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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조너선 프랜즌 지음, 공보경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5월
평점 :
인물별 역사와 사건들을 생생하게 드러내면서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핍이라고 생각했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등장인물이 서로 자신이 주인공임을 아우성치며 주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생생하게 과거와 현재와 앞으로 그려질 미래까지 유기적으로 그려냈다.
핍은 감정기복이 너무 심하고 심각한 애정결핍이 있으며 정신나간 어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우울함이 있는, 정말 친구로 사귀고 싶지 않은 유형이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에 보여준 현명한 선택들은 그녀가 드디어 부모님의 굴레에서 벗어나 본인만의 도덕적 기준을 만들어나갈 것임을 보여준다.
모든 등장인물들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안드레아스 볼프일것이다. 동독 시대에 어긋난 사회분위기 속에서 삐뚤어진 사랑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시대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탄생의 피해자이다.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칠 본인의 이미지를 걱정하는지 불쌍할 정도였다. 사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에 표면적인 자아를 신경쓰기는 해도 그처럼 내면의 불안에 시달리며 본인의 위대한 이미지에 신경쓰는것은 그의 역겨운 성적관념과 별개로 동정심이 들게 했다. 선라이트 프로젝트로 인해 그의 정체성이 인터넷이라는 깊고 넓은 정보의 세계로 동일시되며 결국은 내면적 살인마마저 일깨우게 되며 광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는건 자아가 무너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표시가 아닐까 싶다. 그에게 따르는 여러 운 좋은 사건들도 결국은 그의 피해망상적인 생각, 편집증, 끊임없이 여자들이 자기를 구원해줄거라는 헛된 망상으로 인해 모두 덧없어져 버리고 만다. 마지막 그의 진심과 겉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다른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결국 그가 바란건 믿음과 구원이었다.
애너벨과 톰의 사랑이야기를 읽으며 내 정신이 나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만큼 재미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둘이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뿐이었는데 다 읽고나니 톰이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더욱 확실하게 느꼈다. 정신나간 여자와 필요이상으로 책임감이 발달한 남자가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지 간접체험한 기분이다.
전체적으로 인간이 인간에 의해 구원될 수 있는가란 질문을 각자의 입장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애너벨은 본인이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핍에게, 톰은 애너벨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레일라에게, 볼프는 아나그레트와 핍에게 구원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따라야하고, 믿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사랑과 믿음은 동의어가 아니다. 이 둘이 비로소 일치될 때, 서로가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게 아닐까? 톰과 레일라처럼.
부모 자식간, 친구, 연인 등 관계를 수식하는 모든 정의들을 지워버리고 그저 한 점끼리의 연결로만 관계를 인식한다면 어쩌면 참 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저마다 다른 방향과 이상으로 인해 우리는 누군가에게 공감을 하기도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관계의 본질 아니겠는가. 누군가가 날 구원해주기를 바라지 않고,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을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으로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좋은게 아닐까 싶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그 누군가를 믿는 것보다 힘들지 않을 때,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