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버 (양장)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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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청소년 문학이라고 청소년만 읽을 수 있게 제재하는 것도 아니니 살짝 설익은 어른인 나도 참 재밌게 읽었고 다음 회차에 뽑힐 작품도 기대를 하게 되더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느끼게 될지.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먼저 어른이 된 내가 가진 생각은 그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를 생각하며 읽으면 또 다른 재미의 구석을 찾아 낸 듯 흥미로워진다.


부모의 보살핌 대신 할머니와 함께 사는 정인. 학교에서 근로를 허락한 알바생이기도하고, 때때로 폐지를 주워 빈지갑을 채우는 중학생. 세세하게 이 친구의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고 몇몇 단어만으로도 느껴지는 고단함과 빠듯함. 그래서인지 다른 아이들은 한번뿐인 수학여행의 설렘을 기다리는데, 정인에게는 통신문에 적힌 354,260원 이라는 금액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세 시간을 아르바이트 하는 정인에겐 시급 9,160원으로 알바를 하고, 알바가 없는 날이면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가방 가득 폐지를 주워 빈 지갑을 메꾼다.

그렇게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세 번, 틈틈히 폐지를 주워 꼬박 한달을 일해야 채워질까 말까한 금액이다. 나 같아도 설레겠다. 이렇게까지 돈을 써가며 간다면, 단 며칠간에 그 금액을 홀랑 써버리면 당장 다음날부터 이뤄질 고된 일상에 눈이 질끔 감기고 깊은 숨이 몰아 쉬어질 설레임 같은 것.

읽을수록 어찌 이리도 셈이 밝은 아이가 있나 싶다. 정인의 처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어른이라면 어린녀석이 돈만 밝히는 속물처럼 볼 수도 있겠다만 이렇게 정인이 생각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걸 보니 급하게 영글어버린 아이 같아 안쓰러움만 커지더라.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 그 모든걸 알아서 다 쥐고있는 모습을 보자니 살짝 불안함도 느껴졌다. 정인의 곧은 생각을 툭툭 치면서 어떻게든 꿰어보려는 헬렐 벤 샤하르가 슬그머니 들러 붙은 것 때문. 윤기나는 검은 털과 금빛의 눈. 고양이의 털인지, 건물사이의 어둠인지, 아니면 고양이에게 숨어있는 인간의 그림자인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그래도 헬렐은 악마니까 막 퍼주듯 정인을 돕진 않겠지.


49P_ 할머니도 늘 '세상에 났으면 밥값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니까. 도대체 밥값이란 건 뭐길래 아끼면 아낄수록 더 버거워지는 걸까? 한 사람이 세상에 나서 먹는 밥값을 다 셈함면 그게 그 사람의 인생값일까?


내가 느끼는 밥값의 구실이라 하면 인간다운 최소한의 정도 즈음 되겠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밥값에는 제 그릇에 넘치는 욕심이 있어서는 안되고, 제 한몸 편하자고 남들에게 폐를 끼쳐서도 안되고, 육신이 건강하다면 생산적인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고, 기본적인 도의를 지키는 주체 정도?

(생각해보니 안되는 것들이 참 많네. 또 어찌 보면 내가 지금껏 먹어온 밥값을 금전적으로 계산한다면 집이며 차며 신용까지 최대한 담보를 잡아서 가장 큰 금액으로 대출을 해야 될 지도 모르는데,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것을 구별해 선한 사람으로 살면 된다는 거니깐 할머니의 밥값 계산법은 어찌보면 헐하게 정산된것이라 감사하게 여겨야겠다.)

정인에게는 모든 정산법이 돈과 연계되어있다. 복지사가 챙겨주는 물품은 할머니에겐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것이라 인식 할 수도 있겠고, 고물상에서 후하게 처주는 폐지값도 어쩌면 나중에 다 돌려 갚아야 하는 밥값의 복리 이자로 머릿속에 맴돌수도 있겠다. 아이에겐 타인이 주는 호의도 결국 자신의 처지로 인해 받은 추가 수당 같은 셈법이니 말이다.

어른이 되고보니 정인보다 밥값 못하는 어른이 참 많았다. 그에 비해 정인은 빨리 영글고 시기에 맞지 않게 익어가는 듯 하지만 제법 단단하고 묵직하게 잘 자라주고 있는 듯 해서 이정도의 친구라면 몇 년 후의 정인은 밥값을 선불계산하고있는 청년으로 자라지 않을까 싶다. 할머니가 손주를 참 잘 키우셨고, 손주는 알아서 잘 컸구나 싶은 아줌마의 참견과 괜한 뿌듯함.


74P_ "난 네 운명을 바꿔 줄 수 있다니까."

"바꿀 수 있다면 그게 운명이에요? 구청에서 개명 신청하는 것도 아니고."


헬렐의 유혹에 이 녀석은 뭐이리 단호한가? 원래 이 시기의 아이라면 한번정도 혹하는 마음에 헬렐의 달콤한 말과 환상에 스르륵 넘어가며 진득하니 빠져있다가 정신을 차리는 반성의 시간도 가져보고, 유혹을 뿌리친 후 다시금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전래동화같은 결말을 기대해야하는데 시작부터 대쪽같다. 그래서 정인이 맘에 든다. 그래그래. 요즘 친구들이 이렇게 똑부러져요! 오랜 시간 살아온 헬렐의 능력치에 부합하지 않는 새로운 상대이니 근성 넘치는 이 모습을 보고 얼마나 이겨먹고 싶을까.

나중에라도 구청에 가면 피식 웃을지도 모르겠다. 구청 민원 창구에 개명 신청을 받고, 다른 한켠에는 운명 교체 신청을 받는 창구라니! 거기엔 헬렐이 사람을 채용하려나?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정인이는 똑부러지다가도 아이같은 생각이 불쑥 튀어나오는 영락없는 중학생 이구나 싶어진다.



좋지만 좋지 않은 것. 나에게 좋을 수도 있지만 남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며 즐겁진 않으려는 제법 확고한 신념. 정인은 그렇게 잠깐은 즐거울지 몰라도 부당하게 얻어지는 이득과 행복에는 영 관심이 없어보인다. 할머니의 밥값지론이 아이에게 크게 다가왔나보다.

소원도 뭘 알아야 빈다고 했던 정인이니, 하고싶은 것도 뭘 해본 아이라야 할게 늘어나겠지. 자신을 한번씩 약올리던 태주였지만 그거야 정인이만 못들은체하고 마음에 담아주지 않은다면 굳이 머리써가며 몸써가며 악마에게 부탁을 해서 괴롭힐 이유따윈 없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헬렐은 넘어올듯 넘어오지 않고, 지금껏 해왔던 인간들의 유혹방식과는 사뭇 다른 정인을 어떻게든 꾀하고픈 눈빛이다.나약한 고양이 같지만 결국 악마니까. 한 번 즈음은 정인을 낭떠러지로 내몰아 웃음지을 눈을 가진 자 임을 계속 주시하게된다.


230P_ "그치만 이건 진짜가 아니에요. 어쩌면 나중엔 제가 만약에를 찾을 수도 있고, 파우스트라는 사람이랑 상담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한 번 더 진짜를 살아 볼게요."



'만약에~'로 시작된 인간의 요청은 헬렐를 부르는 주문과도 같았다. 인간이 한 선택에 헬렐은 그걸 구체화 시켜주었고, 말하는대로 이뤄진 현상을 누린 인간은 헬렐에게 마음을 먹히고 말겠지. 그걸 맛 보고 더이상 먹지도 누리지도 않겠다는 단호함은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주체로서 참 대단하다고 인정받아야 할 부분이었다.

원래 한 잔은 너무 많고, 천 잔은 너무 적다고 했다. 악마의 셈법이 맞았다. 처음의 시도는 어려웠고, 반복되며 익숙해지다가 그 이상의 것을 탐하며 그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모르고 더욱 악해지는게 악마가 만들어놓은 인간의 사용법이었다.

그럼에도 정인은 '여기까지'임을 이야기했고, 환상이 아닌 진짜를 살겠다는 말은 지금껏 헬렐이 만나온 인간과는 또 다른 부류임을 확신하게 했다. 매의 눈보다 매서운 금빛의 고양이 눈이 휴가 중 점찍은 달콤한 인간다웠다. 아주 찐하고 재미난 휴가를 보낸 헬렐은 얼마나 더 많은 가정을 세워 인간을 꾀할지는 모르겠으나 헬렐의 악마 인생사 중 최초로 이긴 인간으로 남을 순 있겠지만 최후의 인간만은 아니길 빌어본다. 인생사가 재미난 이유는 모두 각자의 소설을 하나씩 쓰고 있기 때문이니 정인보다 더 올곧고 반듯한 아이는 알게 모르게 더 많다는 걸 슬그머니 흘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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