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회적 기업이다 - 사회적 기업 창업과 경영의 모든 것
이나현 지음 / 비엠케이(BMK)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대가 변하면서 사회에서 필요하게 된 기업의 형태도 여러 가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중 우리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에 점차 더 주목하게 되었고,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사회적 기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일반인들은 제대로 된 인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고, 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틀림없이 순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나는 사회적 기업이다>는 독자들에게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해주는 책이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이 어떤 기업 형태인지 또 어떤 사람들이 어떤 목적으로 이 기업 사회에 뛰어드는지를 이 책은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우선, 이 책이 신뢰성 혹은 재미가 있다고 느끼게 되는 지점은 책의 저자가 실제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녹여 낸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을 일종의 학계나 도덕적 필요성에 매몰되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실질적으로 이 기업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기업의 형태가 지속성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아주 근원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에 과연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이 수익성을 내면서 지속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 의문이 있었다.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기업 운영행태라는 것 자체에 굉장한 불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내가 지나치게 세속적이기 때문이 아닌 그러한 행태가 지속성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여실히 입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컸다. 책의 저자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사회적 기업을 안정적으로 정착시켰고, 바로 그 노하우를 책 속에 녹여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책이 읽을 만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뜻이 있으나 그 길을 몰라 가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모두가 수익을 내는 구조 속에 매몰되어 자신이 진짜 바라던 의미있는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정보가 부족해 자신이 가고 싶은 길로 가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정말 좋은 길라잡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여러모로 이 책은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꼭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해보길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곳은 모두의 일장춘몽[一場春夢] 이었다.

 

 

현대 한국사회의 부를 상징하는 강남. 이곳엔 신분 상승의 욕구를 가진 다수 사람들의 꿈이 모인다. 서울특별시 한강 이남의 좁은 이 땅에 자신의 집을 가지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성공의 척도가 되는 곳. 다수의 꿈이 만들어낸 환상의 그곳. 바로 그곳이 강남이다.

 

 

나는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한 작가의 책을 한 번에 모두 읽는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인연이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진 황석영의 책은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황석영의 신작의 제목이 <강남몽>이 아니었다면 작가 황석영과 나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없는 인연도 만들어줄 만큼 황석영의 신작 <강남몽>이라는 제목은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진 수많은 갑을병정의 인간 중 한명인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혼자서 "거 웬만하면 강남에서 멋지게 성공하는 성공 스토리를 그렸으면 좋겠네. 보고 좀 배우게." 하는 이상한(?) 기대를 할 정도였다. 강남이라는 곳에서 성공한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나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것처럼 그런 성공스토리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성공 스토리에 목마르다는 것은 그만큼 그 곳에서 성공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들다는 사실을 반증했다.

강남이라는 그냥 평범한 두 자가 아직 부양할 가족도 없고 산업현장의 일선에서 활약하는 사람도 아닌 나 같은 사람마저도 신분상승의 꿈을 꾸게 하는 마력의 이름인 것이다.

 

 

그렇게 이미 읽기 전부터 수많은 기대를 안고 황석영의 신작 <강남몽>과 접했다. 어디까지나 강남에 방점을 찍고 소설을 읽은 터라 뒤의 몽(夢)이라는 글자는 사족처럼만 느껴졌다. 그런데 소설을 구성한 다섯 명의 주인공의 다섯 가지 강남과 얽힌 이야기를 읽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서서히 강남에 찍힌 방점은 뒤의 몽(夢)이라는 글자에 가서 박히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토록 꿈꾸던(夢) 강남은 그들 존재마저도 집어삼킨 악몽(夢)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에서 그려진 5인 5색의 강남몽은 그렇게 하나의 악몽으로 귀결되었다. 모두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강남이라는 꿈이 그들 5명에게만 그렇게 가혹한 곳이 되어 버린 것일까? 아마 나보다 정확히 45년이나 더 많은 경험을 하며 산 인생의 선배인 작가 황석영은 고작 5명의 사람의 몰락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강남과 얽힌 사연을 통해 나처럼 후대에 새로운 강남 환타지를 꿈꾸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강남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려 했을 것이다. 그의 그런 노력에 조금이라도 부응하기 위해 강남몽에 나오는 5명의 주인공을 뜯어보고 각각의 주인공에서 얻을 수 있는 느낌을 정리해 뒤에 누군가가 필요하면 읽게 해 경계로 삼게 해야 한다는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몽(夢)이라는 글자를 그저 한여름밤의 꿈처럼 부질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에 벗어난 일이 될까봐 두렵기도 하고 나의 <강남몽> 이야기가 지금 강남에 사는 성공한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글로 흐를까 겁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나 단순한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의 원칙처럼 강남이라는 꿈은 수많은 사람의 소중한 꿈이 강남 환타지의 수요가 되어 공급자들의 배만 불려주는 작금의 현실을 보며 소중한 꿈을 강남 환타지에 던져버리는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간절히 빌어본다.

 

 

박선녀- 강남몽에 잠식당한 그녀의 순수한 꿈은 어디에...

 

만일 나에게 강남몽을 읽으며 가장 공감이 가는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박선녀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서민에서 강남에 입성한 사람을 대변했고 또 신분상승의 욕구를 지닌 인간들이 누구나 좋아할만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것이다. 박선녀의 강남 성공 스토리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성(姓)을 이용한 성공 스토리였다. 타고난 몸매와 얼굴을 가졌던 그녀는 여상 삼학년 열아홉살 때 스튜디오의 모델로 캐스팅되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다. 어쩌면 평범한 인생을 살아 갈수도 있었던 그녀가 모델일을 하게 되면서 강남의 유명한 술집 마담인 '조마담'의 눈에 들게 되는 것이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운명의 물꼬는 작정이라도 한듯이 그녀를 화류계로 내몰았고 박선녀는 그곳에서 그녀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을 몸에 익히게 된다. 화류계의 생존 방식은 결국 그녀의 성(姓)을 이용한 것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부동산업자 심남수와의 잠깐동안의 사랑을 지나 그녀처럼 강남몽을 꿈꾸는 김진을 만나 김진의 첩이라는 허울로 살게 되는 것이다. 김진과의 슬하에 자식인 진희와 행복하게 살았다면 나름대로 좋은의미의 강남몽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꿈은 결국 자신의 남편의 회사인 대성백화점이 무너지면서 함께 무너졌다. 마침 둘째 며느리의 생일을 맞아 백화점에 들렀던 박선녀는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그곳에 깔리게 된다. 결국, 마지막엔 죽음을 암시하며 그녀의 강남몽이 사라지는 것이다.

 

 

박선녀의 성공 스토리는 어쩌면 돈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일반 서민들이 성공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일지도 모른다. 일반 서민이 성공하는 길이 박선녀처럼 자신의 성(姓)을 무기화해 신데렐라류의 신분상승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면 더 이상 사회에 기대할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모두가 박선녀와 같은 방식으로 강남몽을 꿈꾸지는 않는다. 그녀의 강남몽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꿈꾼 아름다운 꿈이 아닌 온갖 편법과 수단이 난무한 하나의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부자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손에 넣은 그 순간 그녀는 <박선녀는 집에서 혼자 끼적대며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은 밑반찬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지겨워> (pp17~18) 이와 같은 삶을 동시에 누리게 되었고 결국 차가운 콘크리트 밑에서 어떤 희망의 빛도 보지 못한 채 차갑게 죽어가는 삶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진짜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강남에서 호화롭게 살며 언제올지도 모르는 남편의 첩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꿈꾼 것일까? 배곯지 않고 잘 살아보겠다던 꿈이 이런식으로 끔찍한 꿈으로 변모한 것은 강남이라는 물질의 도시에 자신의 순수한 꿈을 던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녀도 소수의 그들이 만들어낸 강남에 대한 환타지에 자신의 소중한꿈을 던져 강남 환타지의 수요자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지금 박선녀처럼 자신의 소중한 꿈을 맹목적으로 강남입성을 꿈꾸는 강남몽과 혼동하여 강남 환타지의 수요자가 된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기우를 떨칠 수가 없다. 결국엔 소설처럼 강남몽이 자신의 소중했던 꿈을 잠식하고 종국엔 자신의 존재마저 잠식해 들어올 것임을 박선녀를 보며 한번쯤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진- 역사를 살아온 그의 꿈이 고작 강남몽에 지나지 않음은... 그냥... 시시하다.

 

김진이 살아온 인생은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한국 근현대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가 독립군을 잡는 일본순사의 프락치노릇을 한 것이나 해방초기 미군 CIC에 들어가 연락장교 역할을 한 것 등은 그야말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나 볼 수 있었던 사건들의 축소판이었다. 그것뿐인가 제주 4·3사건이나 여순반란사건과 이 과정에서 박정희의 좌익행동 등을 조사한 그의 삶은 해방 전후 한국 근현대사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삶을 산 김진 마저도 박정희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게 되면서 군에서 예편해 새로운 강남몽을 꿈꾸는 신세력이 되었다. 그가 살아온 삶속에서 발견 할 수 있었던 생존에 대한 꿈이 강남 환타지의 수요자가 되어 강남몽에 다가가는 것이다.

 

 

김진의 경우는 강남몽의 수요자인 동시에 강남몽을 판 공급자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는 강남개발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강남에 정착해 사업을 꾸려나갔고 점차 수요자에서 공급자로 그 면모를 변신해 박선녀와 같은 여러 사람에게 강남몽을 판 것이다. 덕분에 막내딸과 몇 살 차이나지 않는 박선녀와 같은 젊은 첩까지 옆에 두고 살았으니 그의 강남몽이 그리 비참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또한, 대성백화점이 붕괴되는 와중에도 그는 안전하게 피신하였고 진짜 사랑했는지조차 의문인 첩 박선녀만 죽음을 맞는 그의 입장에선 어쩌면 천우신조인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천우신조는 어디까지나 그가 강남개발 1세대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강남이 지금처럼 또는 소설의 시점처럼 서서히 과열되기 전에 자리를 잡은 사람으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강남몽의 수요자의 입장보다는 공급자의 입장인 사람이었다. 그가 강남몽을 자신보다 후발주자에게 공급한것은 그의 살아온 삶이 한국의 근현대사와 그 맥을 같이한 웅장한 역사라는 점에 비추어 너무나 보잘것없은 행위였다. 결국, 그러한 행위가 자신의 백화점이 붕괴되는 현실로 다가온다.

 

 

김진을 보고 있으면 이미 과열되어 현실에서 환타지가 되어 버린 강남몽을 수요하고자 달려든 사람이나 공급하고자 한 사람이나 모두 좋은 결말을 맞지 못할 것임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심남수- 간신히 강남몽에서 깬 그의 꿈은 살아있다.

 

강남몽에 나오는 5명의 주인공 중 마지막까지 강남에 집착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심남수일 것이다. 그는 군에서 의병제대를 한 후 경찰 유치장에서 만난 부동산업자 박기섭의 권유로 강남몽을 꿈꾸기 시작한다. 박기섭과 함께한 부동산업은 강남개발의 시기와 맞물리면서 승승장구하는 삶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은 성공의 나날동안 그는 함께 동거하던 여자의 투신자살로 인해 약간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아내도 아닌 여자의 주검을 확인하러 간 병원에서 하룻밤을 잊지 못하던 그는 점차 미친듯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자신이 속한 삶에 염증을 내고 한국을 뜰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결심을 한 이후 박선녀와의 잠깐 동안의 만남을 뒤로 하고 그는 일본유학을 떠난다. 일본 유학의 길로 끝이 없을것만 같은 강남몽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 십년을 보내고 가정을 꾸린 심남섭이 돌아와 보게 된 것은 일시나마 자신과 같은 강남몽의 수요자 박기섭의 몰락이었다.

 

 

강남몽의 다섯 주인공을 분석하며 가장 작가의 의도를 살피기 힘든 캐릭터가 심남수였다. 그의 등장은 강남몽과 함께 한 몰락의 인물이 아닌 오히려 강남몽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가 꾼 강남몽 덕에 그는 남들보다 빠른 성공의 길을 걸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행복한 가정도 꾸리게 된다. 그렇다면 심남수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심남수와 박기섭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너 여길 오래 비워놓으면 확 뒤쳐진다는 걸 잘 알잖아. 다른 데가 일년이면 여기선 십년이다. 시간 속도가 세계에서 젤 빠른 데라니까."> (p.240) 강남이란 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심남수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것은 너무 빠른 속도에서 온 몰락의 경계였다. 그를 둘러싼 주변인물들이 빠른 성공의 지름길인 강남에 대한 무분별한 투자로 일시적 성공을 거두다 그보다 더 빠른 속도의 대가를 치르듯 몰락하는 장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김진 회장의 백화점이 한 순간에 붕괴하는 것이나 그의 백화점안에 있던 박선녀의 회장부인에서 백화점 붕괴 희생자로의 순간적 몰락은 빠른 속도의 성공에 대한 빠른 몰락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빠른 성공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심남수의 일본 유학은 마치 꿈이 깨는 것처럼 강남몽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남수가 가진 젊은 날 강남에서 꾼 꿈은 그의 가슴속에 '실수'라는 단어로 기억된다. 결국, 심남수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것은 빠른 성공을 원하는 수많은 강남 환타지 수혜자들에게 그런 성공의 무의미함을 경고하고 하루라도 빨리 꿈에서 깨어 평범한 그들의 삶으로 돌아갈 것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홍양태- 개와 늑대의 시간. 그의 강남몽은 불투명한 꿈이었다.

 

주먹하나로 서울일대를 점령한 그.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려보는 사나이들의 세계를 여실히 대변한다. 다른 캐릭터들이 양지의 강남을 대변하는 욕망이라면 홍양태 그는 음지의 강남세계를 보여준다. 광주 충장로파의 일원으로 성장하던 그는 그와 동시대에 등장한 강은촌이라는 상대파의 주먹과 라이벌 관계로 성장한다. 항상 광주보다는 넓은 서울진출을 꿈꾸던 그는 이후 서울로 진출하게 되고 서울에서 당시 주먹의 일인자로 군림하던 명동의 진상사를 제거하면서 일약 서울 일부지역의 패권을 잡게 된다. 이후, 어릴적부터 라이벌이던 강은촌이 서울을 진출하면서 둘은 서로를 죽이려고 노력한다. 그런 과정에서 주먹세계의 선배, 후배를 가리지 않고 제거하던 그들은 결국 정권의 이용만 당하다 모두 감방에서 십년이상씩을 보내게 된다. 인생의 일부분을 어두운 감방에서 계속 보내던 그는 출소한 이후 그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느끼고 자신의 후배 현수에게 자리를 양도하고 물러나게 된다. 주먹세계도 다른 어느곳들처럼 권력을 잃은 그를 반기는 곳은 어디도 없다. 현수가 마련해준 얼마간의 돈으로 노름이나 일삼던 그는 결국 후배 현수에게도 귀찮은 존재가 되고 만다.

 

 

음지의 강남몽을 꿈꾸던 홍양태의 이야기는 남자라면 누구나 재미있어 할 만한 소재였다. 그가 활약해 강남을 자신의 발아래 두는 성공스토리는 마치 드라마처럼 재미가 있다. 그러나 그의 강남몽 역시 너무나 비참하다. 자신의 몸 이곳저곳에 상처를 내며 얻고자 했던 욕망은 결국 자신을 파멸시켰다. 정치에 이용당하기만 할 뿐이였고 자신의 형제와 같던 친구들은 서서히 그를 배신해갔다. 결국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옆에 친구라고 할 만한 이는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강은촌 하나 뿐 아니었을까. 앞의 세 명의 캐릭터가 모두 양지에서 강남을 꿈꾸던 인물들이라면 홍양태 그는 철저히 강남의 음지에서 강남몽을 꿈꾸던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너무나 다른 위치였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강남몽은 개와늑대의 시간처럼 불투명하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사지를 넘나들었는지도 알 수 없고 어째서 그렇게 쉽게 몰락해 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것이 음지 세계의 생리라면 너무나도 무의미한 강남몽이 아니었을까. 결국, 홍양태 역시도 자신의 꿈을 강남에 쏟아 부으면서 강남 환타지의 수요자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주먹세계의 일인자마저도 강남 환타지의 공급자들에겐 힘 한번 못써보고 몰락하는 피해자였다.

 

 

임정아- 강남몽에 일방적으로 짓밟힌 그녀의 소중한 꿈.

 

강남몽의 등장인물 중 가장 강남과 별 관련이 없으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뻔한 인물이 바로 임정아다. 임정아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김진의 백화점 아동복점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백화점이 무너지는 그 날 그녀는 우연히 같이 일하던 매장 언니의 부탁으로 비번인데도 출근을 하게 된다. 그렇게 출근 한 그날, 백화점이 무너졌고 그녀는 어두컴컴한 시멘트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곳에서 박선녀와의 대화를 나누며 희망을 잃지 않고 있던 그녀는 극적으로 구출된다.

 

 

임정아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임정아가 바로 강남과는 별 상관없던 다수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임정아는 강남에서 크게 성공하는 것을 꿈꾸기 보단 소아마비를 앓았던 동생의 휠체어 하나 사주고 평지에 근처에 공원이 있는 집을 꿈꾸는 다수의 소시민과 같다. 그런 그녀가 강남몽을 꿈꾸던 몇몇의 사람들의 욕심으로 붕괴된 백화점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어쩌면 이렇게 지금의 한국 상황과 비슷할까. 소수의 강남몽을 꿈꾸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올려놓은 집값으로 신혼부부는 결혼을 하지 못하고 결혼을 한 부부는 아이를 낳지 못하며 학생들은 1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거리에서 학교를 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또 한, 소설 속 임정아는 살아남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다수의 사람들이 IMF나 경제공황에 목숨을 던졌고 이들은 모두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강남몽 수혜자들이 아닌 강남몽에 접근해보지도 못한 일반 서민들이었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 지속 되지만 작가는 임정아를 끝끝내 구출해 내면서 희망을 말한다. 박선녀는 구출되지 못했고 김진은 백화점이 붕괴되었고 박기섭은 망했으며 홍양태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녀만은 몸만 조금 상했을 뿐 잃은 것이 없다. 더 이상 잃을것이 많지는 않은 그녀였지만 쓸데없는 강남몽을 꿈꾸지 않은 것만으로 그녀가 살아남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대체 강남몽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강남으로 끌어들였는가?

강남몽은 결국 사람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겐 너무나 빠른 성공이었고 너무 빠른 몰락이었다. 강남으로 불어 닥친 개발열풍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뒀던 그들이 이젠 그토록 소망하던 강남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소설 속 이러한 현실은 그저 소설 속에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일까. 지금 대한민국의 강남을 돌아보자. 불과 40여년 전만해도 허허벌판 이었던 그곳들이 이제는 송곳하나 꽂을 곳 없이 건물이 빽빽이 들어찼다. 마치 강남이라는 곳 한곳이 대한민국 경제사를 모두 대변하는 것처럼 급성장해 간 것이다. 무엇이든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게 마련이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그곳에 미리 땅을 가지고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되었고 이러한 소문들이 확산되어 바야흐로 '강남불패'라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다. 필연적으로 신화는 그를 쫒는 꿈을 만들어내게 되고 지금 우리 사회는 강남몽이라는 집단적인 꿈에 모두 사로잡혀 살게 되었다. 나 역시도 강남이라는 꿈에 한번 의심도 없이 막연하게 '강남에 집이나 한 채 있으면 좋겠다.' 라는 환상을 가졌을 정도이다. 그러나 소설 <강남몽>을 읽으며 도대체 강남 환타지가 어떻게 유지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특별시 한강 남쪽에 있는 좁은 땅덩어리가 어떻게 이렇게 지속적으로 값이 상승하는지 그제 서야 궁금해 진 것이다. 그렇게 5명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다 불현듯 생각이 미치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와 같은 다수의 사람들이 강남몽을 꿈꾸는 것 자체가 강남 환타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 원론의 첫 번째 장인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강남몽에 여실히 적용되고 있었다. 우리들의 강남에 대한 꿈이 끊임없이 강남 수요를 만들었고 이에 따라 강남몽의 공급자들이 끊임없이 배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강남에 갈 능력이 있든 없든 강남에 대한 환타지성 이야기는 끊임없이 퍼져갔고 이젠 대한민국 다 팔아도 강남땅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런 환타지가 박선녀를 만들고 김진 회장을 만들었으며 임정아와 같은 선의의 피해자마저 양산했다.

 

 

이러한 현실이 강남 한 곳에만 나타나는 것일까? 한국 사회의 강남은 실제 한강이남 지방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교육에선 '서울대' 가 강남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직업으론 '고등고시'가 강남이다. 또 한, 경제는 일부 대기업이 강남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섬처럼 서민들의 머리 위를 떠다니며 모두에게 꿈처럼 존재한다. 한국말 꿈은 중의적인 의미로 희망과 같다. 그런 꿈이 고작 우리가 만들어낸 강남에 들어가는 것이면 우리 사회에 새로운 미래가 있는 것인가?

 

 

황석영의 <강남몽>을 읽으며 그저 강남개발사나 확인하며 읽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는 30, 40대가 많이 읽기를 바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제 새로운 강남개발자로 커 갈지 모르는 10, 20대의 청년들이 많이 읽었으면 했다. 우리의 윗대가 만들어놓은 강남 환타지라는 소모적인 꿈을 자라나는 10, 20대가 끊어내지 않는다면 언제까지 우리는 강남몽의 노예로 살기 밖에 더하겠는가. 달이 차면 반드시 기울게 마련이다. 강남처럼 빠른 속도로 차오른 달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바른 순환이며 소설 속 5명처럼 쓸데없는 꿈에 자신의 소중한 꿈들을 던지는 비극을 만들지 않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안한 말이지만 강남의 꿈에서 깨어야 할 30, 40대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꿈을 만들어야 할 10, 20대가 이 책을 읽고 앞 선 세대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를 빌어 본다.

 

 

새롭게 만들어갈 시대는 온갖 편법과 수단이 판쳤던 강남개발사 보다는 서로를 돌보는 아름다운 강남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꿈 꿔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1 제 2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소설 속 젊음과 만나다.

 

 

나는 현대소설을 싫어한다어렸을 적엔현대 소설이 주로 다루는 인간 내면을 내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싫어했다그래서 그 당시엔 오로지 역사소설만을 읽었었다그럼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으며 조금이나마 인간을 이해하게 된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슬프게도 지금도 역시 현대소설을 좋아 할 수 없다그러나 어렸을 적이 현대소설을 싫어하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그와는 다른정확히 말해 현대소설이 불편해 읽기가 힘든 것이다나의 이 불편한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부끄럽게도 나는 현대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너무나 자주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그들이 가진 고뇌와 욕망분노 등이 내가 가진 그것과 너무나 비슷한 것이다조금이라도 더 이성적이고 지적이게 보이고 싶은 나의 허영들은 그런 사실들을 용납하지 못한다그래서 소위 현대 소설이라는 장르를 멀리 하는 것이다그러나 내가 빼놓지 않고 2년째 기다리다 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구입한 책이 있다그것이 바로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다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어 그렇게 기다리며 챙겨 보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그러나 소소한 몇 가지 이유를 들자면 이렇다우선젊은 작가라 불리우는(사실 나의 나이 또래이다이들이 소설로 정의하는 젊음이 무엇인지 훔쳐보고 싶은 욕망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수상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어쩔 수 없는 그들의 나이 때문인지 아님 심사에 이런 사실들이 반영되기라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이 정의하는 젊음이 숨어 들어가 있다그것을 작년 제1회 작품집에서도 찾아보았고 역시 이번 제2회 작품집에서도 찾으려고 나름 노력했다두 번째 이유는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 가장 내 모습과 비슷한 주인공들을 정확히 끄집어내기 때문이다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언제는 나와 닮은 모습의 주인공 때문에 현대 소설을 읽지 않는다더니... 하면서 말이다그러나 나의 본 모습을 제일 정확히 보는 것이 그런 상처로부터 나를 가장 잘 치료하는 방법임에야 내가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거부할 이유가 있겠는가그야 말로 독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라고 할 만하다이런 소소한 이유뿐만 아니라 사실 이런 양질의 책을 이정도의 저가(5500)에 사서 감상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 아닐 수 없다책장 한켠에 덩그러니 꽂혀 있던 제 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옆에 그와 같은 이름의(년도만 바뀐책을 꽂는 즐거움은 책을 모으는 즐거움을 아는 이만이 느낄 소소한 즐거움일 것이다.

 

그날로부터 1년이 지났다제 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읽던 시간으로부터 말이다.(작년 내가 리뷰를 올린 날은 6월 30짧으면 짧을 수도길면 길수도 있는 1년이라는 간극이 나와 젊은 작가들을 얼마나 성장 시켰을까또 나로 하여금 책을 읽으며 몇 번의 한숨을 쉬게 하고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생각에 빠지게 할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무엇인가를 탐하는 자처럼 홀로 책탐을 부려본다내가 생각한 그들의 소설에 대한 감상이 더러는 불편할 수도 더러는 공감이 갈수도 있겠으나 어찌 되었든 끝까지 읽고 <2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내가 뽑아낸 새로운 젊음을 정의를 함께 공유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으면 한다.

 

 

 

김애란 <물 속 골리앗>-나를 들여다본다는 것

 

나는 정치적이다그래서 보통 책을 고를 때도 소설보다는 사회 비평서를 즐겨 읽는다간혹소설을 읽어도 그 소설 속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회 문제가 나오면 거기에 집중하는 편이다그래서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은 그런 내게 어떤 면에선 아주 편한 소설이었다여타의 수상작과 달리 <물 속 골리앗>에는 2년 전 있었던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감성적이다그래서 보통 책을 고를 때도 소설보다는 사회 비평서를 즐겨 읽는다간혹소설을 읽어도 그 소설 속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회 문제가 나오면 거기에 집중하는 편이다그래서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은 그런 내게 어떤 면에선 아주 불편한 소설이었다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마로 인해 세상과 고립되어 버리는 배경과 홀로 고군분투 하는 의 모습이 내 상황과 비교하며 보길 자극했기 때문이다.

 

물 속 골리앗에 등장하는 주인공 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년이다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실족하여 죽었다이 와중에 의 집 강산 아파트는 철거지역으로 지정되어 시공사구청과 같은 권력과 생사를 건 투쟁중인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강산 아파트를 바라보는 누구든 지쳐갈 즈음 비가 내린다여느 때처럼 내리는 비어거니 했던 그런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그런데 이 비는 여느 때처럼 생각되던 그런 흔한’ 비가 아니었다얼마간 세상과 분리되어 철거의 압박을 받지 않을 정도로 내리길 원했던 비는 이제 의 생사를 위협하고 세상과 단절을 예고하는 비가 된 것이다이제 일시적인 단절을 요구했던 는 필사적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이번엔 장마 중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체까지 함께 싣고 말이다.

 

어쩌면 아주 간단해 보이는 이 소설의 스토리는 놀랍게도 너무나 다양하게 읽힌다어떤 이는 2년 전에 있었던 용산 참사와 엮어서 주인공 의 고군분투와 마지막 장면에서의 독백 누군가 올 거야.”에서 희망을 발견할 것이다또 다른 누군가는 오롯이 주인공 의 세계에만 집중해 독자 스스로가 만든 세계와 소설 속 의 세계를 비교하며 볼 것이다나는 이 소설을 철저히 정치적인 입장에서 용산 참사와 엮어서 읽었다. (적어도 읽는 도중에는...) 아니더 엄밀히 말해서 애써 그런 입장에서 소설을 읽으려 애썼다그러나 눈으로 읽는 것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그런 소설 읽기를 철저히 거부했다읽는 내내 소설 속 이 빌어먹을 상황이 내가 살아오는 방식과 오버랩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소설 속에 등장하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강산 아파트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짓고 있을 자신만의 세계이자 도피처였다그리고 외부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던 쉴 새 없이 쏟아졌던 비는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내 도피처를 지키는 장치의 비()로 같이 내렸다그러나 소설 과는 달리 언제든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한 마음 속 비는 오히려 소설보다 더 멈추기 힘들게 내렸다그리곤 이제 마음속에 만들어 낸 성에 갇힌 파편화 된 개인의 생사를 위험하는 수준으로 치달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현대에 가장 무서운 질병이 되어 버린 히키코모리나 우울증의 원인과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현대 소설은 불편하다현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소설이 단순한 소설이 아닌 자전적 소설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게다가 <물 속 골리앗>은 소설 속에 가 구원을 받는지 끝내 죽음에 이르는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으면서 지금 내 삶의 미래를 스스로가 상상하게 한다그리곤 행동하게 한다.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을 읽으며 나는 1차적으로 할 일과 2차적으로 할 일을 구분짓게 되었다먼저, 2차적으로 할 일이라면 <물 속 골리앗>이 연상하게 한 용산 참사와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찾아보는 일이었다이 일은 나약한 일개 개인이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나 소설을 읽으면서 한번더 그 문제를 생각하는데 큰 의의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1차적 할 일은 지금 당장 조난에 빠진 나를 구하는 것이다세상과 단절시킨 스스로의 성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조난 된 나를 스스로 찾고 돌보는 일이 <물 속 골리앗>이 내게 던진 메시지가 아닐까 감히 상상해 본다.

 

김유진 <여름>-마음으로 읽는 법

 

이 소설은 내겐 마치 흩어진 퍼즐과 같았다하나하나의 장면을 일일이 연결하다 보면 결국 큰 그림이 나오는 것처럼 소설에서 묘사한 하나하나의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다 소설에 감추어둔 하나의 큰 느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처음엔 이 소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시험 문제를 분석하듯이 읽어 나갔다그러나 여타의 소설들이 가진 갈등이나 큰 에피소드 위주에 익숙해진 나에게 여름은 소설이라기보다는 그저 Y와 B의 독백 또는 움직임을 나열한 텍스트였다그런 상황에서 나는 섣불리 Y와 B의 독백이나 행동에서 의미를 읽어내고자 노력했다결국어느 정도 읽다 머리로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읽을 때에서야 어렴풋이 그저 느낌으로 소설을 보려고 했다관계와 관계 사이에 순간순간 느껴지는 느낌소설 속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감정은 와 였다이들을 묘사한 행동 속에 등장하는 Y가 느낀 구토의 기운이나 B가 토해 낸 피 그리고 어떻게 들어갔는지 이해하기 힘든 수챗구멍 속 벌레이들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앙상블은 이상하게도 소설을 고독과 처량함이 지배하게 하였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소설 여름에는 어째서 이런 분위기가 느껴지는지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그저 읽어가며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두었을 뿐이다.) 난생 처음 소설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소설 속 등장인물인 Y와 B가 어떤 상황에 처해 나를 슬프게 하거나 그들을 고독한 개인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그저 소설을 읽다 보니 그런 느낌에 자꾸만 둘러싸일 뿐이었다그런데 끝까지 한 가지 의문은 남았다대체 Y와 B의 관계 속의 느낌이 와 라면 소설의 제목은 어째서 여름인가 하고... 여름의 뜨겁고 역동적인 기운이 어째서 이 소설의 타이틀인건가 하는 의문이었다그리곤 내 멋대로 소설의 이름을 겨울슬픔등과 같은 단어로 바꾸어 보았다고독슬픔의 제목을 단 김유진의 소설과연 나는 이런 제목 하의 소설에서 진짜 와 의 이미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을까단언컨대 아마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틀림없이 나는 제목만으로 소설의 느낌을 한정 지어 날 것 그대로의 와 의 느낌보단 내가 가공한 슬픔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추상화의 거장이라는 사람들의 그림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그 곳에서 이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며 투덜거리던 내게 누군가가 말했었다. “이 그림을 머리로 보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보라.” 그 때 나는 돌아서서 비웃었다. ‘그림을 어떻게 가슴으로 보나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를 해야지.’ 나는 아직도 그림을 가슴으로 보는 법을 모른다그저 실물과 똑같이 그려놓은 그림을 잘그렸다 생각하는 그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글을 읽는 방법이 꼭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또 다른 방법을 어렴풋하게나마 눈치 챈 것이다.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느끼는 방법을...

 

이장욱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김성중 <허공의 아이들>-현실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

 

이 두 소설은 마치 꿈속을 헤매는 느낌을 들게 했다한 소설은 소설 속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주인공의 ’ 속 상황인지 실제’ 상황인지를 분간하기 힘들게 하였다마치 늦은 밤 잠에서 깨었을 때 방금 본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가 혼동스러운 것처럼... 또 다른 한 소설은 소설이 그려내는 이미지가 마치 꿈에나 볼 듯한 이미지였다어릴 적 동화책을 읽고 잠이 들면 그날 꿈 속에서 나왔던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여러 집들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챘을 테지만 전자가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이고 후자가 허공의 아이들이다. ‘’ 이라는 같은 모티프를 연상케 하는 두 소설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바실리 섬스례드니 15번가 98번지. 5층 7호에서 시작한다이 집의 원래 주인은 이반 멘슈코프그는 1990년대 이전 전위적인 반체제 인사였다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자본주의 물결이 밀어닥친 90년대 이후 그가 설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그렇게 어느 순간 사라졌던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소설 과 함께였다공포 소설이라는 반체제 인사가 만들어낼 법한 소설과는 전혀 동떨어진 소설을 쓰던 그가 집의 주인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반 멘슈코프는 어느 날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어딘가로 훌쩍 사라져 버렸다소설 속 는 멘슈코프가 사라진 그 집으로 소설을 쓰기 위해 들어간 것이다그런데 가 그 집에서 지낸 닷새째 되는 날 집에 구조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서서히 이 집에 이반 멘슈코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귀신이든 사람이든 관계없이마침 수면제가 필요했던 는 친구인 안드레이 에게 자문도 구하고 수면제도 얻을 겸 해서 그를 만난다그러나 수면제는 구했으나 그에게 서 들은 대답은 멘슈코프는 유렵으로 떠나고 없다는 사실 뿐이다그리곤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인한 환각에 시달릴 뿐이란 핀잔을 들을 뿐이다그러던 어느 날 유령의 공포에 휩싼이 ’ 는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멘슈코프의 방에서 텝댄스를 홀로 춘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을 읽고 나면서 나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그 의심이 타인을 향한 날선 경계라거나 비난이 아닌 나 스스로가 과연 무엇에 홀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철학적인 의심이었다소설 속 가 의심하듯 과연 그 집에 유령이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 자신이 유령인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둘 중 어느 상황이 진실인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지금의 의 행동이 머릿속이 뿌연 안개가 낀 상황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소설 속 상황을 현실의 나의 상황에 대입해 보아도 그 결과는 비슷하다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대한 공포는 나 스스로를 마치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긴장하고 불안하게 만든다그러다 결국 소설 속 처럼 누군가의 장단에 맞추어 어디에서 우스꽝스런 춤을 추고 있게 될지도 모른다이 상황을 소설이 마치 예지몽처럼 먼저 나타나 나를 일깨우는 것이다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현실의 내겐 예지몽이었다.

 

반면에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은 재난이라는 형식을 빌려 남는 것과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의문을 내게 던졌다.

 

허공의 아이들에 등장하는 소녀와 소년은 15살의 아직 어린 아이들이다그러나 소설 속엔 이미 소녀와 소년을 제외한 어떠한 생물도 살아있지 않다아니그들이 죽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다른 세계로 옮겨졌는지의 여부는 불명확하다마치 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불명확한 상황 속엔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우린 선택 된 걸까아님 누락된 걸까?” (p.224)

 

살다보면 이런 순간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잘나도 너무 못나도 이런 상황들이 차별 없이 발생하는 것이다그리 긴 시간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맛보았던 것 같다. 10대 시절엔 공부나 학교생활 등에서 남들보다 조금 앞섰단 이유로 이런 상황을 또 20대엔 그와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이 느낌을 맛 본 것이다그러나 내게 이 상황에 대한 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특별히 나만 선택되거나 누락된 상황은 싫다어떻게든 무리에 섞여 함께 간다.’ 그러나 언제나 결과 역시 똑같았다.

선택되거나 누락되었다.

 

그러나 정말 싫었던 것은 역시,

식사량을 반으로 줄였는데도 소년의 키는 계속 자라났다. ...(중략)...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p209)

 

누락 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커 나간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그리고 이 누락된 상황을 고스란히 나 스스로가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만큼 괴로운 것은 없게 된다.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은 내겐 평론가가 말했던 동화나 꿈에나 나올법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었다나는 하늘을 떠다니는 집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보다는 미래가 없는 상황에서 성장해 나가는 소년의 괴로움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소년이 겪을 괴로움에 나 역시도 진저리 칠 수밖에 없었다.

 

김사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흘러가는대로 내맡긴 채 삶을 살아오던 내게 처음으로 나 스스로 물꼬를 바꾼 날이 있었다바로 대학 재수를 결정하는 날이었다서울에 k대학을 붙은 채 재수를 결정하고 등록금 환불 신청을 하러 가는 그 날 내 인생 처음으로 삶의 물꼬를 내 손으로 바꾸었었다그 결과가 잘한 결정인지 못한 결정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내 스스로 삶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후회는 없었다.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이하 움직이면)는 그러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 주인공이 어느 순간 그러한 상황 속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인해 벌어지는 에피소드이다무엇인가 결정해보지 못하고 아버지가 주어준대로 살아온 주인공 는 점점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자신과 같은 공포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 대상이 불편하거나 두렵다그래서 그는 억지로 타자를 자신과 동일한 감정(공포)에 처하게 하거나 해침으로써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그래서 그는 골목길 끝 아무도 찾지 않는 국밥집을 찾아가 안정을 갈구한다그러나 그 곳에서도 자신처럼 공포를 느끼거나 슬퍼해야 할 사람인 국밥집 주인이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준비하는 상황을 는 이해 할 수 없다그리고 그는 그녀를 해침으로써 이 상황을 타개한다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마침 국밥을 먹으러 온 아이가 그 상황을 본 것이다. ‘는 이제 아이에게 자신과 같은 두려움을 강요한다아니 처음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를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가며 두려움 속에 빠뜨리고 안정을 찾는다. (같은 감정을 공유함으로써그러나 이내 는 그 아이마저 맥주병을 휘둘러 살해한다그러나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큰 비극은 가 이제 자신이 삶이 무너져 내렸음을 너무나도 여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는 자신이 살해한 두 사람 앞에서 자살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안다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을까아니었다그가 선택한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되어버린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그리고 자신의 부모를 찾아가 모두 살해해 버림으로써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이 소설은 너무나 슬픈 분노를 담고 있다누군가가 이끄는 대로의 겉으로는 편안해 보이는 삶을 사는 주인공 는 사실 편안하지 않다자신을 둘러 싼 사람 중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이를 제외한 어떤 이도 불편하기 때문이다그들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걸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두렵다그러나 그와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겐 화가 나기는 하나 극단적인 감정까지 치밀어 올리지는 않는다작금의 현대인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오는 것일까? 20대 30대가 되어서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 한 명 구하지 못하는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인가이러한 오늘의 현실을 김사과는 너무나도 여실히 꼬집고 있는 소설이 움직이면 이다.

 

김이환 <너의 변신>-변하는 사실 마저도 사랑한다는 것

 

이번 젊은 작가상 수상작 중 가장 핫(HOT)한 소재를 사용한 작품을 꼽으라면 누구든 주저없이 김이환의 너의 변신을 꼽을 것이다동성애의 성교 장면이나 생식기를 바꿔다는 등 자극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풀었다그러나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과연 지금의 성형세태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등장하는 와 ’ 는 같은 남자로 서로를 사랑한다쉽게 말해게이인 것이다. ‘는 의 지금의 모습이 배가 나오고 볼품없어도 다른 어떤 모습도 아닌 지금의 의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그러나 는 보다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자신의 겉모습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프랑캔슈타인박사처럼 자신을 변신시켜줄 성형외과 의사를 찾게 된다그리고 의 확실한 동의 없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수술을 하게 된다그것이 ’ 자신뿐만 아니라 도 만족시켜줄 것이란 착각과 함께 말이다그러나 가 사랑한 것은 지금의 의 모습이지 아름답게 변한 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다른 두 사람의 생각은 결국 파국을 맞게 하고 한참 후에 다시 만난 ’ 는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은 포기한 채 그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오르가즘만을 느끼는 상태로 자신의 몸을 던져 버린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볍지 않다는 것은 그저 눈에 띄는 동성애 코드나 지금의 성형 세태를 극단으로 밀어 꼬집은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내가 생각한 이 소설의 매력은 과연 지금의 나의 모습과 어떤 과정을 거치든 시간이 흘러 변형된 나의 모습이 같은 가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소설 속에 등장하는 ’ 역시도 사실 외형적인 변화가 있었을 뿐 ’ 자신이 가 아닌 것이 되거나 한 것이 아니다그러나 는 그러한 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며 멀어지게 된다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람의 외형이 아닌 사람 자체를 사랑 할 수 있노라고 장담하고 산다그러나 사실내가 사랑한 무엇이 사람 자체인지 그 사람의 외형인지는 확실치 않다무엇이 진실한 사랑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랑이 그저 상대의 일시적인 겉모습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는가세상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깐... 그래서 김이환 <너의 변신>이 읽으며 변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것 많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정의를 내려 본다.

 

정용준 <떠떠떠>-그 아픔까지도 사랑한다는 것

 

누가 머래도 이번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잠깐이나마 마음이 따뜻했던 소설을 뽑으라면 이 소설을 뽑을 것이다정용준의 떠떠떠떠에서는 적어도 인간 상호간의 공감과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용준의 떠떠떠떠에 등장하는 주인공 둘은 모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다주인공인 와 그녀’ 보다는 그들이 자신을 감추고 뒤에 숨은 사자와 판다라고 적는 것이 그들의 상태를 더 잘 설명해 줄 것이다소설 속 사자’ 인 나는 어렸을 적부터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그런 그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인식하고 싫어하게 된 것은 그의 초등학교 선생님의 ‘27’에 대한 집요한 공격 때문이었다초등학교 시절, ‘27’ 이었던 그를 그의 초등학교 선생님은 글 읽을 기회가 되면 말을 더듬는 그를 감싸주기는커녕 남들 앞에서 시키고 모욕주기 일쑤였다그래서 그의 달력에 27은 너무도 특별한 날이자 너무도 지워버리고 싶은 날로 기억되는 것이다이런 트라우마를 가지고 성장한 그에게 다가온 판다는 역시 아픈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다그녀가 가진 아픔은 기면증인지 발작인지 정확히 병명을 알 수는 없으나 그런 것에 일종으로 멀쩡하던 사람이 돌연 쓰러져 버리는 것이다이렇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그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상처모습을 가진 이들이 성장한 채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이제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알아가며 서서히 서로를 보듬기 시작한다그러나 그 상처를 보듬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사랑하는 이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고 돕거나 병을 알은 체를 하지 말아 달라는 여자의 부탁은 사랑을 해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하다 못해 아프고 처절하며 글을 읽는 독자마저도 얼마나 비참할까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눈치껏 보듬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이들의 사랑 방식을 보며 그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한편을 읽었다고 하기엔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편하지 않다그만큼 이들의 사랑은 사랑이 내포한 일견 이기적일(?)수 있는 모습까지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을 또 다른 사랑하는 마음이 가로막는 모습은 사랑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서로의 아픔을 대놓고 감싸는 모습이 사랑이라면 이들처럼 거리를 두는 것은 어째서 사랑이 아니겠는가오히려 실제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사랑이 불타오르는 초기에 이들처럼 자신의 트라우마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는 본성을 자주 보인다그리고 사랑이 어느 정도 시기를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여준다그러나 이때쯤엔 마음속에 사랑이 더 크게 자리를 잡은 것인지 이 더 크게 자리를 잡은 것인지 본인마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시간이 되 버렸을 것이다그래서 정용준의 <떠떠떠속의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시리고 현실적이다.

 

정용준이 보여준 사랑을 읽으며 마음이 따뜻했다그러나 한편으론 정의 할 수 있는 사랑이 대체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시중에 떠돌아다니는 값싼 사랑의 정의는 너무도 이상 쪽으로 치우쳐 사랑이 가진 음영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왜일까?

 

 

이렇게 7편의 단편 소설 한편 한편에 대한 나의 감상이 끝이 났다전체적으로 보면 작년보다 소설이 파고든 소재들이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든다. (게다가 심사위원이신 박완서 선생님의 부고와 함께 한 작품들이라 더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1년이라는 시간동안 인간 내면을 더 어둡게 하는 사건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일까그러나 참 다행이게도 소설 속에서 정의하는 젊은 작가들의 젊음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게다가 정말 큰 수확이라면 김유진의 <여름>을 읽으며 알게 된 새로운 소설 감상법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사실책이라는 것을 언제부터 읽기 시작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모아둔 책만 1000권 가까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책을 글로만 읽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연상으로 읽는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그러던 것을 도저히 글로만 읽어서 이해하기 힘든 감정들을 그저 느껴지는대로 읽어 공감하는 경험을 처음해보았다게다가 지금의 내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과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김사과의 <움직이면~>은 잊지 못할 단편 소설들이었다. (이런 작가 7명을 2년째 나에게 선물해 준 문학동네 측에도 역시 감사한다)

 

그러나 사실 좀 아쉬운 면이 있다면 심사위원님들이 언급한 아깝게 떨어진 8편의 작품들은 어디서 읽을 수 있는가 언급이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다음 3회때엔 이런 열망도 좀 감안해 주셨으면 한다)

 

이제 2년째 하고 있는 소설 속에서 만난 젊음에 대해 정의 해보려 한다.

 

젊음이란 나를 똑바로 보는 과정을 통해 현실을 똑바로 보며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고스스로 살아 갈 세상을 선택해 만들어가며 그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마저도 사랑하며 그 속에 있는아픔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curian-

 

眼光이 紙背를 한다.(눈빛이 종이를 뚫는다그것이 젊음의 이름이다. -양주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전에 김준기의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이 책은 영화 속에 나온 상처와 이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인간의 상처가 어떻게 생성~치유 되는지를 설명한다이 책에선 다양한 영화들을 예로 드는데 만약 영화가 아닌 소설을 예로 든다면 아마도 김연수의 신작 <원더보이보다 어울리는 책을 찾긴 힘들 것이다김연수의 신작소설 <원더보이>는 상처의 생성~치유의 과정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한 단계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책인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상처는 낯설고 치유는 고독하다>

나는 웬만해선 성장소설을 잘 읽지 않는데 이는 판에 박힌 듯 전개되는 줄거리와 항상 마지막엔 모든 걸 알게 되었다는 듯 자조하는 주인공의 행보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성장소설 속 주인공들이 정말 성장을 한 것인지 현실에 체념하게 된 것인지 조차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20대를 훌쩍 넘겨버린 지금의 나조차도 어려운 인생을 성장소설 속 10대들은 너무도 쉽게 확신하며 끝맺음을 한다그래서 나는 여태까지 공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성장소설을 웬만해선 읽지 않았다그래서 사실이번 김연수의 신작 <원더보이>를 읽게 된 것은 약간의 정보의 부재가 불러온 큰 행운이었다나는 <원더보이>가 성장소설 형식을 취하는지 전혀 모르고 책을 읽었던 것이다. (아마도 김연수라는 이름이 주는 작가에 대한 믿음 때문에 무조건 사서 읽게 된 것 같다그런데 책을 덮은 지금까지도 나는 소설 <원더보이>가 성장 소설이란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이는 아마도 이 소설이 다루는 상처와 치유가 사람의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나는 일련의 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소설 <원더보이>의 성장은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성장이 아닌 인간이 성숙함으로 한 단계에 나아간다는 의미의 성장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이 성장은 새로운 상처로 받는 고통이 조금씩 무뎌지는생의 끝까지 계속되는 성장인 것이다실제로 이제 아이라 부르기 어색한 지금의 나 역시 새로 받는 상처는 낯설고 그 치유는 너무나 고독하다. (나는 지금도 성장 중인 것이다)

 

106,500,000,000명의 지구를 거쳐 간 사람들 모두가 제각각의 이유로 상처를 받고 치유하는 과정을 거쳐 갔겠지만 이들이 상처를 받는 과정이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은 인류의 시작과 현재까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아마도 그건 호모사피엔스인 우리가 가진 하나의 특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 맥을 같이 한다상처받은 106,500,000,000명의 지독하게 고독하고 외로웠을 상처의 치유 과정에 공감하며 김연수의 신작 <원더보이>를 하나씩 뜯어보자.

 

<정훈의 불행과 상처>

김연수의 소설 <원더보이속 개인’ ‘정훈은 너무나 불행하다그는 태어나 한 번도 자신의 어머니를 본 적이 없으며 아버지와 함께 탄 자동차 사고로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마저도 잃고 말았다그러나 사고 후 얻게 된 정훈의 또 다른 이름인 원더보이는 행복해야 한다. ‘원더보이는 행복하다라는 단순 명제가 아닌 원더보이는 행복해야 한다.’ 라는 당위의 명제가 그에게 부여된 것이다.

 

군은 이제 고아가 됐다고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웃으면 이제 세상이 군과 함께 웃겠지만울면 군 혼자 울 것이다군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이 세상과 더불어 웃든지아니면 혼자 울든지.” <p.28 권대령의 말 >

 

아버지를 잃는 사고 후 정훈에게 부여된 기회는 고아가 되어 버렸다는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 사회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원더보이로서의 역할 뿐이었다개인의 불행이 사회의 즐거움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수형희선의 불행과 상처>

여기 또 다른 유형의 상처를 가진 수형과 희선’ 이 있다이들의 상처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폭력과 개인 간의 갈등 속에서 야기된 상처이다. ‘수형은 1974년 기억의 서울로 대변되는 상처를 안고 산다천재적인 암기능력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수형은 의도치 않게 외우게 된 아버지의 비밀로 인해 정보부로 불려가 곤욕을 치른다그는 정보부에서 자신이 외운 정보를 들려주고 풀려난다그러나 이는 수형의 아버지를 자살로 내몰았고 수형’ 역시 자신의 기억을 파괴해가며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이런 수형을 사랑한 희선은 그가 지운 1974년의 기억을 1980년의 새로운 기억으로 대체해 그를 구제하려 한다그러나 또 다시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은 1980년 수형을 광주의 학살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를 영영 데려가 버린다. ‘수형의 죽음으로 인해 상처의 치유자 역할을 했던 희선은 이제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 역할이 변모하게 된다이렇게 상처받은 희선에게 주어진 현실은 상처를 치유할 어떤 상황이 아닌 1980년대의 서슬 퍼런 독재와 억압이었다사회는 역시 그들에게 상처를 주기만 할 뿐 어떤 상처의 치유책도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형희선정훈의 상처는 어떤 식으로 서로와 연결 되는 것일까어째서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이들이 받은 상처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훈수형의 특별한 재능으로 인한 상처>

소설을 이끌어 가는 정훈과 수형희선은 모두 같은 듯 다른 상처를 안고 산다우선 정훈과 수형은 모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정훈은 사고 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며 수형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암기력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이 두 사람이 가진 초능력적인 재능은 모두 그들 자신에게 상처로 돌아온다정훈은 그의 능력을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범인 심문 기능에 사용하게 되었고 수형의 암기력 역시 반체제 인사를 검거하는데 큰 공을 세우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이로 말미암아 이 둘은 모두 상처를 받게 된다이 둘의 상처는 특별한 재능으로 인한 상처이다.

 

<정훈희선의 부재로 인한 상처>

그렇다면 정훈과 희선의 상처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이 둘의 상처는 부재로 인한 상처이다정훈은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를 본 적이 없다그나마 아빠의 존재로 인해 겉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자동차 사고로 아빠를 잃으며 고아가 된 현실 속에서 터져 나온다그래서 그는 엄마를 찾기 위해 자신의 초능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아빠의 수첩을 사용하기도 한다희선의 상처는 수형의 부재로 인한 상처이다그가 구제하려 했던 수형은 1980년의 광주의 기억과 함께 영영 그녀를 떠나갔다더 이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수형으로 인한 상처를 그녀 역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듯 같은 정훈=수형=희선의 상처와 극복>

결국 이들의 상처는 모두 외부로부터 입은 상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회내의 어디에서도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다결국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본인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거나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 두 가지 밖에 없다소설 <원더보이>의 주인공들은 이 두 가지 선택지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상처를 치유한다실제로 수형이 1974년의 기억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의 기억을 모두 파괴하는 과정을 본인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라고 본다면 희선이 수형에게 1980년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주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수형의 죽음이후 희선은 강토라는 남자 이름을 쓰고 남자행색을 하고 다니면서 여성으로서 일종의 금기와 같은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분신을 생각한다이 모습에선 다시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그러나 그녀가 다시 정훈을 만났을 때 던지는 말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다시 시작되려함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네가 온 거야난 닮은 사람들은 그 어디에 있든 지구와 달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믿거든우리는 꽤 닮았으니까.”

별로 안 닮았다면앞으로 닮아가겠지적어도 난 널 간절히 원하니까.” <p.136 희선의 말 >

 

결국, <원더보이속 주인공들은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방법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이는 현대 과학에서 명시하고 있는 인간이 상처(트라우마)를 겪게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진정한 성장은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는 것>

내가 잘 읽지 않는 <성장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간 것은 아마도 소설 속 등장인물인 아이(정훈)과 어른(희선)이 어릴 적 내 모습에서 지금 20대 중반을 넘어버린 내 모습 모두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소설 속 정훈과 희선의 상처는 모두 철저히 외부 발생적인 요인으로 입은 상처이다그러나 이들을 상처 입힌 사회와 개인은 이들을 치료하지 않는다오히려 이들이 가진 마지막 하나까지도 사회나 힘 있는 개인을 위해 사용하기를 강요한다상처 입은 개인을 치유할 공간이 사회 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결국 이들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거나 상처 입은 자들끼리 서로를 보듬을 수밖에 없다그래서 그들은 철저히 고독하며 외롭다.

 

잠에서 덜 깬 나는 엄마를 안고 있다고 생각했지만그건 희선씨였다스웨터가 얼굴에 꺼끌 거렸다그렇게 품에 안겨서 나는 울었다그건 아빠의 유산이 아닌온전한 나만의 눈물이었다누군가 다른 사람의 심장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서 울어본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아마도 십칠 년 만의 일이 아닌가 싶었다.” <P.301 정훈의 말 >

 

이런 일련의 과정은 나의 경험과 비교해보아도 별반 다르지 않다아니오히려 소설이 현실을 너무도 정확히 반영해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지우고 내 이름을 써 놓아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이다물론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나 이들이 상처를 입고 치유해가는 과정은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 할 것이다결국우리는 외부로부터 입은 상처마저도 철저히 개인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게끔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아마도 우리는 이렇게 홀로 힘겹게 상처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소설 <원더보이>를 덮으며 과연 무엇이 성장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원치 않는 상처를 입고도 홀로 고독하게 그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성장인지또 그 상처를 치유하지 않은 채 다른 이들처럼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상처의 치유가 아닌 망각을 성장이라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그러나 <원더보이>의 정훈과 희선의 행동을 다시 반추하며 그들의 성장은 다른 이의 상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희선이 처음 본 정훈을 보며 자신과 닮았다고 한다거나 정훈이 희선에게 동경하는 마음을 품는 일련의 과정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는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그래서 소설 <원더보이>는 지독하게 고독하면서도 외롭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어른보다 더 적은 시간을 살아 더 적은 양의 정보를 접하다 보니 아이들에겐 '절대'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현상이 '나'와 '너'의 상대적 개념의 세상에 살며 '나'와 다른 '너'의 행동에 분노를 느끼거나 경멸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다른 행동에 호기심을 느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미 모든 현상에 '절대적' 믿음을 가진 다수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뜬금없다 여긴다. 그런데 막상 왜 그 호기심이 뜬금없는지 아이에게 설명해 주려는 시도를 하다보면 그제서야 '턱' 하고 막히는 부분이 생김에 놀라게 된다. 왜 항상 절대적으로 이 현상은 이렇다고만 하는지 자신조차도 잘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도 사람은 아이에서 어른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겪으며 자신만이 믿는 '절대성' 이라는 개념을 하나씩 만든다. 그리곤 자신의 절대적 믿음에 반하는 행동엔 분노를 하거나 경멸을 한다. 아니, 한 발짝 더 나아가 동정을 하며 자신과 다른 타인을 계몽(?)시키려 든다. 그러한 계몽주의 현상이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종교전쟁, 문화전쟁이라는 갈등으로 표출되었다.


어쩌면 단순해 보이는 이러한 절대성과 상대성의 개념은 항상 같은 곳에서 같은 민족끼리 공유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전혀' 단순하지 않다. 처음부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공유된 답을 가지고 사는데 상대적인 생각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처음부터 그들에겐 상대성이 필요하지도 내가 절대적인 생각을 가진 채 살고 있다는 의심자체도 불필요하다. 그렇게 나 역시도 나를 둘러싼 절대적 세상에 의식을 고착화하고 있다는 의심도 하지 못한 상태로 요네하라 마리의 저서 <마녀의 한 다스>를 접했다.


처음 <마녀의 한 다스>라는 책의 제목만 보고 '판타지 연애 소설이구만' 하는 나만의 절대적인 생각을 어김없이 발동시켰다. 그런데 책의 저자가 동시통역사라는 것과 이 책이 시중에 널린(내겐 판타지 소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있었다.) 판타지 소설이 아닌 문화 인류학 서적이라는 소개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히려, 판타지 소설 같은 제목이 책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이다. 그렇게 구입해서 읽기 시작한 <마녀의 한 다스>에서 나는 학교에서 활자로만 몇 번이나 보고 외우던 문화의 상대성이라는 개념을 동시 통역사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죽은 활자가 아닌 살아있는 경험으로 처음 접했다. 마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내게 다른 형식으로 깨달음을 준 것이다. 아직도 <마녀의 한 다스>를 읽고 난 후 떠오른 편견, 의심, 상대성, 절대성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이러한 단어를 조합해 <마녀의 한 다스>라는 책이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 해 본다.


그녀의 저서에 담긴 그녀만의 명쾌한 생각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그녀의 문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누군가가 내 옆에서 재미있는 현장 이야기를 해주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시종일관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책을 들고 있는 몇 시간이 몇 분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직업이 전업 소설가인 사람보다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편안하게 읽힌다고 그 속에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작가가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녹여버려 이야기 속 메시지를 찾아 음미하는데 시간을 더 들여야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결코 가볍지 않으나 가볍다 느낄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서 내가 찾은 <마녀의 한 다스>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풀어내 보겠다.



<마녀의 한 다스 이후로 벌써 세 권이나 구입한 요네하라 마리의 저서들>


지나가는 어른 중 누구라도 잡고 타문화에 대한 상대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다면 십중팔구 '나와 다른 문화라고 하더라도 존중 해야지요.' 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은 이러한 상대성의 개념을 체화하고 살아가는 듯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대답이 국제 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세상은 아직도 나와 다른 문화, 종교, 학술에 반감을 표한다. 이러한 반감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면 우리는 가깝게 문명의 충돌이라 일컬어지는 이슬람과 미국의 전쟁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를 이루는 것이 개인이라고 정의한다면 앞에서 문화의 상대성을 체화한 듯 보이는 사람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마녀의 한 다스>에 나오는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 집회 참석 에피소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저자 요네하라 마리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문화권을 자주 접하는 동시 통역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며 그녀의 소녀시절 역시 동구의 프라하에서 보냈다. 그런 그녀에게도 마녀는 판타지에나 나오는 허구이며 한 다스는 12라는 절대적 개념으로 사물을 본다. 그러나 마녀 집회를 참석하며 마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을 만나고 한 다스가 13이라고 주장하는 마녀를 그녀는 만난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이는 곧 조금만 넓은 범위로 생각하면 전혀 다른 여러 사람에서 여러 민족으로 또 여러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람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며 국가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국가만큼의 담론과 민족만큼의 색깔이 존재하고 다양한 개인만큼의 생각이 공존한다는 것을 그녀의 깨달음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은 각각 서로 길하다고 생각하는 숫자도 다르고 흉하다고 생각하는 숫자 역시 다르다. 그렇게 몇천년을 서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다보니 이들의 생각이 이제는 고착화의 단계에 들어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신만의 세계의 절대성만 믿고 살아갔음 조용했을 인류는 교역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이슬람과 기독교과 만나며 흑인과 백인 황인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인류는 이제 본격적으로 서로를 계몽하려는 계몽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여러 가지 달콤한 유혹으로 계몽을 시도하다 최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몽둥이를 서로에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해에 죽어나가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런 현상에 어떻게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길가는 어른들 중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문화의 상대성을 존중 해야지요.' 라는 사회를 사는 우리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실제로는 죽이려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현실을...

 

<마녀의 한 다스>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우리의 이러한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중국집과 중국의 러시아 요리집을 통해서, 기차 칸 내 러시아와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들의 차이에서도, 고래를 잡는 행위엔 분노하면서 인간을 죽이는 전쟁에 대해선 잠잠한 사람들에서 한국과 독일의 분단을 일본인의 시각에서만 바라본 자신의 절대성에서 요네하라 마리는 우리의 절대적으로 고착화된 생각을 보여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이 필요하다는 키워드를 뽑아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듯 책에서 강조하는 상대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고착화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와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선 쉽게 깨달을 수가 없다. 그저 죽은 활자로만 아는 상대성, 지식으로만 아는 상대성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녀의 한 다스>의 요네하라 마리는 교묘하게 자신의 에피소드 속에 편견과 의심이라는 키워드를 숨겨 두었다.

 

대의지하 필유대오 (大疑之下 必有大悟) -큰 의심에 큰 깨달음이 있다.

평소에 나의 모토로 삼고 있는 이 말이 우리의 절대적으로 고착화된 생각에 하나의 해결책이 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심이 있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내가 항상 절대적이라고 믿는 나의 문화에 약간에 의심을 가한다면 곧, 꼭 내가 신봉하는 문화만이 절대선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전에 내가 가진 생각이 일종의 편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쉽게 요네하라 마리의 예를 들어본다면 러시아에서는 그저 그들의 언어문화에 하나인 모스크바시 야키만코 거리가 일본에서는 '구운 보지' 가 되어 버린다. (p.96) 이렇듯 내가 가진 문화가 저쪽에선 아주 우습거나 혐오를 주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자문화를 의심해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절대적 문화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일종의 편견이 될 수도 있다. 편견에는 당연히 의심의 잣대가 드리워져야 하며 그 과정을 거친 후에야 우리는 상대성이라는 소중한 개념을 알게 된다. 상대성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인식하고 인류공통의 가치라는 절대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면 우리가 전쟁의 불안에 떨어야 하는 시대가 사라지지 않겠는가? 인류공통의 가치라고 해도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으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요네하라 마리의 생각처럼 '생리현상은 남녀, 신분계급, 민족,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찾아온다. 인간을 나누는 그 어떤 장벽도 단번에 없애버린다.' 이 개념만을 명심하면 된다. 이 말은 곧, '인류는 누구나 똑같은 살아있는 생명이다' 라는 진리일 뿐이니 말이다.

 

 <마녀의 한 다스> 라는 책은 내게 그저 하나의 지식으로만 존재하던 상대성이라는 개념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로 다가오게 했다. 또, 저자이자 통역가이며 어릴 적 외국에서 산 경험이 있는 요네하라 마리 마저도 어떤 문화적 편견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에 나의 죽어버린 경각심을 일깨웠다. 활자로만 접하던 지식을 생생한 외교의 현장에서 또, 외국에서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인류가 접한 오늘날에 산적한 문제가 상대성 존중의 결여로 발생하는 부분이 크다는 사실을 생생히 느끼게 된다.

  

물론, 모두가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해야하고 그 문화를 다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틀림없이 인류공통의 가치인 생명을 해한다거나 하는 악한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이 우리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저들에게 이식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저들이 주장하는 자신만의 문화에도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들의 사회를 지탱하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문화를 한 순간 외과수술적인 방식으로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결국 그이야긴 지금처럼 전쟁을 하자는 소리 밖에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그러한 문화를 최대한 존중하는 입장에서 인류공통의 가치인 생명을 지키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섣부른 계몽보다는 훨씬 진보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요네하라 마리가 <마녀의 한 다스>에서 여러 에피소드로 말하고자 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요네하라 마리는 자신의 편견과 문화에 대한 절대적 신봉을 무너뜨리려 노력했다는 사실만은 그녀의 에피스도와 생각을 통해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소중한 가치가 남에겐 전혀 다른 의미의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녀가 통역사의 길로 들어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저요, 오르가즘에 달했을 때 본능적으로 아, 아이가 생겼으면, 하고 생각한답니다."(p.260) 라는 말이 그녀의 스승 도쿠나가 하루미 씨에겐 "그 얼굴을 상대로 오르가즘에 이를 때까지 용을 쓰다니, 어떤 남자인지 진짜 장하다!" (p.262) 라는 의미로 변용되는 과정에서 받은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에 절절히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개인이 다른 개인과 상대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개인이 모인 사회가 다른 사회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될 것이고 나아가 국가가 다른 국가와의 차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요네하라 마리가 말하고자 한 진정한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끝으로 글을 읽는 내내 나에겐 충격적인 요네하라 마리의 생각 한 토막을 말하고자 한다.

"인류와 인류가 서로 지동설이 아닌 천동설을 들고 서로를 욕하고 싸우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유쾌한 지금 전 지구가 처한 현실의 정답이 아니겠는가. 진짜 진실인 지동설을 찾는 것은 인류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상대성을 발휘하는 그 날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마치 옆에서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그녀의 뛰어난 필력과 옮긴이의 정성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