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의견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인종 문제나 민족 문제 같은 거창한 담론이아니라도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 소수는 말 없는 다수‘ 라는 엉뚱한 명칭이 붙여져서 보수측 여론 조성에 이용되기 일쑤이다.

학과장은 자기를 가리킬 때 언제나 ‘우리‘ 라는 복수를 쓴다. 세(勢)를 형성하기 좋아하고 주류를 지향하는 남성적 어법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독신 여성보다는 이혼녀에게 더 호락호락하게 군다.
말 한마디를 걸어도 이혼녀 쪽에 더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 공식적인 헌 물건을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이다. 

이혼이란 특별히 딱하다거나 절망적인 일은 아니다. 결혼 생활이 인생을 새로 시작하게 해주는 ‘멋진 신세계‘가 아니듯이 이혼또한 절대 겪어서는 안 될 ‘낙원 추방‘ 은 아닌 것이다.

나는변화가 필요없다고 대답하지만 아무래도 남자답다는 뜻을 잘못알고 있는 듯한 김 교수는 여자의 ‘싫어요‘ 를 믿지 않는 기세이다. 이혼한 사람끼리 서로 상처를 핥아주라고 충고한다. 이혼이 꼭 그렇게 핥아줄 만한 외상을 입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까 하는데 박지영이 입을 연다.

그런 소설을 본 것도 같다. 행복한 신랑은 신부를 가뿐하게 안고 성의 꼭대기에 있는 신방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너무나 당연하게도 신부는 짐짝이 된다. 소금 가마니처럼 미련하고 묵직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신랑은 저주를 퍼붓는다. 그런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뻔한 이야기였다. 제 흥에겨워 시작한 일을 감당하지 못한 주제에 제멋대로 비극적 결론에도달하는 신랑을 비웃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제 발로 걷고 싶어하는지 주장하다가 신랑이 귀머거리인 탓에 목이 쉬었는지, 그 소설에서 신부의 입장은 표현된 바 없어 모르겠다.

쏟아지는 불빛 안에서 그가 나를 안는다.
어둠 속이 아니라 빛이 들어찬 환한 세상에서. 내가 그것을 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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