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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 -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예담 / 2013년 12월
평점 :
책 제목에서 '에르미타'라는 용어가 낯설었다. 잠시 지명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책의 앞부분에 친절히 설명되어 있다. '에르미타'는 일반적으로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일부는 여행자나 세상을 등지려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곳도 있다고 한다.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이라는 의미를 간직한 곳, 종교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신자들이나 세상을 등지고자 했던 사람들 혹은 여행자들이 바람과 추위를 피해 잠시 머물며 다음 여정을 마음에 새기던 곳을 일컫는 말이다. - P26

'에르미타'는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에 흩어져 있는 곳으로 은둔자나 수도자가 생활한 작은 집 또는 성당 같은 곳이다. 때로는 세월의 흔적만 남기도 하고, 잘 보존되어 멋진 위용을 과시하는 곳도 있었다. 이 책의 '에르미타'를 촬영한 벨기에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는 자연과 인류의 정신적 발자취를 자신의 작업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았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에르미타'를 '중세시대의 암자'라 표현했다. 그리고 사진과 책을 쓴 저자 지은경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자이자 에디터로 세바스티안 슈티제와 함께 스페인의 혹독한 겨울을 함께 하며 '에르미타'를 찾아가는 길에 동참하였다. 에르미타 익스프레스라는 승합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에르미타의 진면목을 보기 위한 기다림은 마치 수도자를 연상시킨다.
세바스티안이 일곱번의 겨울을 에르미타에서 보내며 촬영을 하게 된 것은 575채 에르미타 사진을 찍은 곳 중 단 한 곳에 살고 있는 은자에 의해 영감을 받아서 였다.
"내게는 그것이 에르미타 촬영에 대한 아이디어의 출발점이었고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에르미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에 큰 영감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소비와 물질주의에 굶주린 현대 노예의 운명에 저항하는 조용한 혁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모든 현대 기술을 던져버리고 가장 원시적인 사진 장치인 핀홀 카메라를 선택했다." -P10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의 종교는 어떠한 모습일까. 물질 중심의 세상에서는 그 어느 곳을 가더라도 물질이 우선이 된다. 으리으리한 교회나 성당이 신앙을 위한 장소라 하지만 가끔은 과연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천원 정도의 한끼를 못 먹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중세시대 부패했던 종교는 그로 인해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그것에 대한 회의자들이 신앙의 순결을 찾아 은둔자가 되어 그들만의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들의 흔적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빈자의 교회를 위해 빈자의 카메라인 핀홀카메라로 에르미타를 촬영한다. 그리고 맑고 푸른 하늘은 에르미타를 제대로 연출할 수 없다하여 꼭 구름낀 날을 고집하고, 심지어 눈이 내리기를 세바스티안은 고대한다. 그 마음으로 일곱번의 겨울을 에르미타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은 그런 인생의 한 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적절한 만남과 헤어짐이 있기에 긴 시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고
또 짧은 만남의 시간들을 추억하며 살아갈 수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기쁨,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지만
사람은 미래를 향한 황홀한 꿈과 또 그만큼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된 과거를
디딤돌 삼아 현재를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여행하는 내내 수없이 반복했다." - P234
내가 믿어 왔고, 추구하던 모든 것에 의문을 가져본다. 과연 그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았고, 그 것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내 발자국을 지켜보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 화려하지 않고, 이것이다 라는 명확한 메시지도 없다. 그들이 한 순간을 위해 기다림과 친구하며 만난 에르미타를 함께 느끼며 따라가는 여정은 낮은 울림이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