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의 유산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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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마침내 도착한 곳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의 후속편이다.
다만 전작의 긴박함과 스릴감을 따라가기보다는 2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설정에 따라 덤덤하게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가 늘어지는 것 같고 지루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날려버린건 마지막의 속도감과 의미 때문이었다.

흔히들 스파이를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매체에서 그러한 스파이의 삶과 고뇌, 갈등을 다뤄왔지만 존 르 카레가 다루는 스파이의 삶은 다른 것들보다도 더 깊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실감 덕분인 것 같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소환되는 기억과 경험들이 옛 보고서를 통해 재현되고, 과거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사건의 속도와 스릴이 떨어지긴 했다. 또한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선택과 생각들이 제대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스파이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자기합리화가 곳곳에 깔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작가가 고도로 설정해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냉혹하게 타인을 재단하고 처리해야 하는 세계에서 어떤 편에 서야하는지 결정해야 한다면 이성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파이의 세계란 자신들만의 이성과 자기합리화가 동시에 통용되는 곳이다.

다만 그것은 그들의 입장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이성을 가장한 자기합리화도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이념이 대립하여 서로를 살육하는 시대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던가. 조국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까지 바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국의 배신으로 인한 죽음 뿐이었다면 어느 누가 복수를 하고 싶지 않겠는가. 또한 그렇게 죽어버린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다 처단하고 싶을 것이다.

비극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앨릭은 조국이 나에게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이용만 당하다 죽어버렸다. 앨릭은 본인이 체스판의 장기말처럼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의 허망함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죽음을 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보고서를 통해서도, 자신의 기억을 통해서도, 관련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비밀과 위선 밖에 없다. 어떻게 한스문트가 영국 정보부를 위해 일하는 첩자가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인물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낱낱이 밝혀질수록 남는건 돌고 도는 회한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스마일리와 하는 대화가 전작과 이번 작품의 주제의식을 한번에 정리하면서도 일련의 지루함을 날려버려 통쾌했다. 결국 스마일리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이 최상급자인 컨트롤의 작전에 동참했고, 그가 주도하긴 했지만 암묵적으로 앨릭과 그의 부하들을 죽이는 일에 동의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내가 정하지 않은 길로 갔다고 해서 그 앞에 위태롭게 걸어가는 친구를 바라만 보고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들, 그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한들, 희생자들의 무덤 앞에서 얼마나 떳떳할 수 있겠는가? 스마일리와 주인공의 대화는 그들이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된다기보다, 역설적으로 그들 또한 장기판의 말들로 살아가며 동료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뜻으로 읽혔다. 앨릭은 그렇게 사는 것에 회한이 느껴져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최고로 지켜야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해보게 됐다. 조국, 사랑, 자유, 행복, 가족, 나 자신, 돈 등등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만들든 후회할 만한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가는 길의 마지막이 후회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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