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도 피곤한 사람들 - 피로 사회를 뛰어넘는 과학적 휴식법
이시형 지음 / 비타북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피로는 몸이 아니라 교감신경 혹사로 인한 뇌의 피로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쉰다고 해서 피로가 풀리지는 않는다. 피로 물질은 몸뿐만 아니라 뇌에도 쌓인다. 몸의 피로는 물질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비교적 쉽게 풀릴 수 있지만, 뇌의 피로는 단순한 방법으로는 잘 풀리지 않는다.


피로를 느끼는 원인은 간단히 말해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자극이 계속될 수록 쌓여만 간다. 한국 사회는 지속적으로 자극을 추구하는 도파민적인 사회라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조금만 느리면 답답해하고, 성과중심주의와 과로에 길들여져있다. 이런 환경에 노출되면 자연스레 스트레스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저자인 이시형 박사는 정신과 전문의이며  '힐리언스 선마을'의 촌장이다. '힐리언스 선마을'은 지치고 병든 현대인들의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을 자연스럽게 증진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 힐링리조트이다. 저자는 이곳에 찾아온 사람들을 마주하며 몸의 피로보다 간과되기 쉬운 것이 뇌의 피로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 원인과 해결 방법을 어렵지 않은 언어로 기술해 과학적인 휴식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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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몸이 쉰다고 회복되는 간단한 피로가 아니다. (…) 뇌의 피로는 그 양상이 대단히 복잡해 쉰다고 풀리지 않는다."


제목을 보자마자 책을 집어들었다. 제목이 곧 나를 의미했다. 쉬어도 풀리지 않는 피로와 정신적인 우울에 잠식된 경험이 있다. 몸에는 이상이 없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서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옅은 우울에 빠져있었다. 일주일동안 일을 하고 휴일을 맞으면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자거나, 맛있는 것을 먹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았다. 누가 봐도 푹 쉬었지만, 그럼에도 피곤했다.


어느 날은 계속 미루고 있던 독서를 하기로 했다. 평소 좋아하던 홍차를 우리고 소설을 펼쳤는데, 문장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넋을 놓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어 시간이 지나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완전히 뇌가 터져버린 거구나. 나는 순간 깨달았다. 


'그 때, 나는 제대로 쉬는 방법을 몰랐던 건가?' 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제대로 쉬는 법도 몰랐고, 쉬어도 풀리지 않을 정도의 피로를 계속 쌓아두고 있었다.


나는 쉬었지만, 피로했다. 몸은 쉬고 있었지만, 뇌는 계속 일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은폐된 피로'를 경고한다. 뇌는 신나고 기분이 좋을 때 피로감을 느끼지 않게끔 작용하며, 혹은 피로감은 느끼지만 쉴 여유가 없을 때 휴식을 연기하기도 한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바로 쉬지 않고 SNS나 게임을 한다거나, 일에 빠져 점점 늦게 퇴근할 때의 뇌의 작용이 바로 그것이다. 

피곤하다고 뇌가 비명을 지를 때에는 이미 늦기 때문에, 피로를 예방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짧게 자주 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50분 일하고 10분 휴식을 취하는 방법('뽀모도로 공부법'이라고도 불린다. 올해 초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유행했지만, 언제나 권장되어온 방법이다)이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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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특히나 피로를 높이는 몇몇 요인이 있다."


책을 읽다보면 어딘가에서 들어 익숙한 개념들이 보인다. 결국에는 건강한 생활방식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누구나 공감하지만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개인 혼자서는 적용하기 어려워보이는 밤 11시 전 취침이나, 점심 후 낮잠 20분 같은 것들 말이다.


'사회가 건강을 망치고 있어.', 같은 삐딱한 생각이 불쑥 든다. 저자는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는 한국 사회가 지속되다보면 언젠가는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 경고하며, 자연을 가까이 하라고 말한다. 힐리언스 선마을이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것이 그 이유인 듯 하다.


자연처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에 있는 모든 항목들을 지킬 수는 없겠지만 모르고 못 지키는 것 보다는 알고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뇌에는 세가지 호르몬이 휴식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한다. 멜라토닌, 세로토닌, 옥시토신이다. 각각 수면, 행복, 사랑에 의해 분비되는 호르몬들이다. 이 호르몬들은 규칙적인 수면과, 태양 아래 여유로운 산책으로 채울 수 있다고 한다. '그래. 이 정도는 해볼 만 하지.' 라고 생각했다.


《쉬어도 피곤한 사람들》 이시형 지음, 비타북스


한국 사회에서 특히나 피로를 높이는 몇몇 요인이 있다.

이는 몸이 쉰다고 회복되는 간단한 피로가 아니다. (…) 뇌의 피로는 그 양상이 대단히 복잡해 쉰다고 풀리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피로는 몸이 아니라 교감신경 혹사로 인한 뇌의 피로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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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인간 실격 (미니북) - 194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소영 옮김 / 더스토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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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에도 상처를 입습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는 겁니다." - 79p


인생이란 것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을까.


주인공 '요조'의 길지 않은 일대기를 가만히 따라가다보면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피폐와 퇴폐에 함께 물들게 된다.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면서도,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응원 대신 '어디까지 가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읽었다.


이 소설은 화자 '나'가 주인공 '요조'의 수기를 소개하는 액자식 구성이다. 요조는 세 개의 수기를 통해 자신이 보낸 '부끄러운 생애'를 담담히 서술한다.


수기에는 요조의 시선으로 보는 사회가 펼쳐져 있다. 그가 보는 인간 사회에서 사람이란 태연한 얼굴로 다른 사람을 속이며 이득을 취하는 교활한 존재이며, 앞에서는 칭찬을 하면서 뒤에서는 험담을 하는 잔인한 존재이다. 이런 잔혹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경멸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뇌하던 요조는 끝끝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에 이른다.


그 행위에는 커다란 동기도 심오한 목적도 없다. 끊임없이 세상에 실망해가며 요조는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가며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물이 스스로 도태되는 것처럼, 요조는 스스로 '인간'으로 살기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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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좋으니 웃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내가 그들의 이른바 '삶' 바깥에 있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20p


요조는 결벽을 앓았던 것이 아닐까. 위생적인 결벽이 아닌, '인간다움'에 대한 결벽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범주에서 벗어난 그 모든 것들에 손 조차 대려 하지 않고, 무서운 세상 속에서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도움의 손길도 어물쩍 넘겨버린 게 아닐까. 그런 요조는 다른 '인간'들과 절대로 닮지는 않으리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요조는 불만족스러운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사회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저 포기하고 실망하며 그 탁류에 휩쓸리듯 살아간다. 못 사는 집 출신도 아니고, 교육의 기회도 있었고, 외모가 못생긴 것도 아니고, 그림이라는 재능 또한 있지만, 그는 '현실에 맞춰 자신의 인생을 꾸리는' 행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 강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 타락해간다. 보다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마치 고급 차의 운전석에 앉아서는 끊임없이 어둠의 길을 향해 기울어지는 핸들에 손 하나 얹을 기럭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 같다.


그러던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도움을 갈구한 요조를 가족은 정신병원에 감금해버린다. 요조는 체념한다. 무저항도 죄인지를 신에게 물으며 자신은 '인간 실격'이라 정의내리는 모습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왜일까. 나약하고 무기력해 한 발자국 내딛으면 인생이 바뀔지 모르는데도 그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해 수렁에 잔존하여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떠올랐다. 그깟 '두려움'이 뭐라고. 하지만 그 '두려움'이 개인을 좀먹는 건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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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코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 없습니다. 하지만 아아, 미치광이들은 보통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 175p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를 제대로 인식한 것은 15년 방영한 애니메이션 <문호스트레이독스>를 보았을 때다. 사망한 현대문학 작가를 '모에화'한 캐릭터들이 해당 작가 작품의 이름을 딴 초능력을 발휘하는 현대 판타지물이다. 이 만화는 일본에서 큰 히트를 쳤고, 덩달아 캐릭터들의 얼굴이 디자인 된 현대문학 서적이 리커버 출간되거나 해당 애니메이션 성우가 라디오에서 책을 일부 낭독하기도 했다. 작중 '다자이 오사무'는 큰 비중이 있는, '거대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캐릭터였기에 (자살 중독에 여성편력이 있는 잘생긴 남성 캐릭터이다. 저자 다자이 오사무보다는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듯 하다), 덩달아 소설 '인간실격'도 많이 소비되었다. 


이렇게 책이 굿즈화 되는 경우도 있다니. 일본 시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참 신기했다. 나도 그 흐름을 신나게 탄 '덕후'중 한명이었기에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를 눈여겨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일본에서 출간된 캐릭터 리커버북은 사지 못했다. 당시에 해외 구매 루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슬펐다.


잊혀진 한이 남아있었던 걸까, 서점에서 한 눈에 들어왔다. 표지가 참 예쁘다. 초판본 리커버 미니북인데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가벼워서 읽기 편했다. 


(+)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상>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동경하는 캐릭터의 방에 똑같은 표지의 책이 놓여져 있는 것을 눈치챘다. 즐거운 발견이었다.


《초판본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소영 옮김, 더스토리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에도 상처를 입습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는 겁니다 - P79

어떻게든 좋으니 웃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내가 그들의 이른바 ‘삶‘ 바깥에 있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 P20

결단코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 없습니다. 하지만 아아, 미치광이들은 보통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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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톡 - 인생이 피곤할 때, 귀찮을 때, 두려울 때 하나씩 까먹는 마음의 문장들
양창이 지음, 이지수 옮김 / 지식너머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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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근시가 있지만 웬만해서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세상을 또렷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어라, 이 감성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며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얇은 책 한 권이 빠르게 끝나버렸다.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를 찍으려고 몇 번이나 휴대폰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왠지 모르게 어딘가에서(특히 SNS에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문장들이 참 많았다. 가볍지만 휘발해버리는 문장은 아닌, 마음 한 구석에 숨겨놓지만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조금은 부끄러울 것도 같은 독특한 B급 감성, '청춘'의 향이 났다.

저자 양창이는 중국의 대표 SNS인 웨이보를 통해 유명해진 그래픽 디자이너다. 이 책은 그 곳에서 많은 인기를 모았던 글 300편을 모은 책이라고 한다. 역시 그렇지, 무릎을 쳤다. 마치 누군가의 트위터 계정을 탈탈 털어서 전시한 책 같았다. 2010년경부터 트위터 문화를 향유해 온 내가 익숙하다고 느낄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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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있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는 경우는 단 한 가지다.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다."

피식피식 웃으면서 읽었다. 15년에 출간된 책이어서 그런지 성별이 달라서 그런지,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이런 감성의 책이라고 감안했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특유의 유머와 냉소, 그리고 따뜻한 마음이 섞여있다. 그는 꾸미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툭 툭 내뱉으면서도 당당하다.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참 멋지게 사는 구나.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렇게 살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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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호기심이 사라지고 평범한 것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게 될까봐 겁이 난다."

표지의 하나씩 '까먹는'다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린다. 화장실에 꽂아놓고 읽기 좋은 심심풀이 땅콩같다. '바나나는 간식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명실상부 간식에 가까운 책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좋다는 의미다.

습관적으로 SNS에 들어가긴 하지만 타임라인을 점령한 어지럽고 시끄러운 문장들에 지쳤을 때, 이 책을 대신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저자의 문장들에 마음 속으로 리트윗과 좋아요를 누르다 보면 심심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지금 시간이라는 그릇 안에 누워있다. - P116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 사람 곁에는 때때로 그가 사실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일깨워줄 친절한 친구가 필요하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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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 28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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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모든 사람들은 잊는다. 절대로 잊지 않을거라 결심하는 순간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세세하고 구체적일 수록 빠르게 잊혀지고, 결국에는 두루뭉술한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메모를 한다. 메모를 하는 행위는 망각을 두려워한 지혜의 산물일까. 역사가 기록 없이는 이어지지 않았을 것처럼 말이다. 한국인을 '기록의 민족'이라고도 하는데. 선조들에게서 내려온 메모DNA가 어딘가에는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메모'라는 행위를 참 좋아한다. 언제나 작은 수첩과 펜을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기록하는 것에는 설명할 수 없는 낭만이 느껴진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는 메모를 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이어가기 힘든 사람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 해가 시작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다이어리를 산다. 서점에 흔한 팬시 문구 메모장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이렇게 많이 사 놓았지만 들고 다니지를 않아서 정작 메모할 때에는 서투르게 긁어모은 문장들이 휴대폰 메모장에 두서없이 들어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나는 쌓아두는 것은 좋아하지만 모아 정리하는 것은 못하는 팔자인가보다.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를 수시로 묻어두지만 정작 찾지 못하는 다람쥐처럼 말이다.

이번 독서도 마찬가지였다.

메모를 했는데 없어졌다.
제목이 《아무튼, 메모》이니 기왕이면 나도 메모를 하면서 읽어볼까 하고 생각을 했는데, 리뷰를 쓰려고 찾아보니 써놨던 메모를 몇 가지밖에 찾을 수 없었다.
메모 장소를 통일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밀리의 서재 인용문 메모, 휴대폰 메모장,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던 포스트잇, 때마침 가지고 있던 노트. 나중에 옮겨 놓아야지 하고 영수증 뒤에 적어놓았던 것도 같은데 모르는 사이에 버려버렸다.

메모를 했는데 나중에 찾을 수 없다면 아무 의미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언가 적었던 기억은 확실히 기억에 남았기에, 나는 이 리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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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손에 들고 있는 메모지가 자신의 삶이다. 그리고 글자가 보인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눠져있다. 1부는 메모에 대한 다양한 고찰, 2부는 저자의 과거 메모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소위 '메모의 화신'이었다는 저자의 메모장을 들춰보는 기분으로 읽었다.

왜 이 문장을 메모한 걸까, 이 메모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었던 걸까. 모든 사람의 메모에는 개인적인 취향, 가치관, 당시의 상황이 함께 작용한다. 메모일 뿐인데 마치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일방적이지만 조금 저자에 대해 잘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모의 종류는 다양하다. 일기일 수도 있고 일정 기록일 수도 있고 장보기 리스트일 수도 있고, 책문구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한마디 일 수도 있고 망상이나 뒷담화일 수도 있다. 이런 메모들을 모두 모으면 한 사람이 보인다. 메모는 곧 삶이다. 삶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닐지 몰라도 지나가고 나서 다시 돌아보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메모의 목적은 상관이 없다. 그저 남기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메모지가 자신의 삶이다. 그리고 글자가 보인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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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11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메모를 남기는 그 과정만으로도 기억에 한번 더 되새겨지는 것 같아요~ :-)

책읽는피자 2020-10-12 17:22   좋아요 1 | URL
습관을 들여놓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ㅎㅎ 잘 되지는 않지만요 ㅠ
 
습관의 말들 - 단단한 일상을 만드는 소소한 반복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김은경 지음 / 유유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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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습관이 부러울 때 부러움과 함께 좌절감이라는 감정까지 밀려올 때가 있다."

'나쁜 습관은 복이 날아나.' 어릴적부터 들은 말이다. 엄마는 강박적으로 나의 모든 나쁜 습관을 김시ㆍ감독했고,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놈의 '복'이 뭐라고. 어릴 때는 성가시기만 했지만 요즘은 감사하고 있다.

습관은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나와버린다. 그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평소에 좋은 습관을 많이 들여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와버리는 것은 습관이기에, 곧 치명적이다. 좋은 습관을 많이 들이는 것이 곧 성숙해진다는 게 아닐까. 엄마는 그것을 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다잡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쥐어주고 싶으셨던 거다.

나는 그다지 좋은 습관을 많이 가진 사람은 아니다. 불안할 때는 손톱이나 입술을 물어뜯고 조금만 정신을 팔고 있으면 6살 아이가 헤집고 간 것 처럼 방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깔끔함을 좋아하는 엄마는 이런 모습을 볼때마다 타박하곤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엄마의 습관인가싶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좋은 습관도 가지고 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를 한다거나, 집에 돌아오면 바로 씻는다거나 하는 소소한 습관이지만 말이다. 엄마는 '그렇게 씻기 전에 벗어놓은 옷부터 정리하고 씻어라.'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바로바로 정리를 하는 엄마의 좋은 습관은 들이고 싶어도 벌써 몇 년 째 몸에 익지 않아 반쯤 포기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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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습관에 대한 100가지 문구과 그에 대한 짧은 에세이로 구성되어있다. 각 문구마다 담겨있는 습관은 참 각양각색이다. 어지르자마자 바로 청소를 하는 습관.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 태도에 대한 습관, 몸단장에 대한 습관. 삶에 도움이 되는 습관 뿐만 아니라, 일상을 어지럽히는 습관에 대해서도 나와있다. 늘어지는 습관이나, 포기하는 습관같이 말이다.

습관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 생각은 빠르게 없어진다. 사람이 각양각색이니, 습관 또한 각양각색이다. 그것에 대해 고찰하는 것에 같이 공감하고 반성하다보면 한 권이 뚝딱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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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습관을 들여야 성공한다' 와 같은, 자기계발서에나 어울릴 법한 고압적이고 상투적인 느낌이 없어서 좋았다. 이 책은 좋은 습관을 가지고 싶어 망설이는 마음, 나쁜 습관에 고개를 내두르면서도 일상을 영위하는 마음, 좋은 습관을 동경하여 시도해보는 소소한 마음을 응원하며 같이 손을 잡고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책이다.

표지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 초등학생 시절 피아노 학원에 갔으면 한번 쯤 접해보았을 사과 연습표.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연습 한 번에 두 개씩 지우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다 채운 것에 뿌듯해하며 새로운 연습표를 받으러 가던 기억이 있다.

습관이란 건 그렇게 들여가는 게 아닐까.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다. 꾸준히, 하지만 질리지 않을 정도로 대충. 그러다보면 어느새 일상 속에 스며드는 것이 습관일 것이다. 좋은 습관도 나쁜 습관도 나 자신의 일부분이니, 미워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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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 요지경인 존재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혼자 목표를 세우고는 그 목표를 피할 명분을 마련하느라 궁리한다."

몇 달 전에 매일 50번씩 팔굽혀펴기를 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고 결심했다. 한 달 하고 보름, 띄엄띄엄 이어지나 싶었더니 지금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손목이 아픈 것 같다는 핑계가 그 이유다. 대신에 지금은 스텝퍼를 500번씩 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들이고 싶었던 팔굽혀펴기 습관은 흔적도 없어졌지만 아무렴 어때, 하고 넘겨버렸다.

인간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자기합리화를 해본다.

람은 참 요지경인 존재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혼자 목표를 세우고는 그 목표를 피할 명분을 마련하느라 궁리한다.

누군가의 습관이 부러울 때 부러움과 함께 좌절감이라는 감정까지 밀려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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