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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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암기과목이어 노력만 하면 점수가 잘 나오던 파트였다. 이해하고 해석하려하기보단 이미 지나온 과거의 이야기들 이기에 통으로 외워 시험을 보던 과거의 기억들. 툭하면 와르르 쏟아지는 시대별 사건 나열도 가능한 사람인데 내 머릿속에는 공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한국사의 문화와 사상적 측면에서 슬픈 비극의 한 단락이 비어있는채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과거이며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되는 흔적이다.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공녀 제도를 없애 달라 창한 서신을 보고 소설로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허주은 작가. 작가가 아니었다면 나 또한 기억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아픈 역사를 외면하고 살았을 듯 하다.

국가가 부강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그 고통을 고루 감내하는게 당연한걸까 싶으면서도 가장 따스한 부모의 품을 떠날 수 밖에 없던 꽃같은 아이들의 청춘은 어떻게 보상해줄 것인가를 생각하며 이 책과 마주 할 수 있었다.


📖 울부짖는 딸들이 명나라 선덕제의 명령에 따라 배에 실려 머나먼 나라로 향한다고 했다. 그때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육지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이 이야기의 중심. 꽃다운 여인들이 팔려가듯 끌여가야만 했던 시대. 딸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든 숨겨야만 했고, 나라는 그 숨겨둔 처자들을 어떻게든 끄집어내 나라를 위한답시고 타국으로 보내버린다. 원하지 않은 애국을 강요했다. 그 슬픔과 고통은 당연히 각자가 감내해야 할 아픔이었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나라는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주진 않았다.



📖 종사관 나리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고...... .

환이는 제주로 내려와 몇년간 떨어져 지낸 동생 매월과 재회를 한다. 떨어져 지낼 수 밖에 없던 이유. 노경심방에게 딸을 부탁해야만 했던 민 종사관. 아버지의 부재는 당신이 수사하던 사건으로 인해 해를 입은것이라 판단을 하며 부친이 써 놓은 일지를 통해 사건이 일어난 시초를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여인들의 실종. 그리고 사망. 한 두명이 아닌데에도 세상은 개의치 않다는 듯 흘러간다. 환이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열세명의 처자들이 사라졌고, 살해되었음을 알게된다. 노경 심방을 비롯하여 마을의 촌장이라는 문촌장이나 홍목사도 아이들이 믿고 의지할 어른들은 모두 손을 놓은 듯한 태도에 환이 못지 않게 이 글을 읽는 나도 울컥울컥 한다. 어찌 할 수 없는 인재(人災)인가 아니면 어떠한 배후가 있기에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외면의 시선들인가 헷갈리게된다.

그리고 종사관은 복선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간 써왔던 일지를 환이에게 전달해달라 부탁을 한다. 아마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을 읽은 복선이기에 어떻게든 이 내용을 환이에게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자신도 어떤 이의 금쪽같은 자식이니 나의 부모 만큼이나 애틋해하는 아비의 눈을 종사관의 시선에서 느꼈겠지.

📖 우리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몇 톨의 애정을 두고 몸싸움을 벌이는 굶주린 어린아이 둘이었다. 한 사람이 베푸는 사랑에는 한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월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자매다. 이 수사가 끝날 때까지 밧줄의 매듭처럼 엮인 사이다.

자매라면 믿고 의지할 유일한 가족인데 내가 생각하는 자매의 모습과 살짝 다르다. 환이와 매월도 성향이 다르듯 나의 언니와 내 성향도 정 반대. 세상 선하고 화가 없는 언니와 진득한 맛이없고 화르륵 타오르기도하는 괄괄한 나. 그래도 언니가 많이 보듬어주고 양보해주며 감싸준 덕에 현실 자매여도 투닥거림없이 잘 지내고있음에 감사해진다.

아무래도 부모의 사랑은 한정적이나 자식들이 나눠갖기에는 모자람이 있겠지. 노경심방에게 맡겨진 매월은 아비의 사랑이 그리웠을 것이고, 늘 곁에 있을 환이를 시샘했을 것이다. 어찌 할 수 없는 매월의 기운이 있어 할망에게 자라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린 아이니깐. 받아도 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과 몇년간 만남이 없어 더욱 멀어졌을 자매사이. 어미도 아비도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의지하고 살아갈 사람은 환이와 매월 그녀 둘 뿐이어서 어떻게든 붙들고 살아야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행방으로 시작된 이야기지만 자매들의 이야기로 파생되어 나와 다른 성향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방식도 배운다.



📖 그의 바람은 가희가 아름다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명나라 사절이 훔쳐 갈 미모를 다시는 갖지 못하도록.

티 없이 맑고 예쁘게 자라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이 세상의 고난은 피해서 무탈히 자라주길 바라는 간절함인데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어떻게든 숨겨야했고, 피눈물나는 마음으로 해를 입혀서라도 흉진 얼굴로 살 지언정 끌려가지 않도록 했어야하는 마음. 부모라면 천냥 빚을 져서라도 평생을 당신이 고생하며 아프더라도 그 모든건 자기 선에서 끝내려 했으리라. 애 끓는 부정(父情)이 때론 다른 방향을 향하기도 하는데 그게 이 이야기의 큰 산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 "나도 아직은 확실히 몰라. 다른 세계의 메아리가 들린다는 것밖에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매월의 말은 노경심방 곁에 살며 굿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시름을 달래는 일을 하고 있기에 느끼는 기운은 아닐 것이다.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뜻도 있을 것이고, 모르고 지나치는 소외된 자들의 울음은 늘 존재하다는걸 일러주고 싶은 문장이다.

굳이 제주에서 이 일이 일어났겠냐만은 이야기의 중심을 제주의 작은 마을로 둔게 고립되고 소외받으며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 작은 무리의 부류를 뜻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이며 아직은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계집애라는 편견과 어린놈이 어른들 하시는 말씀에 따를 것이지 뭐가 그리 토를 달겠냐는 훈수를 둔다면 아무도 이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못할 것이다. 영영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반까지 환이가 일러주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 환이가 매월이보다 좀 더 오래 아버지 곁에 있어서라기보단 환이의 시점에서 듣는 이야기여서 그럴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본다. 자주 보지 못한 매월이여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는 건 아닐터. 다만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보고싶다. 행복했던 기억을 자주자주 꺼내어 보듬어주는 환이의 성향과 마음 한 켠에 잘 담아두고 누가 볼 새라 아끼고 싶은 매월이였던 점. 같은 뱃속에서 나온 딸들이라도 생김새와 성격이 다른 것 처럼 부모를 회상하는 방식도 다른 것이니 애틋함의 깊이를 키재기 하진 말아줬으면 좋겠다.


후반부로 가면 아빠찾는 딸들의 애끓는 마음을 벗어나 내 자식만이라도 잘 먹여살리고픈 욕망으로 가득한 비뚤어진 부성도 나타난다. 내 자식들 만큼이나 같은 땅을 밟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모두 귀한 존재들이다. 제 배 아파 낳은 아이를 위한답시고 해왔던 행동은 결코 옳은 사랑의 방식은 아니라 말해주고싶다.

400페이지가넘는 두툼한 두께를 보면 쉽사리 도전할 소설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이기에 흥미가 가며 상세한 묘사는 영상으로 보여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건 멀티플렉스관에서 보는 영화보다는 방 안 불 다 꺼두고 모니터의 빛만으로 집중하며 보는 넷플릭스의 어둡고 스산한 기운의 영상미가 겹쳐보이기도 하다. 중반의 다소 지루해지는 타이밍도 있지만 결국 환이와 매월이는 해 낼 거라는 확신을 갖고 보면 완독 할 수 있다고 일러주고 싶다.

역사관련 예능이나 교양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청소년이라면 분명 집중해서 읽을 소설. 이번 겨울방학에 부모와 아이 모두 도전해볼만한 한 권.

◎ 미디어창비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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