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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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른보다 더 적은 시간을 살아 더 적은 양의 정보를 접하다 보니 아이들에겐 '절대'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현상이 '나'와 '너'의 상대적 개념의 세상에 살며 '나'와 다른 '너'의 행동에 분노를 느끼거나 경멸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다른 행동에 호기심을 느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미 모든 현상에 '절대적' 믿음을 가진 다수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뜬금없다 여긴다. 그런데 막상 왜 그 호기심이 뜬금없는지 아이에게 설명해 주려는 시도를 하다보면 그제서야 '턱' 하고 막히는 부분이 생김에 놀라게 된다. 왜 항상 절대적으로 이 현상은 이렇다고만 하는지 자신조차도 잘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도 사람은 아이에서 어른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겪으며 자신만이 믿는 '절대성' 이라는 개념을 하나씩 만든다. 그리곤 자신의 절대적 믿음에 반하는 행동엔 분노를 하거나 경멸을 한다. 아니, 한 발짝 더 나아가 동정을 하며 자신과 다른 타인을 계몽(?)시키려 든다. 그러한 계몽주의 현상이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종교전쟁, 문화전쟁이라는 갈등으로 표출되었다.


어쩌면 단순해 보이는 이러한 절대성과 상대성의 개념은 항상 같은 곳에서 같은 민족끼리 공유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전혀' 단순하지 않다. 처음부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공유된 답을 가지고 사는데 상대적인 생각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처음부터 그들에겐 상대성이 필요하지도 내가 절대적인 생각을 가진 채 살고 있다는 의심자체도 불필요하다. 그렇게 나 역시도 나를 둘러싼 절대적 세상에 의식을 고착화하고 있다는 의심도 하지 못한 상태로 요네하라 마리의 저서 <마녀의 한 다스>를 접했다.


처음 <마녀의 한 다스>라는 책의 제목만 보고 '판타지 연애 소설이구만' 하는 나만의 절대적인 생각을 어김없이 발동시켰다. 그런데 책의 저자가 동시통역사라는 것과 이 책이 시중에 널린(내겐 판타지 소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있었다.) 판타지 소설이 아닌 문화 인류학 서적이라는 소개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히려, 판타지 소설 같은 제목이 책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이다. 그렇게 구입해서 읽기 시작한 <마녀의 한 다스>에서 나는 학교에서 활자로만 몇 번이나 보고 외우던 문화의 상대성이라는 개념을 동시 통역사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죽은 활자가 아닌 살아있는 경험으로 처음 접했다. 마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내게 다른 형식으로 깨달음을 준 것이다. 아직도 <마녀의 한 다스>를 읽고 난 후 떠오른 편견, 의심, 상대성, 절대성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이러한 단어를 조합해 <마녀의 한 다스>라는 책이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 해 본다.


그녀의 저서에 담긴 그녀만의 명쾌한 생각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그녀의 문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누군가가 내 옆에서 재미있는 현장 이야기를 해주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시종일관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책을 들고 있는 몇 시간이 몇 분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직업이 전업 소설가인 사람보다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편안하게 읽힌다고 그 속에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작가가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녹여버려 이야기 속 메시지를 찾아 음미하는데 시간을 더 들여야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결코 가볍지 않으나 가볍다 느낄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서 내가 찾은 <마녀의 한 다스>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풀어내 보겠다.



<마녀의 한 다스 이후로 벌써 세 권이나 구입한 요네하라 마리의 저서들>


지나가는 어른 중 누구라도 잡고 타문화에 대한 상대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다면 십중팔구 '나와 다른 문화라고 하더라도 존중 해야지요.' 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은 이러한 상대성의 개념을 체화하고 살아가는 듯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대답이 국제 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세상은 아직도 나와 다른 문화, 종교, 학술에 반감을 표한다. 이러한 반감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면 우리는 가깝게 문명의 충돌이라 일컬어지는 이슬람과 미국의 전쟁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를 이루는 것이 개인이라고 정의한다면 앞에서 문화의 상대성을 체화한 듯 보이는 사람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마녀의 한 다스>에 나오는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 집회 참석 에피소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저자 요네하라 마리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문화권을 자주 접하는 동시 통역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며 그녀의 소녀시절 역시 동구의 프라하에서 보냈다. 그런 그녀에게도 마녀는 판타지에나 나오는 허구이며 한 다스는 12라는 절대적 개념으로 사물을 본다. 그러나 마녀 집회를 참석하며 마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을 만나고 한 다스가 13이라고 주장하는 마녀를 그녀는 만난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이는 곧 조금만 넓은 범위로 생각하면 전혀 다른 여러 사람에서 여러 민족으로 또 여러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람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며 국가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국가만큼의 담론과 민족만큼의 색깔이 존재하고 다양한 개인만큼의 생각이 공존한다는 것을 그녀의 깨달음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은 각각 서로 길하다고 생각하는 숫자도 다르고 흉하다고 생각하는 숫자 역시 다르다. 그렇게 몇천년을 서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다보니 이들의 생각이 이제는 고착화의 단계에 들어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신만의 세계의 절대성만 믿고 살아갔음 조용했을 인류는 교역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이슬람과 기독교과 만나며 흑인과 백인 황인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인류는 이제 본격적으로 서로를 계몽하려는 계몽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여러 가지 달콤한 유혹으로 계몽을 시도하다 최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몽둥이를 서로에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해에 죽어나가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런 현상에 어떻게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길가는 어른들 중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문화의 상대성을 존중 해야지요.' 라는 사회를 사는 우리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실제로는 죽이려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현실을...

 

<마녀의 한 다스>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우리의 이러한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중국집과 중국의 러시아 요리집을 통해서, 기차 칸 내 러시아와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들의 차이에서도, 고래를 잡는 행위엔 분노하면서 인간을 죽이는 전쟁에 대해선 잠잠한 사람들에서 한국과 독일의 분단을 일본인의 시각에서만 바라본 자신의 절대성에서 요네하라 마리는 우리의 절대적으로 고착화된 생각을 보여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이 필요하다는 키워드를 뽑아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듯 책에서 강조하는 상대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고착화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와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선 쉽게 깨달을 수가 없다. 그저 죽은 활자로만 아는 상대성, 지식으로만 아는 상대성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녀의 한 다스>의 요네하라 마리는 교묘하게 자신의 에피소드 속에 편견과 의심이라는 키워드를 숨겨 두었다.

 

대의지하 필유대오 (大疑之下 必有大悟) -큰 의심에 큰 깨달음이 있다.

평소에 나의 모토로 삼고 있는 이 말이 우리의 절대적으로 고착화된 생각에 하나의 해결책이 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심이 있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내가 항상 절대적이라고 믿는 나의 문화에 약간에 의심을 가한다면 곧, 꼭 내가 신봉하는 문화만이 절대선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전에 내가 가진 생각이 일종의 편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쉽게 요네하라 마리의 예를 들어본다면 러시아에서는 그저 그들의 언어문화에 하나인 모스크바시 야키만코 거리가 일본에서는 '구운 보지' 가 되어 버린다. (p.96) 이렇듯 내가 가진 문화가 저쪽에선 아주 우습거나 혐오를 주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자문화를 의심해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절대적 문화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일종의 편견이 될 수도 있다. 편견에는 당연히 의심의 잣대가 드리워져야 하며 그 과정을 거친 후에야 우리는 상대성이라는 소중한 개념을 알게 된다. 상대성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인식하고 인류공통의 가치라는 절대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면 우리가 전쟁의 불안에 떨어야 하는 시대가 사라지지 않겠는가? 인류공통의 가치라고 해도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으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요네하라 마리의 생각처럼 '생리현상은 남녀, 신분계급, 민족,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찾아온다. 인간을 나누는 그 어떤 장벽도 단번에 없애버린다.' 이 개념만을 명심하면 된다. 이 말은 곧, '인류는 누구나 똑같은 살아있는 생명이다' 라는 진리일 뿐이니 말이다.

 

 <마녀의 한 다스> 라는 책은 내게 그저 하나의 지식으로만 존재하던 상대성이라는 개념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로 다가오게 했다. 또, 저자이자 통역가이며 어릴 적 외국에서 산 경험이 있는 요네하라 마리 마저도 어떤 문화적 편견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에 나의 죽어버린 경각심을 일깨웠다. 활자로만 접하던 지식을 생생한 외교의 현장에서 또, 외국에서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인류가 접한 오늘날에 산적한 문제가 상대성 존중의 결여로 발생하는 부분이 크다는 사실을 생생히 느끼게 된다.

  

물론, 모두가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해야하고 그 문화를 다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틀림없이 인류공통의 가치인 생명을 해한다거나 하는 악한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이 우리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저들에게 이식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저들이 주장하는 자신만의 문화에도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들의 사회를 지탱하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문화를 한 순간 외과수술적인 방식으로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결국 그이야긴 지금처럼 전쟁을 하자는 소리 밖에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그러한 문화를 최대한 존중하는 입장에서 인류공통의 가치인 생명을 지키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섣부른 계몽보다는 훨씬 진보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요네하라 마리가 <마녀의 한 다스>에서 여러 에피소드로 말하고자 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요네하라 마리는 자신의 편견과 문화에 대한 절대적 신봉을 무너뜨리려 노력했다는 사실만은 그녀의 에피스도와 생각을 통해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소중한 가치가 남에겐 전혀 다른 의미의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녀가 통역사의 길로 들어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저요, 오르가즘에 달했을 때 본능적으로 아, 아이가 생겼으면, 하고 생각한답니다."(p.260) 라는 말이 그녀의 스승 도쿠나가 하루미 씨에겐 "그 얼굴을 상대로 오르가즘에 이를 때까지 용을 쓰다니, 어떤 남자인지 진짜 장하다!" (p.262) 라는 의미로 변용되는 과정에서 받은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에 절절히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개인이 다른 개인과 상대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개인이 모인 사회가 다른 사회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될 것이고 나아가 국가가 다른 국가와의 차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요네하라 마리가 말하고자 한 진정한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끝으로 글을 읽는 내내 나에겐 충격적인 요네하라 마리의 생각 한 토막을 말하고자 한다.

"인류와 인류가 서로 지동설이 아닌 천동설을 들고 서로를 욕하고 싸우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유쾌한 지금 전 지구가 처한 현실의 정답이 아니겠는가. 진짜 진실인 지동설을 찾는 것은 인류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상대성을 발휘하는 그 날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마치 옆에서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그녀의 뛰어난 필력과 옮긴이의 정성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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