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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필터이자 고통의 확성기가 된다는 선천적 모순에 휩싸여, 기자들은 매 순간 저울질을 한다. 어떤 고통을 보여줄지, 이보여주기가 윤리적인지, 혹은 어떤 고통을 가릴지, 이 가림이 윤리적인지에 대해. 실패하면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지도모르는 이 저울질은 하릴없이 아슬아슬하다.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 변화하는 기준에 부응하는 일은 언뜻 불가능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시도를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고통의 저널리즘이안방에서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볼거리로 전락해 남의 고통을 무례하고 폭력적으로 소비하는 유해한 저널리즘이 될지,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끔 하고 사회적 공감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윤리적 저널리즘이 될지가 이 개별의 저울질에 달려있어서다. 이 저울질이 끝내 성공할지는 한 고통이 발생하고 보도가 시작되는 순간마다 매번 정말이지 매번, 미지의 영역이다.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영상을 유포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일부 방송사가 이 현장 영상들을 뉴스에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단지 영상에 찍힌 모습의 참혹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지가 끔찍해 보인다는 것이 늘 그 장면을 볼 수 없는 보면 안 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영상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에는 피해자들의 초상권과 더불어 촬영자들의 태도가 큰 영향을 줬다고 본다. 구조 인력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충분히 도울 수 있는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촬영자들이 구조 대신 촬영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보는 이들을 괴롭혔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사고현장에 서서 ‘구경하는 눈‘을 간접 체험했다. 각자의 상황이 다양했으리라 추측하지만, 죽음을 구경하는 카메라가 이미지를 보는 사람까지 구경꾼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소방청 119 대응국장은 참사 열흘 뒤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사망자들의 사진을 촬영하는 등 현장 지휘와 질서유지에 방해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목격과 구경을 구분하는 기준은 있을까. 구경꾼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부단히 내부 단속을 해온 언론의 경우는어떨까.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마련된 한국기자협회의 재난 보도준칙에 관련 규정이 나와 있다.



제4조(인명구조와 수습 우선 재난 현장 취재는 긴급한 인명 구조와 보호, 사후수습 등의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재난관리 당국이 설정한 폴리스라인, 포토라인 등 취재 제한은 특별한 사유가없는 한 준수한다.

제7조(비윤리적 취재 금지) 취재를 할 때는 신분을 밝혀야 한다. 신분 사칭이나비밀 촬영 및 녹음 등 비윤리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한 취재는 하지 않는다.

제15조(선정적 보도 지양) 피해자 가족의 오열 등 과도한 감정 표현, 부적절한 신체 노출, 재난 상황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 흥미 위주의 보도 등은 하지않는다. 자극적인 장면의 단순 반복 보도는 지양한다. 불필요한 반발이나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지나친 근접 취재도 자제한다.

제18조(피해자 보호) 취재 보도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 등 피해자와 그가족,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나 희망사항을 존중하고, 그들의 명예나 사생활, 심리적 안정 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제19조(신상 공개 주의)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의 상세한 신상 공개는 인격권이나 초상권, 사생활 침해 등의 우려가 있으므로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준칙에 따르면 재난 현장에서 촬영은 인명 구조 등 긴급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허용된다. 또 피해자 가족의 오열 등감정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신체 노출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홍미 위주의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하거나 자극적인 장면을 단순하게 반복하여 내보내는 것은 지양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의 신상이 공개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당시 현장에서 찍힌 대부분의 영상들은 이 준칙을따라야 하는 언론인이 찍은 건 아니었지만, 이 모든 요소와 대척점에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카메라‘에 관한 오랜 공포가 있다. 찍고 있지만 상황을 냉담하게 기록할 뿐,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카메라. 이 공포는 카메라를 꺼내들어 남의 절박한 고통을 보고 듣고 기록하고 생중계하는 순간부터 시작돼 편집하고 재구성한 뒤 널리 퍼뜨린 이후까지 이어진다. 공포의 근원은 이걸 찍어서 보여준 뒤에도 내가, 이걸 본 뒤에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못할 수도있다는 데 있다.
저널리즘에서 직접적 행동의 책무는 어쩌면 매우 의도적으로도려내져 있다.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저널리즘의 특성상,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적절한 거리를 둔 채 감정을 섞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실무는 고통을 보여주고 전달하는 데서 대체로 멈추곤 한다.

기자이자 작가인 조앤 디디온Joan Diction은 "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비단 글뿐인가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매체를 활용하든 이 혐의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촬영이나 글쓰기 등으로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일, 혹은 전달하는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건 지나치게단순한 비판일 것이다. 불완전한 시도라고 해서 근본부터 잘못되었다고 일갈하고 마는 것은 해결책 없는 공허한 진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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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동성결혼이 법제화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전에 언니가 병에 걸렸는데 내가 법적 보호자가아니라서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해주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바뀌겠지, 이런 커다란 파도 앞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 하고 손놓고 있기엔 나의 삶에 직접적으로 끼치는 영향이 너무 컸다.

일례로, 중학생 때 보던 한 만화에 심취하여 내가 외계 행성에서 온 우주인이라는 말을 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웃어넘기는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당시 언어 담당 선생님은 그이야기에 대한 에세이를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서, 나는 대체 언제부터 레즈비언이었던 걸까? 처음으로 여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때?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칭하기 시작했을 때?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그 질문을 한 주체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이성애자는 자신이 언제부터 이성애자였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걸까? 하긴, 나한테 굳이 그런 질문을 한 것을 보면 그러함이 분명하다. 설마 본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레즈비언은 소수자니까 특수한 계기가 있을 거라고 무례하게 지레짐작하지는 않았을것이다. 자신의 정체성 확립 시점에 대해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성애자인 나는, 계속 성찰을 반복할 수밖에.

팁 첫째, 커밍아웃은 자기소개다. 회사 면접에 빗대긴 했지만,
커밍아웃은 누구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나를 받아달라는 구애의 행위가 아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보 전달에 가깝다.

흔히 보수적인 사고관을 가진 사람들은 동성애를 잘 수용하지못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보수성을 너무 단편적으로 바라본 시각이다. 보수적인 가치 중 물론 남녀간의 사랑과 정상 가족의 유지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우정, 의리, 그리고 집단주의적 사고 등도 있다. 따라서 동성애자에게 호의적인 환경을 미리 조성해놓았다면 보수적인 사람들도 기꺼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몇 년 전 영국에 출장을 갔을 때, 히스로 공항 입국 게이트에서한 광고가 눈에 띄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한 은행의 포스터였다. 노인이 정원에서 손자와 산책하는 장면, 한 아이가 귀여운 고양이와 노는 장면 등 일상적 풍경이 나열된 뒤 마지막으로 레즈비언커플의 결혼식 장면 위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야망에 대한 이야기다(This is the story of humanambition)."
상투적인 감성의 제작물이었다. 일상적인 행복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환기하며 생활 밀착적인 이미지를 가져가려는 것이겠지. 그러나 나는 이 글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친구에게 연락했다. 정말로 그렇다고, 결혼은 나에게야망이라고

"부장님, 제가 이런 분께 무슨 추가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문제라면, 언니에 비해 내가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인 점이었다. 소득도 적어, 학벌도 부족해, 외모가 대단히 훌륭하지도 않아, 심지어 인성도 더 못된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만, 부족한 건부족한 거였다. 내 얘기를 찬찬히 듣던 부장님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무슨 소리예요, 규진, 많은 가치를 전달할 수 있죠. 언니 말 잘듣기, 귀여움을 갈고닦기, 긍정적으로 말하기, 약속에 늦지 않기?"
존경하는 현명한 부장님의 고견을 해석해보자면 즉 괜히 열등감을 표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내 매력과 올바른 태도로 승부하라는 얘기 같았다. 하긴, 언니가 소득이 높은 사람을 만나고싶었다면 내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겠지. 나의 높은 자존감과 거부할 수 없는 귀여움에 빠졌나보다. 그래, 연하는 직진이지!
"언니, 두 번 봐서 좋으니까 세 번 봐도 또 좋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나랑 만나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봐도 내가 제일 괜찮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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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향한 생각은 죽음 이외의 것들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이해하게 했다.

안개 속으로 사라져서 다시는 세상 밖으로나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렸을 때, 아버지가 남긴 문제들은 해결이 되었던가. 왜엄마는 정말이지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할 텐데도 늘 웃고 씩씩한것일까. 나는 안개 속에서 생각했다. 아버지와 오빠를 그리고 엄마와 나를 반장과 담임과 세상 사람들을, 그러느라고 나는 안개가걷힌 줄도 몰랐다. 나는 안개가 말끔히 걷힌 강가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내가 안개 속에 있을 때 세상 밖 소리라고 여기던 소리들의 주인공들 또한 나와 같이 강가에 있던 사람들임을.

나는 얼른 책가방을 등에 메었다. 그리고 강둑을 뛰었다. 안개가 걷히니 모든 것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나는 뛸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그러나, 부끄러움의 정체를 나는 굳이 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뛰는 것뿐. 아침햇살이 마악 퍼지기 시작하는 세상 속으로 나는 달려 나갔다. 그러면서 가만히 읊조렸다. 강가에 앉은 남자의 말을.

나. 는. 죽. 지. 않. 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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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는 엄마가 사랑이 많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해주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엄마처럼 섬세한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면서, 엄마는 아파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아파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엄마와 함께 있을 때도 아줌마는 엄마에 대한 칭찬을 잘했다. 웃는 모습이 예뻐서 함께 있으면 방이 다 환해지는 것 같다. 두상이 동그라니 예쁘다, 걸음걸이가 사뿐하다, 옷맵시가 좋다, 앞니가 귀엽다. 듣기에 참 좋은 목소리다… 
아줌마는 이런 이야기를 망설이지 않고 했고 그럴 때면 엄마는 얼굴을 붉혔다. 아줌마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몰랐던 엄마의 좋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고 엄마가 내 엄마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졌다.

응웬 아줌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봤다. 한국에서 다니던 학교는 어땠는지,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는지, 바다를 가보았는지, 한국의 바다는 어떤 색인지, 가장 좋아하는 독일 음식은 무엇인지. 아줌마의 질문은 공부는 잘하냐, 왜 이렇게 키가 작냐, 커서 뭐할거냐 물어대는 다른 어른들의 것과는 달랐다.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있다는 기쁨에 나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아줌마 앞에서떠들어댔다.

그녀는 아빠의 태도에 실망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라는 마음이 그날 밤, 아줌마와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갈라놓았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더는 다치고 싶지도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

엄마는 투이네 식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열세 살이었던 나조차도 투이네 가족과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직감했지만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몇 번이나 응웬 아줌마를 찾아갔다. 겉으로 달라진건 없었다. 아줌마는 우리들에게 차와 간식을 내놓았고 우리는 예전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아줌마가 그 시간을 그저 견디고 있다는느낌을 받았다. 엄마는 어색함을 이겨내려는 듯이 평소보다 더 많은말을 했다. 그럴 때 엄마의 부정확한 독일어는 자주 부서졌고 당황한엄마의 문장은 어떤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서로 연결되지 못하는 단어들은 부유했고 시제와 성性 수가 일치하지 않는 문장은 꾸며낸 유머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엄마의 말을 듣는 아줌마는 지쳐 보였다. 아무리 아줌마가 마음을 감추려고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도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엄마가 떠났을 때, 그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앤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우울했었지.‘ ‘영리한 애는 아니었던 것 같아.‘ 큰이모와 작은이모마저도 엄마를 그런 식으로 회상할 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던 응웬 아줌마를 떠올렸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아줌마라고 해서 엄마의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엄마의 약한 면은 보지 못했을까.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곁을 줬다. 아줌마가 준 마음의 한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하게 돌보았을까. 그것이 엄마의 잘못도아닌 일로 부서져버렸을 때 엄마가 느꼈던 절망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 이후로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쉽게사귀지 못했었다. 그리웠을 것이다. 말로는 그때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준 응웬 아줌마를엄마는 오래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저, 가끔 말을 들어주는 친구라도 될 일이었다. 아주 조금이라도곁을 줄 일이었다. 그녀가 내 엄마여서가 아니라 오래 외로웠던 사람이었기에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 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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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서도 밀려나서, 역시나 대양에서 밀려난 바다의 가장자리를 만나는 기분이라고 외톨이들끼리 만나서 발가락이나 적시는 그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했다.

쇼코는 ‘언젠가는‘이라고 말했다. 열일곱 살에도, 스물세 살에도.

쇼코의 고모는 실질적인 가장이었지만 외박이 잦은 일을 해서 자주집을 비운다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자기를 공주처럼 대접해준다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한 여자아이인 줄 굳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나는 종교이고, 하나뿐인 세계야. 그런 생각을 할때마다 죽어버리고 싶어."

쇼코는 나를 보고 조용히 웃었다.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였다. 다커버린 어른이 유치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웃는 엄마와 말이 많은 할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이런 사람들을 바깥에서 만났다면 나는 주저 않고 좋은어른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할아버지는 늘 무기력했고 사람을 사귀는 일에 서툴렀다. 나는 엄마와 할아버지를 작동하지 않아 해마다 먼지가 쌓이고 색이 바래가는 괘종시계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변화할 의지도, 아무런 목표도 없이그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사람들이라고.

가족은 언제나 가장 낯선 사람들 같았다. 어쩌면 쇼코는 나의 할아버지에 대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알았을지도 모른다.

쇼코는 할아버지에게 늘 밝은 내용의 편지를 적어 보내는 것 같았다. 달리기 경주에서 일등을 했다. 고모와 맛있는 카레집을 찾아갔다.휴일에 친구들과 보트놀이를 했다. 북해도를 여행했다. 할아버지에게보내는 쇼코의 이야기는 그림엽서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었다.

반면 내가 받은 편지에는 어두운 이야기뿐이었다.

쇼코에게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겉보기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쇼코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내밀한 우정을 쌓는지 알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속을 열어 보이지 못하는 대신 살을 부딪치며 만날 필요가 없는 외국인에게 외국어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 만약 내가 일본인이었고, 쇼코의 주변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쇼코는 내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쇼코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특별히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단지,한군데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막연한 느낌은 있었다. 쇼코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가서 살 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으니까. 그래서 쇼코가 아직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쇼코는 마루에 앉아 얼음물을 마시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그러고는 타박타박 걸어서 조금 거리를 둔 채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쇼코에게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정면을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쇼코는 앞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널 보러 한국으로 갈 줄 알았는데."

나는 쇼코의 옆얼굴을 보며 말했다.

"내가 먼저 와서 실망했지."

쇼코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아주 작게 열고 한숨을 쉬듯 말했다.

"네가 그리웠어."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었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쇼코는 그림을 그릴까봐, 아니, 글을 써볼까 라고 말하면서 예의 그 예의바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렸을 때 쇼코가 지었던 웃음과 같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차갑고 어른스럽게 보이던 그 웃음에서 나는 쇼코의 나약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읽었다. 쇼코를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쇼코는 약했다.

분명히 쇼코도 그때 느끼고 있었겠지. 내가 쇼코보다 정신적으로더 강하고 힘센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마음 한쪽이 부서져버린 한 인간을 보며 나는 무슨 일인지 이상한 우월감에 휩싸였다.

그 작은 집에서 인형처럼 붙박여 있던 쇼코의 모습이 유령처럼 언뜻언뜻 눈앞을 스쳤다. 물리치료사가 되었겠지. 그리고 돈을 벌기 시작했을 테고. 당시의 나는 쇼코가 너무 쉬운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스물세 살에 벌써 직업을 정하고 태어난 소음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건 형편없는 선택이라고.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점점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고, 엄마와 할아버지를 찾아가지도, 따로 전화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면서 영화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오만이 그 사람들을얼마나 쓸쓸하게 했을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나는 이 글에서 여러 번 할아버지답지 않다는 말을 썼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생각한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져도 나는 그의 삶의 5분의 3을 알지못한다.
할아버지도 결국은 그저 내 방을 잠시 지나쳐가는 손님일 뿐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낯선 길에서 비를 맞아야 했던 노인, 다른 사람들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실패자 중의 실패자로 기억될 그 낯선 노인이 내 눈앞에 앉아서 딴청을 피웠다.

하나뿐인 이단 우산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성격 급한 할아버지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펴지는 우산이었지만 버튼도 듣지 않았고 수동으로 펴지지도 않았다. 비는 굵은 방울로 떨어져내렸다. 이런 날씨에 우산 하나 제대로 챙겨오지 않은 할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골목 끝에 편의점이 있었지만, 나에게는우산을 살 만한 돈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뒤를 보더니 손을 흔들며 괜히 웃었다. 나는 고장난 우산을 들고 할아버지에게 뛰어갔다. 울음을겨우겨우 참으면서 할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할아버지에게 우산을 건넸다.

"이딴거 필요 없다. 비가 많이 오는 것두 아닌데. 야, 왜 울고 그래?"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다시 우산을 뺏어서 우산을 펴려고 낑낑댔다.

"우산이 우산이 펴지질 않잖아. 저번만 해도 잘 됐는데, 꼭 필요하면 이래."

"눈물도 쌨다. 이리 줘."

할아버지가 우산을 조금 만지자 꼼짝도 않던 우산대가 활짝 펴졌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나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할아버지가쓰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정류장까지라도 같이 가자고 하니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그냥 이대로 가겠다고말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이 빨개졌다. 울고 싶으니까 그냥풀어달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할아버지는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아빠는 삼십 년을 집에서만 보냈어."

엄마는 할아버지의 뒤통수에 닳아서 내피가 드러난 소파를 만지며말했다.

"믿어지니? 네가 살아온 시간만큼이야."

엄마는 베란다 귀퉁이의 고무나무를 가리켰다.

"저 화분과 다를 바가 없었어. 그게.…… 얼마나 내 마음을 짓눌렀는지 너는 모를 거야."

쇼코는 우리 엄마 집에는 들르지 않았다. 집 근처의 천변에도 쇼코가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던 나의 모교에도 같이 가지 않았다.

"다음에 갈게. 그래야 또 올 이유가 생기지."

나는 쇼코를 김포공항까지 데려다줬다. 출국장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포옹했다. 몸은 약간 떨어져서 팔로 서로의 등을 두르는 식의 포옹이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던 쇼코의 모습을 기억한다. 보딩패스를 내밀고자동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는 쇼코의 얼굴.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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