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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점 - 제5회 사계절그림책상 수상작 ㅣ Dear 그림책
이량덕 지음 / 사계절 / 2025년 9월
평점 :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죠?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일단 시작하면 절반은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정치학(Politics)>에서 여러 차례 인용한 "Well begun is half done"에서 유래했고, 이전부터 널리 전해 내려온 속담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책은 시작이 반이 아니라 시작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일상 속 찰나를 스치는 소소한 시작점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거든요.

앞표지에는 그림을 해치지 않게 작은 글자로 "제5회 사계절그림책상 수상작"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계절그림책상'은 참신한 그림책 창작자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사계절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국내 창작그림책상입니다. 2019년을 시작으로 대상과 우수상 등을 선정해 왔는데, 이량덕 작가는 대상작이 없었던 제5회 사계절그림책상(2024년)에서 <어떤 하루,>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 2025년 9월, <시작점>으로 출간되었어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다는 이량덕 작가의 작품 속에는 특유의 간결함과 단순함이 녹아 있습니다. 시각언어가 돋보인다는 것이 특징인데요, 단순화한 이미지는 간결한 문장과 조화를 이루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이번 <시작점> 역시 전작<나는 아주 작아>처럼 아주 작은 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일상 속 평범한 순간의 '처음'과 '시작'이라는 순간들에 집중했어요.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손잡이인 '작은 점'을 잡고 문을 열면 아침의 밝은 빛이 집 안으로 들어옵니다. 문을 연 이에게 손잡이인 작은 점은 아침을 여는 시작점이 됩니다. 화분 속 작은 씨앗(점)은 뿌리와 잎을 내고 노란 꽃(혹은 열매)을 맺어 우리에게 봄을 느끼게 해요. 뻐꾸기(? 혹은 아침을 깨우는 수탉을 닮은!) 시계는 우리에게 일어날 시간, 일하는 시간, 점심시간, 퇴근시간, 잠들 시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가끔은 흘러간 시간을 되짚으며 후회의 시작점이 될 때도 있습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순간이죠. 비 오는 소리를 담는다는 것은 사색의 시작점일까요? 아니면 변하고 있는 계절의 시작점?! 우산 손잡이 위치에 동그랗게 달린 것은 떨어지는 빗방울의 울림에 따라 소리를 낼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우산이 담은 빗소리를 증폭시키는 스피커일 수도 있겠네요. 이렇게 작가님이 남긴 글과 그림을 해석하고 상상하며 각자의 시각에서 '시작점'에 이야기를 더할 수 있습니다.
분수에서 갑자기 물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거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형상이 좌우 대칭이 되지 않거든요.) 서로를 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군가에게 목걸이가 걸리거나 왼쪽 약지에 반지가 끼워지는 순간, 양초에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순간, 또 말이 멈추는 순간까지 담았는데요, 특히 아래 장면은 사람의 목소리 파형을 여러 단어와 문장들로 나열해 타이포그라피로도 나타냈습니다. "김도율, 도율 귀여워"로 시작해서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로 이어지던 소리는 "도율 사랑" 이후 마무리 되네요. 소리의 이미지화, 그림책이라 누릴 수 있는 장면이죠.😉



휑한 머리를 가진 콧수염 아저씨에게 하나의 모근에서 나온 두 갈래의 머리카락은 어떤 시작점일까요? 생각이나 마음을 남거나 지우는 연필은요? 시소의 평행 상태가 깨지는 순간, 저글링하는 곡예사가 균형을 잃는 순간, 종이 비행기 접기에서 첫 모서리를 접는 순간과 여행캐리어를 끌고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고 여행지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깐까지... 그림책 <시작점> 속에는 수많은 처음, 출발점, 시작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첫 장면에서 집 안으로 '아침을 들인' 문은 여전히 열린 채 이야기가 마무리 되죠.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평범한 하루, 평범한 순간, 한 점 한 점 담다 보니,
아무것도 아니던 것에서 어떤 점을 발견했어요.
어느 날엔 아무것도 아니게 흘러간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조용한 시작점이 될지도 몰라요.
<시작점> 판권면 속 이덕량 작가의 말
뒤표지에는동그라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이야기 속에 반복해서 등장한 점들의 확대판, 집합판으로 보였어요.
책 속에는 수많은 시작점들이 모여 있고, 개개인들이 체감하는 시작점들이 모여 이 세상을 채워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단순하게 넘길 수 있는 뒤표지도 의미를 부여하며 보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나를 채운 시작점들, 일상을 채운 영감의 순간들에 점을 찍고 기록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제되고 추상적인 그래픽 이미지들로 가득한 <시작점>은 단순한 점 하나로 수많은 상황을 마주하게 하고, 독자 스스로 이야기를 떠올리며 상상하며 다시 한번 그림책의 매력에 빠지게 만듭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평범한 하루, 사소한 순간 하나하나가 모여 세상이 되고, 작은 점이 희망과 용기로 발을 떼어 변화를 불러 옵니다. 그 발단이 되는 자기만의 '시작점'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시작점> 속에 담겼어요. 놓치고 지나쳤던 수많은 ‘시작점’을 발견하고 싶은 분들, 용기 내어 새로운 시작점을 만들고 가고 싶은 분들께 추천해 드리며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본 서평글은 사계절출판사에서 진행한 서평단 모집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