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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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운몽>(김만중 지음, 민음사)

신심 깊은 수행승이 미녀들을 보고 잠시 욕심을 품었다가, 그 벌로 속계에 다시 태어난다.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고 또 두 명의 처 그리고 여섯 명의 첩과 더불어 즐거운 인생을 누렸는데, 알고 보니 그게 하룻밤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스토리이다. 얼핏 보기에 욕망과 권세란 허무할 뿐이라는 그저 그런 설교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꿈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이어지며 전개되는 일장춘몽(一場春夢),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은 하나의 베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 베일 뒤로는 당대 조선의 첨예한 계급구조, 남녀차별, 권력배치의 문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작품의 배경이 중국의 당나라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탄압을 피하기 위한 작가의 자기 검열로 보인다.

주인공 양소유가 만나게 되는 여인들은 상식을 벗어나 참으로 자유분방하다. 그 중 한 명은 스스로 창녀의 길을 택했던 여성이다. “시골 여자로서는 스스로 사람을 듣고 보기 어렵다. 오직 창녀는 영웅호걸을 많이 보니 가히 마음대로 고를 것이다.” 유가의 입장에서 보면 파천황(破天荒)의 궤변이다. 양소유는 그 ‘자유’ 여성을 받아들인다. 여성도 마음에 드는 남성을 고를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입장이다.
 
양소유는 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우고 황제의 누이와 혼인할 처지가 된다. 하지만 그는 양가집 규수와 이미 약혼한 처지라, 공주(황제의 누이)와 혼례를 올릴 수 없다고 사양한다. 감히 왕권에 대한 거역인 셈이다.

권력의 배치구도를 ‘흔들어보는’ 불순한 시선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도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기특한 공주는 본처의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도 양가집 규수에게 첫째 자리를 양보한다. 자기보다 인품이 뛰어나고 나이도 한 살 많으니 신분과는 상관없이 당연히 형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를 둘러싼 옥신각신이 작품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왕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금방이라도 양소유의 지위와 목숨이 달아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장면의 연속이다. 그 ‘불순함’을 ‘정당함’으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 작가가 동원하는 문학적 장치는 주도면밀하다. 권력의 기분을 달래고 어루만지느라 바쁘기만 하다. 왕권사회에서 ‘평등’을 설파하기란 그만큼 어렵다.

신분이 서로 달랐던 양소유의 여인들은 또한 서로를 ‘형제자매’로 칭한다. 지기(知己)와 동지(同志)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로도 들린다. 불전(佛殿) 앞에서 여덟 여인은 함께 아뢴다. “제자 여덟 사람은 각각 다른 곳에서 나서 자라났으나 한 사람을 섬겨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유컨대 한 나무의 꽃이 바람에 날려 궁궐에 떨어지고, 혹은 규중에 떨어지고, 혹은 촌가에 떨어지고, 혹은 길거리에 떨어지고, 혹은 변방에 떨어지고 혹은 강호에 떨어졌지만 근본을 찾으면 어찌 다름이 있으리오?” 그 한 사람이 굳이 남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옹졸한 해석일 것이다. 만인평등을 그린 아름다운 표현이다.

서포 김만중(1637-1692)이 남해(南海) 유배 시절에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구운몽>은 이처럼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흔히들 자유, 평등, 형제애를 프랑스혁명(1789년)의 3대 이념이라고 말하지만, 김만중은 100년을 앞질러 그 이념을 <구운몽>(1689년)에 담아놓았던 것이다. 독자들이 그 울림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구운몽>이 한국문학으로서는 드물게 7개 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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