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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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잠들지 못했던 날.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보는것도 지겹게 느껴지던 밤이라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며 몇시인지 들춰보던 시간. 인스타그램에 서미란PD님이 라이브 한다는 알림이 떠서 오랫만에 마주한 목소리였다. 푸른밤이 끝난 후로 딱히 라디오에 애정을 못 쏟던 날들. 별밤이 내 취향이 아니기도 했고, 긴 시간동안 푸른밤의 팬이었고, 서미란PD님의 이야기를 좋아했던 터라 반갑게 들었던 목소리였고 책 이야기 였던건지도 모르겠다. 사담이 컸던 라이브였지만 소소한 인원 덕에 좀 더 가까이 이야기하는 느낌도 있었고, 매번 추천해주시는 책이 좋았기에 꼭 읽어봐야지 라며 캡춰해두었던 라이브방송의 배경 화면. 문학은 좋아하지만 다른 나라의 저자의 글은 가까이하지 않았던 날들이다. 독서 편식도 심하고, 타국 저자들의 세계관이든 글의 결이든 뭔가 내 정서에 맞지 않다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글은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고, 시리즈처럼 여겨지는 책이지만 순서를 정하지 않고 읽어도 될 이야기라고 했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를 보면 저자의 글에는 늘 관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전했다.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와 다층적이고 모순적이기도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에 탁월함을 보이는데 이 책은 과거를 회상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여성 소설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인칭 화자로서 한 인간을 에워싸고있는 인생의 의미와 함께 주변인들로부터 이뤄지는 존재성, 정체성에 대한 견해를 가장 명확한 자기 예시를 통해 알려주고있음을 볼 수 있었다.




📖 엄마가 이곳에 와서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애칭으로 나를 부르자 내 몸이 따뜻해지면서 액체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가 느끼는 모든 긴장감이 예정에는 고체였는데 이제는 아닌 것처럼. 대체로 나는 한밤중에 깨어 자다 깨다를 반복하거나, 유리창 밖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엄마가 어제 앉아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괜찮아."

엄마라는 존재가 애틋함을 주는 무언가가 있긴 하지만, 그녀에겐 더욱 의아한 등장이었다. 오랜시간동안 왕래가 없었기도 했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상호작용이라는 느낌보단 애정을 갈구하는 과거회상이 더 많았기에 애칭으로 불러주는 한 마디와 편히 잘 자도록 진득히 바라봐주며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있어주는 그 존재가 주는 안정감이 남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어린시절 그토록 바라던 거였는데 뜻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마주했으며,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나이든 자식에게 하는 애틋한 애칭이라니.

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둘째를 임신하고 남편과 말다툼을 했던 날. 엄마와 아빠가 보고싶었고 문득 어린시절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며 그 모든게 사무치도록 그리워 부모님 집에 전화를 걸었고, 교환원이 엄마에게 했던 말과 돌아오는 대답에 한없이 무너지던 순간이 있었다.

루시 바턴이 통화를 원하는데 요금을 지불하겠느냐는 물음에 엄마는 "아니요. 이제는 그애한테도 요금을 지불할 만한 돈이 있을 테니 직접 내라고 전해주세요." 라는 말을 교환원을 통해 전해듣는 순간. 나는 온전한 사랑을 전했고 그 온전한 마음이 닿아서 자신도 그렇게 귀하고 애틋하게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텐데 막혀버린 벽에 대고 외사랑을 하고있는 모습처럼 느껴져 이 사람의 어린시절은 얼마나 더 시렸고 아렸을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크리시가 지금의 남편에 대해 말하며 아이가 받았을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겪어낸 아픔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가 겪어내고 있을 아픔의 고리. 자신도 어린시절 기억에 붙들려 살고 있었고, 아이또한 붙잡고 어찌 하지 못하며 살아갈 기억의 꺼풀에 대해 많은 생각과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 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아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 기억의 조각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으며 미화되어 자신의 착각했던거라며 예쁘게 포장 할 수도 없다. 루시는 반복해서 자신의 기억과 진술이 사실이 아닐수도 있음을 밝히지만 불안전한 기억과 타인에게 받았던 감정은 그렇게 오랫동안 잔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꾸준히 기억하고 꾸준히 곱씹었으니 그 기억에 살점이 붙고 일정 부분은 흐릿해지겠지만 그 때의 자신이 겪어낸 감정은 지울 수 없는거니까. 그게 좀먹고 흐릿해진다 한들 없어지는건 아니니까.





📖 책이 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학교에서 받는 대우를 부모에게 편히 말 할 수없던 시절. 그리고 아이들과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던 상황. 춥고 아무것도 없는 집에 있을 바에 학교에 머물며 지내는게 오히려 더 편했던 과거까지. 공부를 하고싶은 마음보다는 따뜻한 교실이 주는 안정감이 좋아서 공부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면 외로움과 서글픔은 그녀를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으리라 보였다. 외로움을 채우는 데엔 책이 한몫했던 자신의 시절을 떠올리면 분명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연민에서 오는 목표로 보였다.




📖 내가 무엇보다 원한 건 엄마의 목소리 그 자체였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목소리 자체에 귀를 기울였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엄마라는 존재가 주는 안정감은 확실하게 보장된 요소일지도 모른다. 각각의 사정이야 어떻든 보편화된 존재의 의미가 그러하다는 뜻이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어느 하나가 삐쳐서 안본다고 가시돋힌 말을 하더라도 다른 한쪽은 애절하고 애틋함이 있다. 그게 특히나 엄마와 딸 사이라면 더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공감한다. 미사여구를 다 떼어놓고 보아도 단어 그거 하나. '엄마'라는 말에는 큰 눈물버튼이 있거든. 그러니 그녀 역시 대단한 사랑과 따스한 마음을 원없이 얻지 못했던 시절이 있더라도 그냥, 그러니까 진짜 그냥 엄마라는 존재로서의 곁에 있는 그 기운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또 외사랑이지 모.





📖 누군가가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 망신거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 생각에, 많은 순간에 그런 사람이 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있는 그 기간동안 엄마가 곁에 있었던 잠깐을 담아두었지만 이야기는 과거 회상을 하며 어린시절 겪어낸 순간과 현실 속 나이든 자신의 지금 감정을 교차하며 담아두었다. 이건 병원에서 상담치료를 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며, 스스로에게 그럼에도 잘 자랐고 지금은 괜찮지? 라는 식으로 다독이는 기분을 받게된다. '그때의 나는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이 이야길 듣는 당신도 그렇다고 해주겠죠?'의 공감을 기다리는 뉘앙스도 받았으며, 그 판단은 여전히 유효한데 엄마가 갖고 있던 그 기억도 같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으로 계속 엄마의 반응을 살피게된다.

침상 옆에 있는 엄마와 이야길하며 나눈 주제들은 대단한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

는 시시콜콜한 잡담같은 것. 몇년만에 엄마를 마주한게 아니라 지난주까지 있다가 며칠 쉬고 다시 병원에서 간병하러 와준 제일 가깝고 제일 편한 사람처럼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길 한다. 이 모습만을 볼때 그녀가 이야기했던 과거사가 허상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니 서로가 느끼는 시간의 간극은 정말 다름을 느끼게한다. 엄마만의 방식, 딸 만의 생각만 있는 것이지 서로에게 강요하고 맞춰주길 바라면 안되는 정말 다른 성향의 존재라는걸 인식하게 만든다.




📖 이번에는 내가 시카고에 있는 병원에 가서 엄마의 침대 발치에 앉게 되었다. 나는 엄마가 내게 준 것을 엄마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내 곁을 지킨 그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주의깊게 돌봐준 엄마의 그 한결같음을 돌려주고 싶었다.

역시나 내맘과 네맘이 나란하지 않구나를 느끼는 문장. '나는 엄마가 왔었던 그 순간이 별거 아닌거 같아도 좋았는데, 엄만 아닌가봐?' 라는 까칠하고 싸늘한 속마음을 대놓고 드러내고 싶어지는 부분이다. 당신의 사랑을 바라지 않았지만 당신의 존재가 그리웠고,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다면 기꺼이 모든걸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지만 상대는 선을 그어두고 넘어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라면 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거라 했던 말처럼 자식이라면 엄마를 지켜야하는 건데 왜 이들의 상호작용은 늘 어긋날까?

모든걸 나란히 둘 수 없는 관계성이다. 엄마와 루시만의 관계가 가장 컸지만 자라오면서 느낀 환경에 대한 다름도 관계성의 일정 부분을 차지했다. 빈부의 차로 인해 느껴지는 가난과 멸시. 약자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학대의 기억까지. 좀 더 세련되지 못함에서 오는 시선과 출신지에 대한 자부심의 정도. 이웃의 불행이나 주변인들에 대한 서슴없는 혐오. 이건 가십거리이며 대화를 이어가기 좋은 심심풀이 껌과도 같은 비교였다. 루시는 그게 싫었지만 결국 그녀도 별반 다를바 없이 그러한 심기를 내비치며 동요하길 바란다. 결국 삶이란 드라마틱하거나 디즈니 만화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길 바라며 비비디 바비디부 노래 부를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미련도 있고 아쉬움도 있으나 뭐 어쩌겠어 삶은 계속 되는 걸. 이게 결국 내 이야기 이고, 이 모든게 루시 바턴의 삶인걸 그냥 받아들여야지 모. 라는 식으로 그렇게 흘려보낼 수 있다는게 신기할 뿐이다. 서럽고 화나고 마음아프고 울컥하기도 한데 그럴수도 있지 라는 식의 반응에 이게 된다고? 라는 말만 반복하게된다.

내 성깔은 그러지 못하는데 이게 되는 루시 바턴이라니. 와... 나는 안될거 같아. 나는 글러먹었어. 이게 안되는 성질머리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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