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그 나쁜사람이지 말란 법도 없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는 나쁜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때로 그 점이 표출될때 놀랄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겠다. 나 자신이 나쁘지 않다고 강변하려다 보면 ‘나쁜 일면을 가진 보통 사람 에서어나 거짓된 사람, 즉 ‘정말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이 모두 다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악역은 누가 감당하겠는가. 누가 해고 통보를 하고 누가 집달리가 되고 누가 가망 없는 환자의 수술을 맡는가.

옛사람들 역시 알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말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나 행복한 시간 모두에게 해당된다. 행복한 시간도 흘러가버리는 한순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행복을 놓친 데 대한 핑계가 되기도 한다.

현석이 떠나버린 날 혼자서 술을 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꼭 그가 떠나서만도 아니었다. 그 아이가 떠난 날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편의점으로 맥주를 사러 나가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순간 어떤 이유를 가지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 더없이 약한 짓으로생각되었다. 술이란 즐거울 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때 그냥마시는 것이다. 슬프거나 괴로울 때 마시면 그것은 술이 아니라슬픔과 괴로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을 마시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도로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분명히 통한다. 윤선에게만이 아니다. 사랑의 고백을 하려는 남자에게 "잠깐!" 하고 손바닥을 쳐들어 막으며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죠? 속일 생각은 말아요" 라며 거짓말 탐지기나 녹음기를 들이댈 여자는 없다. 모두 다 꽃 냄새를 맡듯 눈을 스르르 감는다.
윤선은 신 차장의 모든 말을 믿었다. 그것은 이상하거나 어리석은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시작돼버린 것뿐이었다.

금기를 깨는 일에 두번째, 세번째라는 말은 없다. 맨 처음‘과그 다음부터 가 있을 뿐이다. 외도의 경험이 딱 한 번 있다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다. 한 번도 없거나 많거나이다. 두번째부터는다 똑같다. 순결이란 그런 것이다. 조금씩 더럽혀지는 게 아니라단 한 번에 찢겨나간다.

사랑에 있어, 사려깊은 불안이나 비탄보다 철없이 행복을 먼저 칙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윤선의 능력이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져보는 데에 사람할 시간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랑은 누가 선물하는것이 아니다. 저절로 오는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을 하고 안 하고는 취향이며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엄연한 능력이다.

운명적 사랑이나 특별한 존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사람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최상의 것을 찾아내려는 희망이나 적극성이 없기 때문에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다. 단지 가능한것에 대한 성실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음이 분명한 행복을 추구하다가 절망하기보다는, 아예그 행복에 의미를 두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버리는 데에 익숙해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태의 생각은 나와 늘 다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종태를 사랑하지만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할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나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부분만을 보고 가진다. 기자로서의 종태, 남편으로서의 종태, 그리고 한 존재로서의 종태에 대해서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 치명적인 병이나 비밀같은 게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이 감추려 한다면 나는 알려고 하지않을 것이다. 종태라는 세계는 나의 일부와만 닿아 있다. 그것도천식과 변덕이 심한 노파가 관리하는 사설 박물관처럼 제한된 시간에만 관람이 허용된다. 그 시간이 오면 나는 기꺼이 입장권을사겠지만 미리 줄을 서서 기다리지는 않는다.

밤늦게 찾아올 때는 그만한 사정이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달갑지 않다. 윤선은 분명 비밀을 갖고 왔을 것이다. 비밀을 들어주면그 비밀의 떳떳하지 못한 부분까지 공유해야 한다.

"중매 결혼인데 무슨 사랑이야. 우리는 안 맞는 게 너무 많아."
윤선은 새로운 남자와의 연정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싶은 나머지 지금까지의 삶을 부당한 것으로 돌리려 한다. 바람 피우는 일을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성채는 감옥으로 바뀌어야 하고 남편도 문제 있는 사람이 되어줘야 하는 것이다.

문제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 문제가 없다는 말은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윤선의 남편이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란 어렵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수의 의견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인종 문제나 민족 문제 같은 거창한 담론이아니라도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 소수는 말 없는 다수‘ 라는 엉뚱한 명칭이 붙여져서 보수측 여론 조성에 이용되기 일쑤이다.

학과장은 자기를 가리킬 때 언제나 ‘우리‘ 라는 복수를 쓴다. 세(勢)를 형성하기 좋아하고 주류를 지향하는 남성적 어법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독신 여성보다는 이혼녀에게 더 호락호락하게 군다.
말 한마디를 걸어도 이혼녀 쪽에 더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 공식적인 헌 물건을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이다. 

이혼이란 특별히 딱하다거나 절망적인 일은 아니다. 결혼 생활이 인생을 새로 시작하게 해주는 ‘멋진 신세계‘가 아니듯이 이혼또한 절대 겪어서는 안 될 ‘낙원 추방‘ 은 아닌 것이다.

나는변화가 필요없다고 대답하지만 아무래도 남자답다는 뜻을 잘못알고 있는 듯한 김 교수는 여자의 ‘싫어요‘ 를 믿지 않는 기세이다. 이혼한 사람끼리 서로 상처를 핥아주라고 충고한다. 이혼이 꼭 그렇게 핥아줄 만한 외상을 입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까 하는데 박지영이 입을 연다.

그런 소설을 본 것도 같다. 행복한 신랑은 신부를 가뿐하게 안고 성의 꼭대기에 있는 신방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너무나 당연하게도 신부는 짐짝이 된다. 소금 가마니처럼 미련하고 묵직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신랑은 저주를 퍼붓는다. 그런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뻔한 이야기였다. 제 흥에겨워 시작한 일을 감당하지 못한 주제에 제멋대로 비극적 결론에도달하는 신랑을 비웃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제 발로 걷고 싶어하는지 주장하다가 신랑이 귀머거리인 탓에 목이 쉬었는지, 그 소설에서 신부의 입장은 표현된 바 없어 모르겠다.

쏟아지는 불빛 안에서 그가 나를 안는다.
어둠 속이 아니라 빛이 들어찬 환한 세상에서. 내가 그것을 원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때 ‘샤카‘라는 식당 옆의 서점에서 저 달력을 사주며 애리가 말했다. 언니, 달력을 선물하면 일 년 동안은 그 사람에게 기억될 수가 있어.

그러나 내 달력은 동그라미 하나 없이 깨끗하다. 시간은 나를통과해 지나가는 순간들의 체적일 뿐이다. 나는 시간을 아무것도남겨놓지 않은 채 그냥 흘려보내는 편을 좋아한다.

이제야 기억난다. 그때 나는 애리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그리고일 년이 지나면 달력과 함께 버려지는 거니? 애리는 새 달력을 선물하면 된다고 깔깔 웃었다. 웃음을 그치고는, 일 년이 지난 뒤까지도 그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안 변했다면, 이라고 덧붙였던 것 같다.

너는 내 몸 안에 있어. 너와 내가 한몸이란 뜻이지. 너는 그곳에서 둥지의 새가 노란 주둥이를 벌리고 있다가 어미로부터 벌레를 받아먹는 것처럼 조금 전 내가 마신 우유 따위의 음식을 나와 함께 나눠 먹으며 자라는 거야, 너는 모든 일을 나를 따라서 하게 돼. 함께 움직이고 함께 느끼고, 그런 일은 아마 없겠지만 만약 내가죽는다면 너도 함께 죽게 돼. 너는 완전히 내게 속해 있는 거야.
이 세상에 진정으로 누군가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모태뿐이거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