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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그리는 사람 ㅣ 내일의 나무 그림책 10
산드라 시에멘스 지음, 아만다 미항고스 그림, 문주선 옮김 / 나무의말 / 2026년 1월
평점 :
인간은 글자가 있기 전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려 했습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소망이었던 적도 있고, 집단적 염원과 교육을 위한 목적이었을 때도 있었지요. 호모 나랜스(Homo Narrans)―'이야기하는 인간'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 진화 과정에서 증명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석기 동굴벽화에서 시작해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기록하고 남기려 하니까요.
오늘 소개할 그림책은 이러한 이야기 기록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틀라쿠일로에 관한 책입니다.

원제는 <MI PAPÁ ES UN TLACUILO>(우리 아빠는 틀라쿠일로예요)이고 우리말로는 <이야기를 그리는 사람>으로 옮겼네요. 이야기를 쓰거나 적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그래서 더 궁금해지죠?
표지 그림도 묘합니다. 루브르 박물관 고대 이집트관에 전시된 <앉아 있는 서기상>처럼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습니다. 손은 새를 향해있고, 가슴 속에는 나비들이 가득합니다. 뒤표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아빠는 틀라쿠일로예요.
아빠가 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요.
틀라쿠일로는 이야기를 그리는 사람이거든요.
나도 어른이 되면 틀라쿠일로가 될 거예요.

책의 화자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아빠가 하는 일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이야기를 그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을 하는 아빠라니! 아이는 자신도 어른이 되면 틀라쿠일로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틀라쿠일로가 도제식으로 전승되는 직업임을 알 수 있어요.
틀라쿠일로(Tlacuilo)는 나와틀어(Nahuatl, 아즈텍인들이 사용한 언어) 동사 틀라킬로아(tlaquiloa)에서 유래한 말로, '화가-서기(painter-scribe)'를 뜻합니다. 그림책의 제목처럼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을 말해요.

틀라쿠일로가 되기 위해 아이는 아침이 열리듯 귀를 한껏 열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습니다. 밤이 되면 눈이 아플 정도로 늘 눈을 크게 뜨고 아빠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죠.
아이는 이야기가 '투명한 나비 같다'라고 말합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 날아가 버리는 이야기. 여기서 끈으로 연결된 나비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순간 날아가 버리는 이야기를 붙잡고 그것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틀라쿠일로'를 표현한 것이죠.
무슨 이야기인지 잘 들으려면 아빠처럼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고 아이는 말합니다. 틀라쿠일로는 그저 그림을 그리는 예능인이 아닌 지식과 정보를 가진 존경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스러운 책(코덱스: 고대 서적 형태)에 이야기를 그릴 수 있었지요.

<이야기를 그리는 사람> 속에는 인문학적 정보도 가득합니다.
이야기하는 아이는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나와 형제자매들 모두 '멕시카'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멕시카(Mexica)는 흔히 아즈텍(Aztec) 제국을 건설한 중앙 멕시코의 민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멕시카라 불렀고 수도는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이었으며, 나와틀어를 사용하며 정교하고 강력한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아즈텍'이라는 명칭은 19세기 유럽 사학자에 의해 대중화된 것으로, 오늘날 멕시코에서는'메시카 제국'으로 부르는 추세라고 하네요.
많은 사람들이 아즈텍 문명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인신 공양을 하는 미개하고 피에 굶주린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대규모 도시, 무상 교육, 천문학·수학, 계획 농업을 가진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책에는 그 중 하나인 달력이 언급됩니다. 화자인 아이는 '악어의 날, 바람의 날, 뱀의 날, 사슴의 날, 토끼의 날, 물의 날, 개의 날…… 하루하루에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포날포왈리(tonalpohualli) 같은 ‘260일 성스러운 달력’의 날 이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루하루에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말은 날짜를 단순히 숫자로만 세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날 이름’을 붙여 우주의 질서, 자연과 신들을 시간에 투영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림책 속 아빠와 함께 나누는 초콜릿 한잔에서도 우리는 고대 아즈텍 문명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카카오의 원산지가 바로 메소아메리카 지방이기 때문이죠. 고대 마야인들은 카카오를 재배한 최초의 사람들이고 카카오를 신의 선물이라고 여겼습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필수적으로 사용하던 신성한 음식이었으며, 카카오를 화폐로 쓰기도 했답니다.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검은색과 빨간색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을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멕시코의 상징이자 중요한 식량, 문화적 요소인 멕시코 백년초 노팔(Nopal)이 담겨 있습니다. 멕시코 국기와 동전에 등장할 정도로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선인장이죠.

그들의 전통적인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아모쉬틀리(Amoshtli)는 나와틀어로 '책' 또는 '두루마리'를 의미하고, 아마테 종이나 사슴 가죽으로 책을 만든다고 설명해요. 좋은 틀라쿠일로는 이야기를 그릴 종이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아마테 나무껍질을 잿물에 넣어 삶고, 깨끗이 씻은 다음 나무판 위에 펼쳐 놓은 후 얇게 돌로 두드립니다. 흙빛이 되면 종이가 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좋은 종이에서 이야기는 길고 달콤한 꿈을 꾼다는 표현은 참 멋집니다.
틀라쿠일로는 사제나 현자들이 하늘에서 읽은 것들도 기록합니다. 언제 달이 해를 가려 낮이 어두워질지, 왜 별이 자리를 옮기는지, 언제 옥수수를 심어야 하고 비는 얼마나 오래 내릴지…… 하늘의 이야기를 옮기기도 하고요.
개미들이 줄지어 가듯이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조심조심 이야기를 그림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이야기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어야 하는 틀라쿠일로. 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이야기를 마음속에서 소화하고 체화해 문화적·정신적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 깊은 곳까지 이야기를 곱씹고 마음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만이 진짜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적 성찰을 통해 공동체의 진정한 기억으로 승화시켜 후대에 전함을 뜻합니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든 아마테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며 역사·신화·의식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단순 기술이 아니라, 아즈텍 정신을 영원히 이어가는 성스러운 의무였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틀라쿠일로는 이야기의 영혼을 담아냈겠지요.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리는 틀라쿠일로. 그들의 모든 것을 담은 <이야기를 그리는 사람>은 아이들의 그림책이라는 경계를 넘어 문화와 정보를 담은 인문학 도서로 느껴집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히 개인적 기억만으로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이야기, 국가의 이야기, 인류 전체의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져요. 단군신화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만들었고, 조선왕조실록이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했으며, 마야 코덱스가 문명의 기억을 보존했듯이, 이야기는 집단의 자아 인식을 만드는 기초입니다.
단어 하나, 그림 한 장이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기억되며, 그 기억이 문화가 되고 문화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도, 우리가 이해하는 현재도, 결국은 누군가가 남긴 이야기를 통해 형성됩니다.
틀라쿠일로처럼 개미가 먹이를 나르듯 조심스레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는 일은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산드라 시에멘스와 아만다 미항고스의 <이야기를 그리는 사람>은 바로 그 정신을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전하는 그림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도 이야기를 지키는 법을 만나보셨으면 합니다.

*본 서평글은 나무의말 출판사에서 진행한 서평단 모집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