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사 입문 - 미메시스에서 시뮬라시옹까지
베르너 융 지음, 장희창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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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로서 우연히 이 리뷰를 봅니다. 관심 고맙고요. 엉망! 이란 과격한 표현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군요. 말씀하신 걸 차분히 들여다봤습니다.

1. 우선 형상과 상의 문젠데요. 학계에서 관행적으로 모상으로 쓴다고는 건 알고 있어요. 독일어로 Abbild(모방, 베낌)가 모상의 뜻이고, Bild는 그냥 상입니다. 저자인 베르너 교수가 Abbild라고 하지 않고, Bild라고 한 걸 존중하여 그냥 상으로 옮긴 것입니다. 관행이라는 것도 문제가 있으면 다시 검토하는 것이 철학하는 이들의 기본태도겠지요.
2. 독일어 Sehen을 봄으로 번역해야 맞다고 하시는데, 저도 그 점을 고심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 문장에서 시각을 봄이라고 바꾸면 문장이 이상해진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봄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봄의 질이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번역어를 고를 때 문장의 앞뒤 맥락을 당연히 고려해야 합니다.
3. 말이 너무 딱딱하다는 부분인데요. 독일어에서 부문장이 너무 길 때는 앞에서 간략하게 이렇게 말했다, 라고 한 뒤에 기다란 내용을 전하는 것이 읽기에도 편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 않고. 카시러는 ----------------------, 라고 한다 라고 옮기면 그것이야말로 한국어답지 않지요. 저는 독일어를 가능한 한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녹여 번역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데, 이런 식의 섵부른 판단과 공개는 공부하고 배워나가는(누구나 죽을 때까지 배웁니다) 이의 바람직한 태도로 보이지는 않는군요. 그리고 엉망이라는 표현은 평생을 번역에 종사하고 있는 번역자에 대한 대단한 실례입니다. 남보다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 그것이 철학의 기본 아니겠어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날 게요. 장희창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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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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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운몽>(김만중 지음, 민음사)

신심 깊은 수행승이 미녀들을 보고 잠시 욕심을 품었다가, 그 벌로 속계에 다시 태어난다.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고 또 두 명의 처 그리고 여섯 명의 첩과 더불어 즐거운 인생을 누렸는데, 알고 보니 그게 하룻밤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스토리이다. 얼핏 보기에 욕망과 권세란 허무할 뿐이라는 그저 그런 설교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꿈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이어지며 전개되는 일장춘몽(一場春夢),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은 하나의 베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 베일 뒤로는 당대 조선의 첨예한 계급구조, 남녀차별, 권력배치의 문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작품의 배경이 중국의 당나라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탄압을 피하기 위한 작가의 자기 검열로 보인다.

주인공 양소유가 만나게 되는 여인들은 상식을 벗어나 참으로 자유분방하다. 그 중 한 명은 스스로 창녀의 길을 택했던 여성이다. “시골 여자로서는 스스로 사람을 듣고 보기 어렵다. 오직 창녀는 영웅호걸을 많이 보니 가히 마음대로 고를 것이다.” 유가의 입장에서 보면 파천황(破天荒)의 궤변이다. 양소유는 그 ‘자유’ 여성을 받아들인다. 여성도 마음에 드는 남성을 고를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입장이다.
 
양소유는 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우고 황제의 누이와 혼인할 처지가 된다. 하지만 그는 양가집 규수와 이미 약혼한 처지라, 공주(황제의 누이)와 혼례를 올릴 수 없다고 사양한다. 감히 왕권에 대한 거역인 셈이다.

권력의 배치구도를 ‘흔들어보는’ 불순한 시선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도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기특한 공주는 본처의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도 양가집 규수에게 첫째 자리를 양보한다. 자기보다 인품이 뛰어나고 나이도 한 살 많으니 신분과는 상관없이 당연히 형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를 둘러싼 옥신각신이 작품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왕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금방이라도 양소유의 지위와 목숨이 달아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장면의 연속이다. 그 ‘불순함’을 ‘정당함’으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 작가가 동원하는 문학적 장치는 주도면밀하다. 권력의 기분을 달래고 어루만지느라 바쁘기만 하다. 왕권사회에서 ‘평등’을 설파하기란 그만큼 어렵다.

신분이 서로 달랐던 양소유의 여인들은 또한 서로를 ‘형제자매’로 칭한다. 지기(知己)와 동지(同志)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로도 들린다. 불전(佛殿) 앞에서 여덟 여인은 함께 아뢴다. “제자 여덟 사람은 각각 다른 곳에서 나서 자라났으나 한 사람을 섬겨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유컨대 한 나무의 꽃이 바람에 날려 궁궐에 떨어지고, 혹은 규중에 떨어지고, 혹은 촌가에 떨어지고, 혹은 길거리에 떨어지고, 혹은 변방에 떨어지고 혹은 강호에 떨어졌지만 근본을 찾으면 어찌 다름이 있으리오?” 그 한 사람이 굳이 남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옹졸한 해석일 것이다. 만인평등을 그린 아름다운 표현이다.

서포 김만중(1637-1692)이 남해(南海) 유배 시절에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구운몽>은 이처럼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흔히들 자유, 평등, 형제애를 프랑스혁명(1789년)의 3대 이념이라고 말하지만, 김만중은 100년을 앞질러 그 이념을 <구운몽>(1689년)에 담아놓았던 것이다. 독자들이 그 울림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구운몽>이 한국문학으로서는 드물게 7개 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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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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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여행가로 잘 알려진 한비야. 그는 이제 단순한 여행가의 삶에서 벗어나 전 세계 재난의 현장에서 몸으로 뛰는 실천의 삶을 살고 있다. 굳이 직책을 말하자면,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의 긴급구호 팀장이다.  

   그가 처음으로 파견된 곳은 아프가니스탄이다. 탈레반이 물러갔는데도 그곳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부르카’를 쓰고 다닌다. 나중에 탈레반이 다시 득세하면 지금 부르카를 벗고 다닌 사람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에서이다. 한비야는 그 부르카를 대신 입어본다. 눈 부분만 그물망처럼 뚫어놓고 나머지는 몽땅 가렸기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렵다. 멀미가 난다. 폐쇄공포증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을 짓누르고 있는 이중 삼중의 억압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구호현장의 곳곳은 지뢰지대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묻힌 지뢰의 수는 1천만 개 이상. 지뢰 하나를 묻는 데는 5달러이지만 하나를 제거하는 데는 1천 달러가 든다. 그 비싼 지뢰 옆에서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다.    

     아프리카로 간 한비야. 월드비전의 현장 매뉴얼에는 에이즈 감염이 의심되는 아이들을 안아주지 말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좋아서 안겨드는 아이들을 피할 수는 없다. “만에 하나 죽게 된다고 해도 아쉬울 것 없다. 그럼 긴급구호요원이 사우나나 하다 죽으랴? 현장에서 일하다 장렬히 전사해야 마땅하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학교 건설을 위해 파견된 한비야. 현장에 가서 보니 분쟁의 원인은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교 간의 대립 때문은 결코 아니다.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분쟁의 시작과 끝은 무어라 해도 땅 때문이다!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이 ‘문명의 충돌’이니 어쩌니 하면서 현실을 호도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알고 보면 무자비한 땅 뺏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장 경험은 모든 어설픈 ‘설’을 박살낸다. 

   북한은 그가 방문한 93번째(!) 나라이다. 개마고원의 씨감자 재배현장을 방문하기 위해서이다. 씨감자 재배지역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감자꽃의 파도가 밀어닥친다. 차로 한 시간을 가도 그 물결은 그치지 않는다. 감자꽃의 바다에 뗏목을 타고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다. 

   그곳에서 한비야는 의외의 사실을 알고 반가워한다. 감자 4백만 톤이면 식량 부족분이 해결되는데, 지금 남과 북은 3-5년 안에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균 씨감자의 대량 생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태껏 북한의 식량난 해결은 불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그 씨감자가 장차 전국의 밭으로 옮겨지게 되면, NGO 민간단체 수준의 지원으로는 턱도 없다. 대규모 비료 지원 등 민족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그가 이처럼 전 세계 재난의 현장을 뛰어다니는 이유는? 일이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엄마 아버지의 딸, 한국의 딸로만 머물고 싶지 않다. 한국은 말하자면 그의 ‘베이스캠프’일 뿐이다. 이왕 세상에 태어나고 세상으로 나섰으니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서 온 세상의 딸이 되고 싶다. 늘 집 떠나서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다.  

   IMF 때보다도 더 어려웠다며 말이 많았던 지난 한해(=2004년) 동안 월드비전 모금액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대기업이나 고액기부자는 줄었다. 요컨대 개미 군단의 후원자들이 엄청 늘었기 때문이다. 10만 명의 후원자 가운데 대부분이 한 달 수입 2백만 원 이하이다! 이 기록만 보더라도 한비야가 어디를 보고 뛰어다니는지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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