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인가를 믿는 것에는 적절한 공기가 필요한 법

중세시대의 수도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다만 당시의 신학적인 논쟁이 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정말 그 당시에는 그랬는지 궁금할정도로 인물들이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말을 하기 때문에 스릴감은 조금 떨어진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전체적인 흐름과 종국의 결말을 이해하기에는 중요했다.

왜 살인이 벌어졌는가? 1차적으로 느끼기에는 사랑과 진리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느껴졌지만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폐쇄성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호르헤 수도사는 희극적 요소와 웃음이 진리를 추구하는 엄중한 분위기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신의 섭리를 받들어야 하는 한낱 인간으로서 위대한 존재의 말씀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희극적 요소로 발현되는 카타르시스와 웃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웃음은 신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희극과 같이 불행한 일과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말씀을 따르게 되면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영적고통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영적계몽을 이끌어야 하는 수도사의 입장에서 그런 불경한 것들을 타파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무섭게 느껴진다.

자신은 그저 신의 도구로서 신이 내려주신 진리를 합리적으로 지키기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그의 고백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 오랜 세월 그렇게 믿기까지 얼마나 많은 독을 속에 품고 살았을지 가늠이 안된다. 신념이 광기가 될 때 인간이 얼마나 맹목적일 수 있는지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런 인물을 접할 때마다 신기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도 종교가 있지만 일상생활이 힘에 부칠 때 잠시 기대는 수단이지 맹목적으로 하나의 진리만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되면 아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파괴되는것 같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에 집착하는 것인가? 진리가 절대적일 것이라는 집착과 자신이 진리를 수호하는 자라는 자의식의 비대함, 공동체로서 진리를 보호하겠다는 폐쇄성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이 과연 그들이 믿는 신이 원하는 것일까? 신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하고 왜 굳이 하나의 해석에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웃음이 신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파괴해서 종국에는 세상에 혼란만을 가져올거라고 믿는 호르헤와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똑같다. 인간이 신 앞에서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신의 수호자라는 광기가 그들의 눈을 가렸다. 서로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공동체로서 그런 광기가 흘러가게 놔두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파괴할 진정한 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파이의 유산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을 더듬어 마침내 도착한 곳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의 후속편이다.
다만 전작의 긴박함과 스릴감을 따라가기보다는 2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설정에 따라 덤덤하게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가 늘어지는 것 같고 지루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날려버린건 마지막의 속도감과 의미 때문이었다.

흔히들 스파이를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매체에서 그러한 스파이의 삶과 고뇌, 갈등을 다뤄왔지만 존 르 카레가 다루는 스파이의 삶은 다른 것들보다도 더 깊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실감 덕분인 것 같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소환되는 기억과 경험들이 옛 보고서를 통해 재현되고, 과거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사건의 속도와 스릴이 떨어지긴 했다. 또한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선택과 생각들이 제대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스파이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자기합리화가 곳곳에 깔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작가가 고도로 설정해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냉혹하게 타인을 재단하고 처리해야 하는 세계에서 어떤 편에 서야하는지 결정해야 한다면 이성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파이의 세계란 자신들만의 이성과 자기합리화가 동시에 통용되는 곳이다.

다만 그것은 그들의 입장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이성을 가장한 자기합리화도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이념이 대립하여 서로를 살육하는 시대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던가. 조국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까지 바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국의 배신으로 인한 죽음 뿐이었다면 어느 누가 복수를 하고 싶지 않겠는가. 또한 그렇게 죽어버린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다 처단하고 싶을 것이다.

비극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앨릭은 조국이 나에게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이용만 당하다 죽어버렸다. 앨릭은 본인이 체스판의 장기말처럼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의 허망함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죽음을 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보고서를 통해서도, 자신의 기억을 통해서도, 관련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비밀과 위선 밖에 없다. 어떻게 한스문트가 영국 정보부를 위해 일하는 첩자가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인물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낱낱이 밝혀질수록 남는건 돌고 도는 회한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스마일리와 하는 대화가 전작과 이번 작품의 주제의식을 한번에 정리하면서도 일련의 지루함을 날려버려 통쾌했다. 결국 스마일리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이 최상급자인 컨트롤의 작전에 동참했고, 그가 주도하긴 했지만 암묵적으로 앨릭과 그의 부하들을 죽이는 일에 동의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내가 정하지 않은 길로 갔다고 해서 그 앞에 위태롭게 걸어가는 친구를 바라만 보고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들, 그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한들, 희생자들의 무덤 앞에서 얼마나 떳떳할 수 있겠는가? 스마일리와 주인공의 대화는 그들이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된다기보다, 역설적으로 그들 또한 장기판의 말들로 살아가며 동료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뜻으로 읽혔다. 앨릭은 그렇게 사는 것에 회한이 느껴져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최고로 지켜야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해보게 됐다. 조국, 사랑, 자유, 행복, 가족, 나 자신, 돈 등등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만들든 후회할 만한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가는 길의 마지막이 후회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의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 관점(自)에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自知)에서만 본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이것은 저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여 이것을 (혜시惠施는) "저것과 이것의 모순 이론‘ 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生과 사진, 사와 생 그리고 가와 불가不可, 불가와 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모순 관계에 있다. 가가 있기에 불가가 있고 불가가 있기에 가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不)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亦因是),
- P3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강의

논의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란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강의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피식민지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 P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