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안보윤 외 지음, 이혜연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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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를 테마로 한 소설이다. 아동, 장애인, 노인 등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지금이야 원한다면 무엇을 못할까 싶은 청년기의 끄트머리에 있는 성인이지만 이 사회적 분류가 언제까지 지속되지 않음을 알고있다.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가질 수도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인의 수순으로 흘러 갈 수 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된다. 천년만년 이 상태로 유지 될 수 없다면 언젠가 나도 겪게 될 사회적 약자의 삶을 들여다보며 가시를 세우고 살았던 적은 없는지. 악의를 갖고 살며 누군가의 심장을 죄의식 없이 찔러댄건 아닌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완독 후 이대로 살아도 될 것인가를 두고 단답형 없는 자기대답을 바라게된다.



밤은 내가 가질게_ 본인의 이름보다 '나무야'라고 더 많이 불리워지는 나무반 담임선생님. 원아 중 한명은 학대를 받는 듯 하다. 유심히 살펴야하는 원생이 있는 교사는 애기 선생님이라하는 보조 교사도 돌보듯 가르쳐야하는 입장. 마냥 한 아이만 케어 할 수 없는 환경. 직장에서는 아이들을 돌봐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구멍이 많고 손이 많이 가는 언니를 케어하듯 곁에서 수습을 해야하는 입장. 모친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가족이니 당연히 감내해야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강아지 봉사활동을 가는 언니. 많은 개 중 나이많고 사랑을 덜 받는 개가 눈에 밟혀 데리고오고파하는 사람. 개를 케어하는 언니를 케어해야만하는 입장. 누가 누굴 돌봐야하는지, 왜 계속 자신은 돌봄의 주체가 되어야하는지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침마다 아이의 몸을 수색하듯 살피며 학대의 흔적이 없는지를 봐야하는 입장. 연고없는 아이의 법적 엄마와 떼어놓는게 맞는지를 시스템에 맞춰 복지국으로 인계하며 다음 일은 모른척 하며 제 소임의 선을 긋는게 맞는지를 따지지만 119에 바로 신고를 하게되고, 또 언니와 언니에게 딸려있는 늙은 개를 케어하는 일을 또 순순히 받아들인다. 결국 내가 해야하는 일이었고, 내가 떠앉는게 맞다고 생각하게되는 여린 존재들이다.

📖밤은 내가 가질게_ 다른 사람을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어떻게 그렇게까지 부지런해질 수 있었을까.

생각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더라. 굳이 자신의 수고로움을 더해서 남에게 흠집을 내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 그 정성이라면 다른 선택을 할 텐데 굳이 그리 애를 써가며 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보다 괴롭힘을 즐기며 자신이 우위에 있는양 즐기는 태세를 갖춘 이는 상상 이상으로 많다.




고요한밤, 거룩한밤_ 아내는 주워온 개만 남겨 둔 채 생을 마쳤다. 유독 추운 겨울의 어떤 날. 보일러는 고장이났고, 가스는 새고있어 수리가 필요했다. 당장 먹을 쌀도 없고 밖이나 집안이나 별반 다를게 없는 한기가 가득한 냉골에 그와 개만 남겨졌다. 파지 줍는 일을 하지만 종일 해도 손에 쥐어지는건 만원 한장도 안되는 금액. 그마저도 없는 날이 더 많아 동사무소에 국가 지원 요청을 하러 갔으나 자식이 있다며 법으로 어찌 안된다고 한다. 자식놈이라 해봐야 아들 하나가 있지만 저놈은 지 아비를 쏙 빼닮아버렸다. 컹컹컹 거리는 것이 전 주인에게 목소리를 뺏겨서 제대로 울음도 한번 못 내는 것이 아내를 닮았다. 개를 주워와 깨끗이 씻겨 한 이불을 덮던 아내. 추운날 밖에 내어두기도 어려우니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포옥 안고 있는 것이 어째 남은 여생은 그와 한이불 덮기보단 개를 택한 듯 하다. 말도 못하고 울음도 내지 못하는 것이 꼭 자신을 닮아 더 애틋하게 보듬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내와 개가 서로를 보듬던 시절이 계속 떠오르는 그. 아내도 없고, 집안의 온기도 없다. 50년만의 한파라 하더니 아내 없는 겨울은 매년 더 시려운 듯 하다. 금니라도 팔아야 할까. 금니 하나면 쌀 한포정도는 사겠지. 금니를 떠올리니 또 아내생각이 난다. 이 밤 한방을 쓰는 개를 보니 아내 생각이 나고, 입안에 맨질거리는 금니를 핥아도 아내 생각이난다. 춥고, 그립고, 또 후회되고, 이런 순간이 화나고 모든게 교차하는 고요한밤이자 거룩한밤이며 화나도록 그리운 밤이다.


📖고요한밤, 거룩한밤_ 그는 죽은 아내의 육신에 떠돌던 온기가 다 그리웠다. 마치 물위에서 기름이 겉돌듯, 생명이 다한 아내의 육신에서 겉돌면서 서서히 잦아들던 그 온기... 자신을 소스라치게 했던 그 온기만... 그 온기만 있어도 그는 오늘 밤을 무사히 얼어 죽지 않고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권위적이었지만 가부장적이었지만 그땐 정말 왕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두가 떠났다. 집안에서만 왕이었지 집밖에선 폐지를 줍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큰소리 치면 다 받아주던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동사무소에서의 외침은 허공을 향하듯 아무도 받아주며 달래주는 이가 없다. 그의 밤은 더이상 거룩하지 않다. 좀 더 다정했더라면, 좀 더 나긋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그는 이래도 저래도 다 받아두전 아내가 그리울 뿐이다.




백은학원연합회 회장 경화_ 이 건물 전체가 학원으로 들어 차 있다. 학교가 내실 있다는 말보다 학원 때문에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경화는 이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자신의 아들도 가르쳤으며 동네 아이들의 기본기를 다져줬고, 아들을 우수한 성적으로 키워냈다. 이렇게 학원을 키워나가는데에만 집중 할 수 있었던 건 경화와 아들을 서포트해준 친정엄마의 노력과 결과물로 내비쳐지는 아들의 성적 덕도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경화는 엄마와 아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돈을 벌어야하는 장사치이기도 하다. 이름난 학원빌딩 옆 허름한 건물이 치매센터로 새로 들어선다는 것. 혐오시설은 아니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반가울 수 없다. 구급차량이 수시로 드나들 것이며 아이들의 집중도를 저해한다는 생각을 하면 학원장의 입장으론 달갑지 않다. 반대를 하는 학원 대표가 되는게 맞지만 경화와 손주케어를 담당하던 엄마가 치매의 징조가 보인다. 경화에겐 딛고 서 있는 위치보다 처해진 상황이 그녀를 움직였다. 더이상 반대 할 이유가 없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엄마를 케어 할 수 있다면 남들에겐 혐오시설이라 하더라도 경화는 찬성을 던져야했다. 처해진 상황이 그녀를 바꿔놓았다. 누굴 탓하리. 그렇게 된 것을.

📖백은학원연합회 회장 경화_ 카메라가 있고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제 처지가 달라졌어요. 그때도 지금도 저는 아무 생각이 없고 이런 제가 한심하고 답답하고 부끄러워요. 부끄럽다고요. 이제 와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도 부끄러워요.

언제부턴가 이러한 시설이 혐오로 묶여졌을까. 10년 전의 그곳과 지금의 그곳의 달라진 점으로 나오는 사진들이 있다. 과거에는 결혼식장이 지금은 장례식장으로 바뀌었고, 과거 유치원은 현재의 노인 돌봄센터로 바뀐 곳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경화는 처한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약은 구석이 여실히 드러나 얄밉다 할 지라도 어느 누가 그 상황이 되어도 꼿꼿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혐오의 정도는 어디까지라고 봐야 할까. 과거의 혐오와 지금의 혐오 범위도 달라졌고 사회가 생각하는 폭도 달라졌다. 당신은 어디까지를 혐오라 선을 그을 수 있을까.

이기적이라 한들 우린 그러한 상황에 놓이면 다들 똑같은 입장 전환을 할 텐데 무조건적인 반대를 고수 할 수 있을까를 계속 묻게된다.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 할 수 없다. 제 뱃속으로 낳은 자식의 속도 알 길이 없다는데 평생을 자기 잣대로 살아온 타인을 어찌 이해하랴. 다만 그 상황에 나를 대입해보며 그 순간의 나라면 어찌 할 것인지,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보며 버티고 살아갈지를 궁리해보는 과정이 덤으로 얻어졌다 출판사에는 이 책이 출간된 계기를 이렇게 적어두고있다.

지난 3년 간의 코로나-19 상황은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사회적 약자들이 얼마나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 드러냈다. 이들을 향해 평소라면 쉽게 드러내지 못했을 혐오의 말들도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회적 약자가 살아가는 모습은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데,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 곳곳에서 불길한 징후가 감지된다. 위기의 시대에 연결과 연대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공존’만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세상을 만드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좀 더 부각이 되긴 했지만 이전의 삶에서도 혐오와 외면과 멸시는 늘 존재했다. 하지만 더이상의 혐오 과잉은 불필요한 과한 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나오는 '밤은 내가 가질게'의 단편만 봐도 그러하다. 나무반 교사를 골탕먹이고자 굳이 시간을 내고 정성까지 들여 괴롭히는 그 감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에너지인가를 생각해본다. 나와 의견이 다르고 성향이 다름을 인정하기보단 다른 방향으로 걷는 이를 두고 볼 수 없다는 듯한 행동을 보면 혐오를 벗어난 감정과잉이 기반된 오지랖도 이 축에 속하겠다. 밀착된 관계에서 살짝 물러나도 될텐데 굳이 내 삶속에 투입시키지 않아도 될 인물까지 등장시키는 과한 자기영역 확장성.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사상과 오롯이 내가 말하는 것이 제일 명확한 해답이라는 생각부터 버렸으면 좋겠다.

연민하는 마음과 보듬어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좋다. 따숩다. 하지만 모든걸 포용하라는 과한 기대를 바라진 않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 놓였으니 나보단 그대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를 묻는 결말이 아니면 좋겠다. 한쪽만의 희생을 바라는 것? 그게 진짜 공존하는 세상이고, 공존하는 소설이 바라는 이상향인지를 생각하게된다.(결국은 답을 못 맺음)

📖미디어창비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기록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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