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그 나쁜사람이지 말란 법도 없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는 나쁜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때로 그 점이 표출될때 놀랄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겠다. 나 자신이 나쁘지 않다고 강변하려다 보면 ‘나쁜 일면을 가진 보통 사람 에서어나 거짓된 사람, 즉 ‘정말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이 모두 다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악역은 누가 감당하겠는가. 누가 해고 통보를 하고 누가 집달리가 되고 누가 가망 없는 환자의 수술을 맡는가.
옛사람들 역시 알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말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나 행복한 시간 모두에게 해당된다. 행복한 시간도 흘러가버리는 한순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행복을 놓친 데 대한 핑계가 되기도 한다.
현석이 떠나버린 날 혼자서 술을 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꼭 그가 떠나서만도 아니었다. 그 아이가 떠난 날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편의점으로 맥주를 사러 나가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순간 어떤 이유를 가지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 더없이 약한 짓으로생각되었다. 술이란 즐거울 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때 그냥마시는 것이다. 슬프거나 괴로울 때 마시면 그것은 술이 아니라슬픔과 괴로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을 마시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도로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분명히 통한다. 윤선에게만이 아니다. 사랑의 고백을 하려는 남자에게 "잠깐!" 하고 손바닥을 쳐들어 막으며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죠? 속일 생각은 말아요" 라며 거짓말 탐지기나 녹음기를 들이댈 여자는 없다. 모두 다 꽃 냄새를 맡듯 눈을 스르르 감는다. 윤선은 신 차장의 모든 말을 믿었다. 그것은 이상하거나 어리석은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시작돼버린 것뿐이었다.
금기를 깨는 일에 두번째, 세번째라는 말은 없다. 맨 처음‘과그 다음부터 가 있을 뿐이다. 외도의 경험이 딱 한 번 있다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다. 한 번도 없거나 많거나이다. 두번째부터는다 똑같다. 순결이란 그런 것이다. 조금씩 더럽혀지는 게 아니라단 한 번에 찢겨나간다.
사랑에 있어, 사려깊은 불안이나 비탄보다 철없이 행복을 먼저 칙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윤선의 능력이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져보는 데에 사람할 시간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랑은 누가 선물하는것이 아니다. 저절로 오는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을 하고 안 하고는 취향이며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엄연한 능력이다.
운명적 사랑이나 특별한 존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사람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최상의 것을 찾아내려는 희망이나 적극성이 없기 때문에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다. 단지 가능한것에 대한 성실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음이 분명한 행복을 추구하다가 절망하기보다는, 아예그 행복에 의미를 두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버리는 데에 익숙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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