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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 순간 빛을 여행하고 - 그림 그리는 물리학자가 바라본 일상의 스펙트럼
서민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4월
평점 :
저자는 물리학자이며 그림까지 그리는 내가 가지지 못한 기질만을 품고있는 교수이다. 그러한 사람이 에세이까지 쓴 것인데 진짜 사기 캐릭터다. 평일엔 테라헤르츠라는 빛을 연구하는 물리학자이며, 일요일엔 한강을 달리며 보아온 구름을 캔버스에 담는 화가로 사는 삶. 그리고 자신이 살아오며 느낀 감정들을 글로 풀어내는 이후의 시간들까지. 이과감성을 지닌 저자가 바라보는 세상에 예체능적 감수성도 한스푼 듬뿍 담아내어 풀어낸 그림들. 연구하는 대상을 수치화하며 기록하는 것과 그려내고팠던 마음의 이야기를 붓에 담아내는 것, 어릴적부터 마음의 평온을 주었던 도서관에서 본 무수한 책과 글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들. 각각의 분야에 따라 기대어보면 어느 파트는 물리학자 에세이로 봐야 될 것이고, 또 어떤 파트는 예술가의 에세이처럼 느껴지며, 어린시절 도서관에서 살았던 순간을 추억할 때엔 영락없는 책덕후의 모습까지 다양하다. 여기저기 담그고 있는 부케가 많은 저자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한정적이었던 내 생각의 궤도를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어주는 에세이라 해도 좋겠다.

📖 창 속의 작은 세계_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렇게 현미경이라는 기기에 매료된지 정확히 삼십 년 뒤에 정말로 현미경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비록 처음의 경험이 주는 강렬한 인상과 설렘은 이제 없어지고 그렇게 우아하고 멋진 최초의 현미경의 모습도 아니지만 시작과 과정, 그 끝이 일치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매력적인 사실이 아니겠는가.
정말 멋진 사람이지. 행복하게 즐기고 배웠고, 이후의 삶도 그걸 연구하며 관련된 업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일이다. 나도 어린 시절엔 좋아하는게 정말로 많았는데, 그게 업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겁도 났고, 내가 그걸 업으로 선택을 한다면 더이상 그게 행복의 우선순위가 될 수 없을거라는 주변의 이야기에 팔랑귀가 작동 한 걸지도 모르겠다. 올곧은 맘으로 쭉 밀고나갈 자신이 없었던 건 내가 그 분야를 덜 사랑해서라기보다 덜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 것도, 책에 파고드는 것도, 공연 연출을 공부한 것 처음엔 정말 열정가득했고 내가 봐도 나란놈이 멋있게 반짝였는데 진짜 거기에 푸욱 젖어들 마지막 선택은 못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좋아했고 열망했으며 사랑에 마지않는 것을 진득하게 하는 사람은 정말 매력적이다.


📖 한 줌의 흙을 옆으로 옮기는 일_ 아주 느린 속도로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단순하고 지루한 일상쯤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그 꾸준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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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잘할수 있는 진짜 나만의 일을 찾기 전에, 일의 가치를 온전히 느끼기 전에 거짓된 좌절감을 먼저 들이민다. 인스턴트식 보상의 화려함이나 거짓된 좌절감에 속지 말고 그저 한 줌의 흙을 옮기는 작은 일의 가치를 잊지 말자고 되뇌어본다. 오늘도 아주 느리지만 큰 산을 만드는 중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말이다.
저자가 진짜 말하고픈 그 문장. '오늘도 우리는 아주 느리게 큰 산을 만들지.'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생으로서 학생과 직장인 그 중간 지점에 있을 때에 목표와 포부, 기록과 성과에 대한 고민은 비단 저자의 사회초년생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그 시기에 우리는 다 같은 마음이다. 빠른 습득과 확실한 성과. 기록으로서 남겨지는 내가 이 곳에 필요로한 이유들. 하지만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모든걸 이뤄낸다면 우린 여기에 없고 어디 저명하고 세계적인 대회의 시상대에 오르고 있겠지. 잘 알고 열심히 해왔고 그래도 깨나 잘 한다고 느꼈으나 어딘가 모르게 지금 이 자리에선 더디고 티도 안나는 제자리 걸음같은 자신을 내려다보면 암담하긴 다 똑같은 듯 하다.
저자는 매일 한줌의 흙을 옮기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조금씩 옮겨둔 것들이 작은 언덕이 되고 야트막한 산이 된다는 그 믿음을 갖고 무던하게 버텨주길 바라는 듯 했다. 본인이 해 보니 결국 되더라는 걸 알려주려는 말들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 캔버스에 담긴 빛은 무슨 색일까?_ 좋아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건 어느 때고 힘들거나 아플 때 스스로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에서 오래된 그림을 보면서 마음껏 헤매다 알게 된 '나'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좋아하는것이 잘 하는 것으로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살면서 좋다좋다 하던게 잘한다 잘한다로 모두 이어지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능력좋은 저자가 부러워지지만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걸 살면서 터득했다. 한 줄기의 빛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저자가 연구하는 학문으로 갔다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까지 닿는다. 삶에서 업으로 이어지는 세계관 확장의 연관성. 그만큼 저자는 빛을 연구하고 삶에 녹아내는 것을 즐겼고 그만큼 기뻐했다. 정말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을 사랑하는게 보였다. 즐겨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사람을 이길 순 없지.

📖 에필로그_ 재미있는 것은 어느 나이가 되어서도, 그 나이에서의 나름의 고민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더 자라야 할지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성장통을 겪는다.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과 경험은 사실 모두에게 처음이 아니던가. 처음으로 겪는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저 그 낯선 일을 대하는 마음에 조금의 느긋함이, 당황하거나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견뎌내는 유연함이 조금씩 더 늘어나는 거겠지.
큰 갈래로 보면 처음엔 화가와 물리학자라는 두가지를 모두 하고있는 본인의 어린시절 이야기였고, 중반부는 현재의 삶을 이야기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고있음을 느끼는 바를 알려줬다. 후반부는 빛을 그린 화가들의 작품과 일상속에 녹아있는 빛과 관련된 이야기들. 그리고 빛과 연결된 세상에 알려주고픈 것들을 저자만의 조곤조곤함으로 적어두었다. 그만큼 저자는 빛을 동경하며 우리의 삶에 닿았을 때 얼마나 눈부시며 더 빛날지를 기대했고, 그 문장을 읽는 나도 덩달아 기대하게 만든다.

한평생 빛의 색채학과 그림이라는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한 이가 전해주는 빛에 대한 덕질기록이라 하겠지만 그만큼 사랑 할 수 밖에 없음을알려주었다. 선한 문장으로 나도 알게 모르게 빛을 여행했고, 그 빛을 따라 가고있다는 걸 느꼈다. 곁에 항상 존재했던 빛이라는 것에 무던했음도 느꼈고, 그만큼 익숙했던 것들에 무뎌져있던 삶에 대해 다시금 자각하며 나의 세계속에 빛 만큼이나 반짝이고 선명했던 것들이 무엇이었고 지금은 어떻게 받아들이고있는지도 떠올려보는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