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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괴이 ㅣ 비채 미스터리 앤솔러지
조영주 외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평점 :
『십자가의 괴이』는 '십자가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미스터리 사건을 중심으로 여섯 명의 작가가 각기 다른 시선으로 재구성한 단편 앤솔러지입니다. 호러, 추리, SF 등 다양한 장르적 특색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사건의 본질을 탐구하게 하면서도 각 이야기의 반전과 서늘한 상상력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십자가 사건'을 둘러싼 각기 다른 해석들이 서로 다른 장르와 분위기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영주 작가의 「영감」은 창작자의 고뇌를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키며 독특한 자기반영적 접근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추상적인 영감이 현실 속 사건과 맞물리며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흥미진진했습니다.
박상민 작가의 「그날 밤 나는」에서는 딸을 잃은 슬픔에 잠식된 주인공이 의문의 초대장을 받으면서 시작되는 서사가 매우 흡인력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미스터리의 재미를 넘어서 개인적 상실과 고통에 대한 감정적 깊이를 더해줍니다. 특히 P.102에 나온 “스스로 예수와 같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며 생의 의미를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라는 구절은 독자가 고통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전건우 작가의 「도적들의 십자가」는 초자연적 요소와 현실적 공포를 적절히 결합하여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P.138에서 묘사된 주인공의 절망적인 상태는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그것은 나를 알고 있었다"라는 대목은 압도적인 공포를 전달하며, 독자가 숨죽이며 페이지를 넘기게 만듭니다.
이 책은 단순히 사건을 풀어가는 추리 소설이라기보다, ‘십자가’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과 고통, 그리고 구원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주원규 작가의 「십자가의 길」에서는 삶의 고통과 죄의식에 얽힌 인간의 심리가 깊이 탐구됩니다. 주인공 규가 십자가의 고행을 자신의 내면적 구원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독특하면서도 공감되는 지점이 많았습니다.
김세화 작가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서는 사건을 취재하며 점점 깊은 수렁에 빠지는 기자의 심리가 잘 그려졌습니다. 특히 P.245-246의 자살의 정교한 재현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이토록 치밀하게 연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차무진 작가의 「파츠」는 고립된 군사적 공간과 초현실적 공포가 융합된 독특한 분위기로 끝을 맺습니다. P.302의 십자가를 지켜보는 장면에서는, 관찰자가 사건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단순히 관찰자가 아니라 그 현장의 일부가 된 듯한 몰입감을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괴이』는 단순한 미스터리 소설집이 아닙니다. 각기 다른 색깔의 단편들은 사건의 진실을 명확히 규명하려 하기보다, 십자가라는 고통과 희생의 상징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어둠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모든 이야기가 사건의 중심에서 시작하지만, 각 작가의 해석은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와 공포를 사랑하는 독자뿐만 아니라, 인간 본질과 구원의 의미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강력히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