 또 다른 빚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그건 정현과 서일만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반려빚을 키워본 사이라면 느끼는 감정이라 단언 할 수 있다. 사랑을 지켜내는 것에는 굳은 마음보단 굳건한 돈이 있어야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_ 모든 것이 완전히 끝일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한 건 오늘 그들을 생각하는 일은 그만둘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에 다시 또 생각난다면 그땐 그냥 내버려둘 것이다.
죽고 못살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살던 사이. 뱃속에 아이가 생겨 하게된 결혼, 갓난쟁이를 보듬던 즈음 남편이 바람이 났고, 이혼을 부탁했다. 남편도, 아이도 모두 두고 나온 안지. 그렇게 별개의 삶으로 과거의 기억으로 10년을 보낸거 같은데 그렇게 지들끼리 좋아 죽고 살며 연락하지 않기로한 전남편의 여자에게서 연락이 온다. 남편이 죽었고, 남편의 사망보험금이 안지로 되어있음을 알린다. 사망보험금을 전부 달라는게 아니라 아이의 양육비 만이라도 달라는 이유로 만나게 된다. 그냥 평범하니, 평균적으로 살고파 어른들이 으레 말하는 방식으로 학교 졸업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또래 나이에 많는 수순으로 살고싶었지만 어그러진 삶으로 결국 평범하지 못한 생을 살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자신을 사랑해주고, 반려묘와 함께 살며 함께 밥을먹고 차를 나눠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길 나눌 수 있는 남자와 재혼해 살고 있는 안지의 덜 굴곡진 생에 아이를 다시 데려오는게 맞을까, 아니면 양육비로 끝내며 다시 모르던 각자의 삶으로 사는게 맞을까.
좋아하는 마음 없이 사는 것과 좋아하는 마음 으로 사는 것에 대한 다른 삶의 방식. 안지가 버텨낸 삶의 방식을 보면 남들 다하는 수순보다 다 때가 있고, 알아서 살아가게 내버려두면 제 짝 찾고, 제 갈길 간다는걸 실감케 하는 이야기였다.
내 20대를 돌아보면 다들 안지와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생각에는 '평범하게'라며 내 삶이 튀거나 유난스럽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난스럽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낳고 그리 살며 아이가 자란 후 행복하고 평온한 노후를 맞이하며 다시 둘이서 손잡고 산책하고 여행하는 삶을 기대한다. 거기서 좋아하는 마음의 빈도와 강도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것에만 집중했지 뜨겁게 불타오르는 지속성을 기대해 본 적은 없는 듯 하다. 그러니 좋아하는 마음 없이 사는 것에 예민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살고있는 부모의 세대를 보며 무신경했는지도 모르겠다. 살아보니까, 그러한 과정을 하나씩 겪어내어가며 나도 안지의 나이 언저리가 되어보니 알겠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 살면 내 삶이 사랑스럽지 못하다는 것. 뭐 하나라도 좋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버틸 재간이 있지 살 부비고 지낼 가장 가까운 이와 이런 마음을 나누지 못한다면 참으로 노잼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지가 남편도 갓난쟁이도 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것, 한쪽 이야기만 들으면 무지 이기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만 차갑게 굳어버린 마음을 붙들고 유령처럼 살지 않은 것에는 참 잘한 일이라 말해주고 싶다. 삶은 그리 길지 않다. 좋아하는 마음 넘치게 담고 살자, 제발.
📖정확한 비밀_ 어떤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는 않은가 하고. '너에게는 비밀이 있다. 너는 아직 모르는...'
비밀이라는 것이 진짜 있긴 할까. 하나같이 비밀이라고 말하며 소근거리게 되지만 그렇게 당사자의 입밖으로 뱉어지는 순간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된다. 너만 알고 있으라는 둥, 너한테 가장 먼저 말한다는 둥, 너니까 말한다는 둥. 시작은 너였지만 차라리 너로 인해 퍼져나가는게 오히려 덜 피곤해 질 거 같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우리 사이에 생긴 첫번째 비밀은 누군가에게 닿아 가십거리가 되고, 어떤 자리에서는 적막을 깨기 좋은 남의 사소한 허물이 되기도 한다. 사랑을 하는 사이든 오래 유지하고픈 관계의 조합이든, 잠깐 스칠 찰나의 인물이든 얼굴을 마주해야하고 대화를 끌어내어야 하는 장소라면 정확한 비밀은 없다. 정확한 소문의 시작만 있을 뿐.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 사람이 소중하다면 내 선에서 마침표가 끝나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입이 근질거린다 한들, 지금 마주한 사람과 있는 자리와 공기가 어색하다고 그걸 나서서 끄집어내지 않았으면 한다. 이 이야기가 정확하든 뜬 소문이든, 좋아하는 마음이 이전보다 덜해서 내 안에 가벼워진 등장인물이라 하더라도 제발 자제하라고 방방 떠있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고싶다. 그걸 말 하는 순간 당신도 참으로 가벼운 사람이 되며, 정확한 소문의 시작점이 되어버리는 순간이라고. 그러니 너는 아직 모르는 그거 말고, 너만 알고 끝내는 그걸로 해주길 바란다. 적어도 사랑이었다면 말이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_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때론 숙모와 문재 오빠에게 미안해졌다. 달고 따뜻한 걸 우리만 계속 먹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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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지극히 행복할 때 느닷없이 슬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지만.
수능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 삼촌과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고 유자차를 만드는 나날의 이야기. 삼촌과 조카의 소소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겨울의 찬 공기마냥 마음은 가라앉아 서리낀 마음처럼 뿌옇다. 별거 아닌 일상의 조각 같아도 삼촌은 여전히 죽은 숙모를 그리워한다. 짧게 사랑했고 짧게 기억한다 할 지라도, 그 사람이 있었던 흔적과 순간은 머그잔에 찰랑이는 유자차 마냥 한없이 달콤하고 새콤해서 어찌 잊겠나 싶은 이야기. 이 관계가 진득했으면 삼촌의 삶은 직접 담근 유자청처럼 달고 따뜻했을까를 생각해보며 이토록 급하게 마침표를 찍은 사랑의 끝은 누굴 탓해야 하나 싶어지는 겨울이었다. 한 때는 외숙모가 얄밉기도 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문재 오빠의 엄마라는 사실이 믿기 싫을 지경이었지만, 이제는 휴대폰에 남아있는 숙모의 사진과 짧막한 영상에 한없이 웃다 우는 삼촌을 보면서 왜 그리 급하게 가버렸나 싶어 또 다른 방식으로 얄밉고 야속해진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될 끝사랑의 남겨진 모습이 내 앞에 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을 만큼 시고 달고 씁고를 반복하는 유자차를 닮아서 이 겨울이 삼촌의 마음속 처럼 춥다.
조금 망한 사랑의 조각들. 헌데 망한거라 생각하면 짜증만 날 법 한데 혀 끝에 닿여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쓰다. 평범함을 바란 삶에 불운이 함께 스며있다. 많이 행복하면 많은 불운이 황급히 다가온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함부로 입밖으로 내뱉어선 안되는 건가보다. 특히 마지막 단편이 그러했다. 의도하지 않은 시점에서 다가온 사랑의 마침표. 그래서 일까? 조금 망한 사랑이라 단정하고픈 한계점을 넘어버렸다.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닌데 괜스레 애먼 사람을 원망하고싶어지는 사랑의 끄트머리였다. 사랑은 가이드라인이라 할만한 정확한 시작과 끝이 없더라. 그렇다보니 욕심을 내어가며 내가 원하는 방향까지 단숨에 마음을 내밀어 예쁜 하트를 만들 순 없나보다. 욕심 낸 만큼 흠이 많아져 여기저기 조금씩 망한 구석을 갖고 있나보다.
반려빚이 있다 해도 괜찮을 때가 있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 살다가도 진짜 좋아하는 마음이 차고 넘치는 사람으로 새로운 시작할 수 있는 그 마음 마저도 괜찮을 때가 있다. 정확한 비밀은 내가 시작이고 끝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괜찮을 거라며 여기는 때도 있다. 머그잔을 일부러 나란히 붙여두며 함께 유자차를 마시고 달고 쓴 맛을 같이 느낄 수 있는 덜 완벽하더라도 덜 망한 사랑으로 살고싶어진다. 완벽은 없을게 빤하니 덜 망한 사랑이면 나로서는 만족 할 만한 사랑의 방식이다. 그러니 제발 내 입에서 망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길 바라며 오늘의 내 사랑이 무사하길 바라고 또 바라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