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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평점 :
2011 제 2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 소설 속 젊음과 만나다.
나는 현대소설을 싫어한다. 어렸을 적엔, 현대 소설이 주로 다루는 인간 내면을 내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싫어했다. 그래서 그 당시엔 오로지 역사소설만을 읽었었다. 그럼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으며 조금이나마 인간을 이해하게 된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슬프게도 지금도 역시 현대소설을 좋아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렸을 적이 현대소설을 싫어하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그와는 다른, 정확히 말해 현대소설이 불편해 읽기가 힘든 것이다. 나의 이 불편한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부끄럽게도 나는 현대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너무나 자주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이 가진 고뇌와 욕망, 분노 등이 내가 가진 그것과 너무나 비슷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이성적이고 지적이게 보이고 싶은 나의 허영들은 그런 사실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위 현대 소설이라는 장르를 멀리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빼놓지 않고 2년째 기다리다 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구입한 책이 있다. 그것이 바로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어 그렇게 기다리며 챙겨 보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소소한 몇 가지 이유를 들자면 이렇다. 우선, 젊은 작가라 불리우는(사실 나의 나이 또래이다) 이들이 소설로 정의하는 젊음이 무엇인지 훔쳐보고 싶은 욕망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수상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어쩔 수 없는 그들의 나이 때문인지 아님 심사에 이런 사실들이 반영되기라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이 정의하는 젊음이 숨어 들어가 있다. 그것을 작년 제1회 작품집에서도 찾아보았고 역시 이번 제2회 작품집에서도 찾으려고 나름 노력했다. 두 번째 이유는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 가장 내 모습과 비슷한 주인공들을 정확히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언제는 나와 닮은 모습의 주인공 때문에 현대 소설을 읽지 않는다더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의 본 모습을 제일 정확히 보는 것이 그런 상처로부터 나를 가장 잘 치료하는 방법임에야 내가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거부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야 말로 독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소소한 이유뿐만 아니라 사실 이런 양질의 책을 이정도의 저가(5500원)에 사서 감상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책장 한켠에 덩그러니 꽂혀 있던 제 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옆에 그와 같은 이름의(년도만 바뀐) 책을 꽂는 즐거움은 책을 모으는 즐거움을 아는 이만이 느낄 소소한 즐거움일 것이다.
그날로부터 1년이 지났다. 제 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읽던 시간으로부터 말이다.(작년 내가 리뷰를 올린 날은 6월 30일) 짧으면 짧을 수도, 길면 길수도 있는 1년이라는 간극이 나와 젊은 작가들을 얼마나 성장 시켰을까. 또 나로 하여금 책을 읽으며 몇 번의 한숨을 쉬게 하고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생각에 빠지게 할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무엇인가를 탐하는 자처럼 홀로 책탐을 부려본다. 내가 생각한 그들의 소설에 대한 감상이 더러는 불편할 수도 더러는 공감이 갈수도 있겠으나 어찌 되었든 끝까지 읽고 <제2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내가 뽑아낸 새로운 젊음을 정의를 함께 공유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으면 한다.
김애란 <물 속 골리앗>-나를 들여다본다는 것
나는 정치적이다. 그래서 보통 책을 고를 때도 소설보다는 사회 비평서를 즐겨 읽는다. 간혹, 소설을 읽어도 그 소설 속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회 문제가 나오면 거기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래서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은 그런 내게 어떤 면에선 아주 편한 소설이었다. 여타의 수상작과 달리 <물 속 골리앗>에는 2년 전 있었던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감성적이다. 그래서 보통 책을 고를 때도 소설보다는 사회 비평서를 즐겨 읽는다. 간혹, 소설을 읽어도 그 소설 속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회 문제가 나오면 거기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래서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은 그런 내게 어떤 면에선 아주 불편한 소설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마’로 인해 세상과 고립되어 버리는 배경과 홀로 고군분투 하는 ‘나’의 모습이 내 상황과 비교하며 보길 자극했기 때문이다.
물 속 골리앗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년이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실족하여 죽었다. 이 와중에 ‘나’의 집 ‘강산 아파트’는 철거지역으로 지정되어 시공사, 구청과 같은 권력과 생사를 건 투쟁중인 상황이다. ‘나’뿐만 아니라 ‘강산 아파트’를 바라보는 누구든 지쳐갈 즈음 비가 내린다. 여느 때처럼 내리는 비어거니 했던 그런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비는 여느 때처럼 생각되던 그런 ‘흔한’ 비가 아니었다. 얼마간 세상과 분리되어 철거의 압박을 받지 않을 정도로 내리길 원했던 비는 이제 ‘나’의 생사를 위협하고 세상과 단절을 예고하는 비가 된 것이다. 이제 일시적인 단절을 요구했던 ‘나’는 필사적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이번엔 장마 중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체까지 함께 싣고 말이다.
어쩌면 아주 간단해 보이는 이 소설의 스토리는 놀랍게도 너무나 다양하게 읽힌다. 어떤 이는 2년 전에 있었던 ‘용산 참사’와 엮어서 주인공 ‘나’의 고군분투와 마지막 장면에서의 독백 “누군가 올 거야.”에서 희망을 발견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오롯이 주인공 ‘나’의 세계에만 집중해 독자 스스로가 만든 세계와 소설 속 ‘나’의 세계를 비교하며 볼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철저히 정치적인 입장에서 ‘용산 참사’와 엮어서 읽었다. (적어도 읽는 도중에는...) 아니, 더 엄밀히 말해서 애써 그런 입장에서 소설을 읽으려 애썼다. 그러나 눈으로 읽는 것,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그런 소설 읽기를 철저히 거부했다. 읽는 내내 소설 속 이 빌어먹을 상황이 내가 살아오는 방식과 오버랩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강산 아파트’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짓고 있을 ‘자신만의 세계이자 도피처’였다. 그리고 외부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던 쉴 새 없이 쏟아졌던 비는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내 도피처를 지키는 장치의 비(雨)로 같이 내렸다. 그러나 소설 과는 달리 언제든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한 마음 속 비는 오히려 소설보다 더 멈추기 힘들게 내렸다. 그리곤 이제 마음속에 만들어 낸 성에 갇힌 파편화 된 개인의 생사를 위험하는 수준으로 치달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현대에 가장 무서운 질병이 되어 버린 히키코모리나 우울증의 원인과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현대 소설은 불편하다. 현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소설이 단순한 소설이 아닌 자전적 소설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 속 골리앗>은 소설 속에 ‘나’가 구원을 받는지 끝내 죽음에 이르는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으면서 지금 내 삶의 미래를 스스로가 상상하게 한다. 그리곤 행동하게 한다.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을 읽으며 나는 1차적으로 할 일과 2차적으로 할 일을 구분짓게 되었다. 먼저, 2차적으로 할 일이라면 <물 속 골리앗>이 연상하게 한 ‘용산 참사’와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이 일은 나약한 일개 개인이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나 소설을 읽으면서 한번더 그 문제를 생각하는데 큰 의의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1차적 할 일은 지금 당장 조난에 빠진 나를 구하는 것이다. 세상과 단절시킨 스스로의 성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조난 된 나를 스스로 찾고 돌보는 일이 <물 속 골리앗>이 내게 던진 메시지가 아닐까 감히 상상해 본다.
김유진 <여름>-마음으로 읽는 법
이 소설은 내겐 마치 흩어진 퍼즐과 같았다. 하나하나의 장면을 일일이 연결하다 보면 결국 큰 그림이 나오는 것처럼 소설에서 묘사한 하나하나의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다 소설에 감추어둔 하나의 큰 느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이 소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시험 문제를 분석하듯이 읽어 나갔다. 그러나 여타의 소설들이 가진 갈등이나 큰 에피소드 위주에 익숙해진 나에게 여름은 소설이라기보다는 그저 Y와 B의 독백 또는 움직임을 나열한 텍스트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섣불리 Y와 B의 독백이나 행동에서 의미를 읽어내고자 노력했다. 결국, 어느 정도 읽다 머리로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읽을 때에서야 어렴풋이 그저 느낌으로 소설을 보려고 했다. 관계와 관계 사이에 순간순간 느껴지는 느낌. 悲. 凄. 소설 속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감정은 悲와 凄였다. 이들을 묘사한 행동 속에 등장하는 Y가 느낀 구토의 기운이나 B가 토해 낸 피 그리고 어떻게 들어갔는지 이해하기 힘든 수챗구멍 속 벌레. 이들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앙상블은 이상하게도 소설을 고독과 처량함이 지배하게 하였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소설 여름에는 어째서 이런 분위기가 느껴지는지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읽어가며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두었을 뿐이다.) 난생 처음 소설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Y와 B가 어떤 상황에 처해 나를 슬프게 하거나 그들을 고독한 개인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저 소설을 읽다 보니 그런 느낌에 자꾸만 둘러싸일 뿐이었다. 그런데 끝까지 한 가지 의문은 남았다. 대체 Y와 B의 관계 속의 느낌이 悲와 凄라면 소설의 제목은 어째서 여름인가 하고... 여름의 뜨겁고 역동적인 기운이 어째서 이 소설의 타이틀인건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곤 내 멋대로 소설의 이름을 겨울, 슬픔, 등과 같은 단어로 바꾸어 보았다. 고독, 슬픔의 제목을 단 김유진의 소설. 과연 나는 이런 제목 하의 소설에서 진짜 悲와 凄의 이미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아마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나는 제목만으로 소설의 느낌을 한정 지어 날 것 그대로의 悲와 凄의 느낌보단 내가 가공한 슬픔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추상화의 거장이라는 사람들의 그림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이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며 투덜거리던 내게 누군가가 말했었다. “이 그림을 머리로 보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보라.” 그 때 나는 돌아서서 비웃었다. ‘그림을 어떻게 가슴으로 보나.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를 해야지.’ 나는 아직도 그림을 가슴으로 보는 법을 모른다. 그저 실물과 똑같이 그려놓은 그림을 잘그렸다 생각하는 그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글을 읽는 방법이 꼭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또 다른 방법을 어렴풋하게나마 눈치 챈 것이다.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느끼는 방법을...
이장욱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김성중 <허공의 아이들>-현실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
이 두 소설은 마치 꿈속을 헤매는 느낌을 들게 했다. 한 소설은 소설 속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주인공의 ‘꿈’ 속 상황인지 ‘실제’ 상황인지를 분간하기 힘들게 하였다. 마치 늦은 밤 잠에서 깨었을 때 방금 본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가 혼동스러운 것처럼... 또 다른 한 소설은 소설이 그려내는 이미지가 마치 꿈에나 볼 듯한 이미지였다. 어릴 적 동화책을 읽고 잠이 들면 그날 꿈 속에서 나왔던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여러 집들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챘을 테지만 전자가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이고 후자가 허공의 아이들이다. ‘꿈’ 이라는 같은 모티프를 연상케 하는 두 소설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바실리 섬. 스례드니 15번가 98번지. 5층 7호에서 시작한다. 이 집의 원래 주인은 이반 멘슈코프. 그는 1990년대 이전 전위적인 반체제 인사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자본주의 물결이 밀어닥친 90년대 이후 그가 설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사라졌던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소설 ‘꿈’과 함께였다. 공포 소설이라는 반체제 인사가 만들어낼 법한 소설과는 전혀 동떨어진 소설을 쓰던 그가 집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 멘슈코프는 어느 날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어딘가로 훌쩍 사라져 버렸다. 소설 속 ‘나’는 멘슈코프가 사라진 그 집으로 소설을 쓰기 위해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나’가 그 집에서 지낸 닷새째 되는 날 집에 구조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서서히 이 집에 이반 멘슈코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귀신이든 사람이든 관계없이) 마침 수면제가 필요했던 ‘나’는 친구인 안드레이 에게 자문도 구하고 수면제도 얻을 겸 해서 그를 만난다. 그러나 수면제는 구했으나 그에게 서 들은 대답은 멘슈코프는 유렵으로 떠나고 없다는 사실 뿐이다. 그리곤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인한 환각에 시달릴 뿐이란 핀잔을 들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유령의 공포에 휩싼이 ‘나’ 는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멘슈코프의 방에서 텝댄스를 홀로 춘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을 읽고 나면서 나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의심이 타인을 향한 날선 경계라거나 비난이 아닌 나 스스로가 과연 무엇에 홀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철학적인 의심이었다. 소설 속 ‘나’가 의심하듯 과연 그 집에 유령이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유령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상황이 진실인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지금의 ‘나’의 행동이 머릿속이 뿌연 안개가 낀 상황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소설 속 상황을 현실의 나의 상황에 대입해 보아도 그 결과는 비슷하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대한 공포는 나 스스로를 마치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긴장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다 결국 소설 속 ‘나’처럼 누군가의 장단에 맞추어 어디에서 우스꽝스런 춤을 추고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 상황을 소설이 마치 예지몽처럼 먼저 나타나 나를 일깨우는 것이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현실의 내겐 예지몽이었다.
반면에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은 재난이라는 형식을 빌려 남는 것과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의문을 내게 던졌다.
허공의 아이들에 등장하는 소녀와 소년은 15살의 아직 어린 아이들이다. 그러나 소설 속엔 이미 소녀와 소년을 제외한 어떠한 생물도 살아있지 않다. 아니, 그들이 죽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다른 세계로 옮겨졌는지의 여부는 불명확하다. 마치 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불명확한 상황 속엔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우린 선택 된 걸까. 아님 누락된 걸까?” (p.224)
살다보면 이런 순간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잘나도 너무 못나도 이런 상황들이 차별 없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 긴 시간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맛보았던 것 같다. 10대 시절엔 공부나 학교생활 등에서 남들보다 조금 앞섰단 이유로 이런 상황을 또 20대엔 그와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이 느낌을 맛 본 것이다. 그러나 내게 이 상황에 대한 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특별히 나만 선택되거나 누락된 상황은 싫다. 어떻게든 무리에 섞여 함께 간다.’ 그러나 언제나 결과 역시 똑같았다.
선택되거나 누락되었다.
그러나 정말 싫었던 것은 역시,
‘식사량을 반으로 줄였는데도 소년의 키는 계속 자라났다. ...(중략)...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p209)
누락 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커 나간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리고 이 누락된 상황을 고스란히 나 스스로가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만큼 괴로운 것은 없게 된다.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은 내겐 평론가가 말했던 동화나 꿈에나 나올법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었다. 나는 하늘을 떠다니는 집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보다는 미래가 없는 상황에서 성장해 나가는 소년의 괴로움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년이 겪을 괴로움에 나 역시도 진저리 칠 수밖에 없었다.
김사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흘러가는대로 내맡긴 채 삶을 살아오던 내게 처음으로 나 스스로 물꼬를 바꾼 날이 있었다. 바로 대학 재수를 결정하는 날이었다. 서울에 k대학을 붙은 채 재수를 결정하고 등록금 환불 신청을 하러 가는 그 날 내 인생 처음으로 삶의 물꼬를 내 손으로 바꾸었었다. 그 결과가 잘한 결정인지 못한 결정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내 스스로 삶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후회는 없었다.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이하 움직이면)는 그러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 주인공이 어느 순간 그러한 상황 속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인해 벌어지는 에피소드이다. 무엇인가 결정해보지 못하고 아버지가 주어준대로 살아온 주인공 ‘나’는 점점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자신과 같은 공포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 대상이 불편하거나 두렵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타자를 자신과 동일한 감정(공포)에 처하게 하거나 해침으로써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래서 그는 골목길 끝 아무도 찾지 않는 국밥집을 찾아가 안정을 갈구한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자신처럼 공포를 느끼거나 슬퍼해야 할 사람인 국밥집 주인이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준비하는 상황을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해침으로써 이 상황을 타개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침 국밥을 먹으러 온 아이가 그 상황을 본 것이다. ‘나’는 이제 아이에게 자신과 같은 두려움을 강요한다. 아니 처음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를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가며 두려움 속에 빠뜨리고 안정을 찾는다. (같은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그러나 이내 ‘나’는 그 아이마저 맥주병을 휘둘러 살해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큰 비극은 ‘나’가 이제 자신이 삶이 무너져 내렸음을 너무나도 여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살해한 두 사람 앞에서 자살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을까?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되어버린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를 찾아가 모두 살해해 버림으로써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이 소설은 너무나 슬픈 분노를 담고 있다. 누군가가 이끄는 대로의 겉으로는 편안해 보이는 삶을 사는 주인공 ‘나’는 사실 편안하지 않다. 자신을 둘러 싼 사람 중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이를 제외한 어떤 이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걸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두렵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겐 화가 나기는 하나 극단적인 감정까지 치밀어 올리지는 않는다. 작금의 현대인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오는 것일까? 20대 30대가 되어서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 한 명 구하지 못하는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오늘의 현실을 김사과는 너무나도 여실히 꼬집고 있는 소설이 움직이면 이다.
김이환 <너의 변신>-변하는 사실 마저도 사랑한다는 것
이번 젊은 작가상 수상작 중 가장 핫(HOT)한 소재를 사용한 작품을 꼽으라면 누구든 주저없이 김이환의 너의 변신을 꼽을 것이다. 동성애의 성교 장면이나 생식기를 바꿔다는 등 자극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풀었다. 그러나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과연 지금의 성형세태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등장하는 ‘나’와 ‘너’ 는 같은 남자로 서로를 사랑한다. 쉽게 말해, 게이인 것이다. ‘나’는 ‘너’의 지금의 모습이 배가 나오고 볼품없어도 다른 어떤 모습도 아닌 지금의 ‘너’의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너’는 ‘나’보다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자신의 겉모습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프랑캔슈타인’박사처럼 자신을 변신시켜줄 성형외과 의사를 찾게 된다. 그리고 ‘나’의 확실한 동의 없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수술을 하게 된다. 그것이 ‘너’ 자신뿐만 아니라 ‘나’도 만족시켜줄 것이란 착각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나’가 사랑한 것은 지금의 ‘너’의 모습이지 아름답게 변한 ‘너’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두 사람의 생각은 결국 파국을 맞게 하고 한참 후에 다시 만난 ‘너’ 는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은 포기한 채 그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오르가즘만을 느끼는 상태로 자신의 몸을 던져 버린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볍지 않다는 것은 그저 눈에 띄는 동성애 코드나 지금의 성형 세태를 극단으로 밀어 꼬집은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이 소설의 매력은 과연 지금의 나의 모습과 어떤 과정을 거치든 시간이 흘러 변형된 나의 모습이 같은 가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너’ 역시도 사실 외형적인 변화가 있었을 뿐 ‘너’ 자신이 ‘너’가 아닌 것이 되거나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너’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며 멀어지게 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람의 외형이 아닌 사람 ‘자체’를 사랑 할 수 있노라고 장담하고 산다. 그러나 사실, 내가 사랑한 무엇이 사람 자체인지 그 사람의 외형인지는 확실치 않다.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랑이 그저 상대의 일시적인 겉모습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깐... 그래서 김이환 <너의 변신>이 읽으며 변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것 많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정의를 내려 본다.
정용준 <떠떠떠, 떠>-그 아픔까지도 사랑한다는 것
누가 머래도 이번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잠깐이나마 마음이 따뜻했던 소설을 뽑으라면 이 소설을 뽑을 것이다. 정용준의 떠떠떠, 떠에서는 적어도 인간 상호간의 공감과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용준의 떠떠떠, 떠에 등장하는 주인공 둘은 모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인 ‘나’와 ‘그녀’ 보다는 그들이 자신을 감추고 뒤에 숨은 ‘사자’와 ‘판다’라고 적는 것이 그들의 상태를 더 잘 설명해 줄 것이다. 소설 속 ‘사자’ 인 나는 어렸을 적부터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인식하고 싫어하게 된 것은 그의 초등학교 선생님의 ‘27’에 대한 집요한 공격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27’ 이었던 그를 그의 초등학교 선생님은 글 읽을 기회가 되면 말을 더듬는 그를 감싸주기는커녕 남들 앞에서 시키고 모욕주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의 달력에 27은 너무도 특별한 날이자 너무도 지워버리고 싶은 날로 기억되는 것이다. 이런 트라우마를 가지고 성장한 그에게 다가온 ‘판다’는 역시 아픈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다. 그녀가 가진 아픔은 기면증인지 발작인지 정확히 병명을 알 수는 없으나 그런 것에 일종으로 멀쩡하던 사람이 돌연 쓰러져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그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상처) 모습을 가진 이들이 성장한 채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알아가며 서서히 서로를 보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상처를 보듬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사랑하는 이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고 돕거나 병을 알은 체를 하지 말아 달라는 여자의 부탁은 사랑을 해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하다 못해 아프고 처절하며 글을 읽는 독자마저도 얼마나 비참할까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눈치껏 보듬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이들의 사랑 방식을 보며 그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한편을 읽었다고 하기엔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편하지 않다. 그만큼 이들의 사랑은 사랑이 내포한 일견 이기적일(?)수 있는 모습까지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을 또 다른 사랑하는 마음이 가로막는 모습은 사랑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로의 아픔을 대놓고 감싸는 모습이 사랑이라면 이들처럼 거리를 두는 것은 어째서 사랑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실제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사랑이 불타오르는 초기에 이들처럼 자신의 트라우마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는 본성을 자주 보인다. 그리고 사랑이 어느 정도 시기를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때쯤엔 마음속에 ‘사랑’이 더 크게 자리를 잡은 것인지 ‘정’이 더 크게 자리를 잡은 것인지 본인마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시간이 되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정용준의 <떠떠떠, 떠> 속의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시리고 현실적이다.
정용준이 보여준 사랑을 읽으며 마음이 따뜻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정의 할 수 있는 사랑이 대체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값싼 ‘사랑의 정의’는 너무도 이상 쪽으로 치우쳐 사랑이 가진 ‘음영’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왜일까?
이렇게 7편의 단편 소설 한편 한편에 대한 나의 감상이 끝이 났다. 전체적으로 보면 작년보다 소설이 파고든 소재들이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든다. (게다가 심사위원이신 박완서 선생님의 부고와 함께 한 작품들이라 더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1년이라는 시간동안 인간 내면을 더 어둡게 하는 사건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일까? 그러나 참 다행이게도 소설 속에서 정의하는 젊은 작가들의 젊음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게다가 정말 큰 수확이라면 김유진의 <여름>을 읽으며 알게 된 새로운 소설 감상법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책이라는 것을 언제부터 읽기 시작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모아둔 책만 1000권 가까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책을 글로만 읽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연상으로 읽는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그러던 것을 도저히 글로만 읽어서 이해하기 힘든 감정들을 그저 느껴지는대로 읽어 공감하는 경험을 처음해보았다. 게다가 지금의 내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과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 김사과의 <움직이면~>은 잊지 못할 단편 소설들이었다. (이런 작가 7명을 2년째 나에게 선물해 준 문학동네 측에도 역시 감사한다)
그러나 사실 좀 아쉬운 면이 있다면 심사위원님들이 언급한 아깝게 떨어진 8편의 작품들은 어디서 읽을 수 있는가 언급이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다음 3회때엔 이런 열망도 좀 감안해 주셨으면 한다)
이제 2년째 하고 있는 소설 속에서 만난 젊음에 대해 정의 해보려 한다.
젊음이란 나를 똑바로 보는 과정을 통해 현실을 똑바로 보며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고스스로 살아 갈 세상을 선택해 만들어가며 그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마저도 사랑하며 그 속에 있는아픔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curian-
眼光이 紙背를 徹한다.(눈빛이 종이를 뚫는다) 그것이 젊음의 이름이다. -양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