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법한 모든 것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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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낸 이야기가 열거하는 단어는 많고, 마침표를 찍어낸 문장은 단숨에 읽기엔 버거울 정도로 길고 세밀히다. 뭐랄까,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숨참기 시합을 하기위해 얼굴만 물속으로 들이밀어 눈을 뜬 그 순간 내 모습이 이 단편들을 들여다보는 시야와 일치한다. 쫀쫀하게 짜여진 문장들의 세상에 나는 천장에서 얼굴만 쑤욱 쑤셔넣고 둘러보는 느낌이다. 덕분에 모든 사건들이 내 눈에 다 들어온다. 그래서 아쉽다. 단편이라 더 궁금해진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모르던 이들의 평범했던 이전의 시간도 궁금하고, 여기서 멈추기보단 진짜 끝을 보고싶은 다음의 수순이 기대가되는데 입에 착착 감기는 타이밍에 끝이 난다.아쉬움에 쩝쩝거리며 또 언제즈음 새로운 이야길 툭 하고 던져줄지 기다려보게된다.




📖 니니코라치우푼타_ 할머니와 엄마가 막연히 짐작했던 미래에는 포함되지 않았을 게 분명한 장면들. 우리에게 실제로 닥쳐온 미래는 재해와 기근과 신종 바이러스의 주기적 출몰이 고착화된 세계에서의 각자도생과, 인류가 더 이상 인류를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그 진행에 가속도가 붙은 초고령사회 정도였다.

입밖으로 내기도 어려운 단어 니니코라치우푼타.어머니는 기억을 하나씩 잃어가지만 사라진 틈 사이로 딸에 대한 기억을 나름의 방식으로 메꿔놓는다. 옛날에 만난 적 있다는 그 '니니코라치우푼타'를 만나고 싶다고 채근하는 어머니. 치매의 노모이니 의식의 여부와 상관없는 생떼라고 여겨도 무방하겠지만 특수분장을하며 사는 딸은 그 말을 허투루 흘릴 수 없다. 그렇게 보고싶다고 채근하는데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어찌어찌 짜 보면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할 수 있는 한, 내 능력 안에서 최대한의 도리 정도. 이렇게라도 해야 나중에 내가 덜 미안하겠지 싶은 자기 방어라 봐도 되겠지만 내 어머니도 할머니가 되었구나 싶고, 당신과 내가 함께 기억하는 것들이 빨리 소진되어가는 듯 해서 더 애쓴건지도 모르겠단 씁쓸한 마음이 든다.



📖노커_ 어차피 가정폭력으로 점철된 불우한 유년기라든지 가난이나 질병 등의 개인사를 전시해주고 사회복지 체제의 그늘에 가려져 충분히 보호받지 못했다며 동정심을 실컷 유발한 다음 헤드라인은 '묻지 마 폭행'정도로 내보낼 테니까.

출판사에선 저자의 책이 5년만의 신작으로 어쩌면 우리가 한 번쯤 상상해보았던, 혹은 상상도 못했던 모든 이야기를 담았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의 사건 사고들을 볼 때 엠바고 상태로 함구하고있다가 딱 시기에 맞춰서 출간 한게 아닐까 싶은 의혹이 들 정도로 닮아있음에 놀랍고 무서워진다. 어깨빵을 당한 딸이 가격한 자를 쫒아가는건 특별날게 없는 행동인데 이러한 행위로 인해 그의 얼굴을 본 후 주저앉게되고 울음이 터지고 실어증으로 말을 잃어버린다. 인지하던 언어의 기억을 소실하여 무얼 본건지 알아낼 재간이없다. 인간인지 인간이아닌지도 모를 미지의 존재는 이 단편이 끝날때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불특정다수를 겨냥한 행위. 이건 최근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향한 살인예고와 마구자비 폭행과 닮아있다. 정서적불안, 질병, 가정환경, 교육조건을 들먹이며 그럴 수 밖에 없는 조건이었다며 그렇기에 '묻지마 폭행'으로 치부 할 수 밖에 없다 하기에는 그들의 모든 행동에 악이 가득 차 있어 더욱 화가난다. 앞서 말한 조건에 의해 악이 될 수 밖에 없다고 탓하기엔 너무 관대한 대응이다.



📖노커_ 그런데 말이 언제 소통의 도구이긴 했던가? 우리는 평생 서로룰 이해할 수 없으며 말은 이해보다는 오히려 오해의 도구가 아니었나? 아무에게 돌을 던지거나 아무의 목을 매달아 까마귀밥으로 걸어놓는 무기의 일종이며, 특히 현란한 말이야말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입속의 혀처럼 부리다 그 가치와 흥미를 상실했다고 판단하는 즉시 도륙내기를 일삼던 독재자들의 필수 재능 아닌가?

소통의 도구로 큰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옆으로 기생한 말의 혹덩어리는 타인을 긁어내기에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도구였고 쉬우면서도 간편한 무기가 되었다. 일면식은 없으나 그저 내키는대로 내 눈 앞에 있다고 저격당함에 마땅함으로 맞춰지기엔 말은 무섭고 위험한 수단이다. 말을 못 건네니 노커의 존재를 알릴 길도 없고, 노커의 존재를 부정하기엔 나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타인이 모두 적으로 보이는 상황. 사건 수사 요청자와 악플러의 관계가 이들간의 대립 정도라 보면 적절할까? 세상 선한척 한 꺼풀의 가면을 쓰고 다니며 일상을 누빌 노커. 그러다 실체의 악이 필요하면 말로 사람을 쥐락 펴락 할 수도 있는 독을 쥔 자 정도겠지. 노커에 대한 정확한 인물묘사가 안 된게 여러 의미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꺼풀 벗겨진 악으로 찬 자신의 얼굴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던 이의 독기어린 모습을 마주할 수도 있겠으며, 진짜 악마의 얼굴을 마주한 걸 수도 있겠다. 노커의 모든 가능성은 열어둔게 더 무서워지는 순간이다.



📖있을 법한 모든 것_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도, 선 넘는 관삼이나 무례한 참견을 동반하지 않고도 타인과의 관계 형성은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기며, 실제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 길 없는 영화 속 남자가 첫번째 답장을 받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뢰가 들어온 로맨스소설. 얼마나 스트레스였길래 고민하다 잠든 꿈속에서 이런 걸 다 겪을까. 어디서 한번은 듣거나 보거나 겪어봤을 듯한 플롯의 연결고리. 그래서 너무 그럴듯한 타이밍이니 영화 시나리오로 안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씬을 넘어간다. 호텔 청소부와 객실 손님의 쪽지 담화. 절대 없을 법한 조합의 대화방식. 문장 몇줄에 마음이 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섣불리 마음을 줘버리는건 아닌가 싶은 망설임을 보며 수많은 영상과 글에서 만난 방식이지만 그만큼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것도 없지. 남자일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젊은이인지 아무런 정보 없이 있을 법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어가는 장면의 전환. 그렇게 우리는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고, 애정어린 작은 행동에 반응하며 어떻게든 핑크빛으로 물드는 엔딩을 바라게된다. 현생에는 없더라도 소설이나 영화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긍정회로를 가득 밀어부치게된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_ 참견하지 말라고 일일이 반반학 다음, 뒤이어 어떻게 인간도 아닌 게 가족이 되느냐는 시비를 걸어오는 데에도 상대를 해주었지만, 이제는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못 들은 척하고 지나쳤다.

과거 가정통신문으로 받아보았던 물자 절약 실천하기 사항들을 복창하며 그 시절 우리는 하라면 해야했고, 하기싫어도 해야했던 세태의 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국민학교를 입학하여, 초등학교에서 졸업한 나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저학년때의 기억. 사사로운 개인사까지 모두 공개를 해야하는 관계의 집단으로 그게 어떻게 우리가 공유할 사안인지를 묻고싶었으나 묵살될게 뻔해 목구멍에서 맴돌았던 기억이 가득하다. 그렇게 물자를 절약하고 싶다면 이 갱지와 선명하지도 않는 잉크자국들. 나르고 분배하는 인력까지 이 자체가 물자 낭비가 아닐까 싶었던 생각은 나눠주는 이는 모르고, 받는 아이들만 공감했던 기억같아 피식거리게된다. 옛날에는 다 그러고 살았다고 말하기엔 아쉬운 소외됨이 떠오른다. 수치심과 절약을 맞바꾸었기에 이지경이 되었나 싶기도한 것. 그렇게 옛날을 들먹거리다보면 결국 태초까지 이어질 것이며, 진짜 에너지 절약의 최후 수단과 최대의 효과는 인류 멸망이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도 인간의 부류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결론에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애매하기만 하다.



📖이동과 정동_ 국경을 넘는다고 하여 즉시 질병과 가난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대기자 펼쳐져 있는 건 아님을 알면서도, 통행의 자유마저 없어진 만큼 세상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경로는 줄어드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는 사람들의 원념이 술통 속의 효모처럼 부풀어오르는 건 당연하다.

노커가 묻지마 폭행과 살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동과 정동은 코로나시대를 겪어온 이와 소설 페스트를 읽은 이가 가장 많이 공감할 내용이었다. 전염병이 진득하게 머르고 있는 도시. 교차감염 우려하여 도시간의 이동은 완벽히 차단된 시대. 이전의 사회활동방식은 깨어졌고, 비대면 방식으로서의 전환과 항상 타인을 의심하게되는 과정을 통해 다들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괜찮지 않겠냐는 기대로 탈출을 원하게된다. 이 곳 처럼 전염병에 찌들어 있는 곳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 바이러스를 가득 쥐고 오는 타인이 내 반경으로 들어오는 것은 반대하지만, 내가 새로운 공간을 찾아 가는 것에는 진입 거부가 없길 바라는 마음을 들여다보며 암울의 시대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음을 느낀다. 인류가 겪는 디스토피아적 삶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겪어봤음직하며 들어봤음직한 소재들이다. 누구 하나 예외로 둘 것 없이 살면서 서너개 정도는 '나도 그런데...'로 혼잣말을 했을 단편이다. SF적 소설이라 하기엔 현실에 많이 닿아있고, 또 허구라 하기엔 요즘 일어나는 일들에 겹쳐보이는 구석이 많다. 거기다가 씁쓸함마저 짙게 느껴지는 주제들이라 개운치못하다. 세상이 마냥 무지개처럼 화사하고, 빛날 수 없다는 걸 실감하도록 정신 번뜩드는 모든 가능성이기에 완독의 뿌듯함보단 무거운 기운이다. 표지의 화사한 색감의 디자인에 눈치없는 다채로움이었다고 애먼 핀잔을 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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