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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기담 사계절 1318 문고 95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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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청소년소설의 대가 이금이작가를 알게된 것은 독일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읽고난 후였다. 성장소설, 청소년소설이 재미있다고 느끼고 찾아볼 무렵 내가 읽은 책들을 점검해보니 죄다 외국작가의 작품 뿐이었다. 국내소설로는 청소년소설로 완전히 분류되지 않기도 하지만 성장소설의 일종으로 평가받는 박상률의 작품들이 다였다. <모모>라는 책을 읽고 우리나라에도 이 계열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작가가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찾아낸 작가가 이금이였다. <너도 하늘 말라리아야>와 <유진과 유진>을 읽으면서 한국작가가 쓸수 있는 한국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란걸 느꼈고, 쉽지만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작가의 필체도 마음에 쏙 들었다. <청춘기담>은 이처럼 작가에 대한 기대를 한껏 품고 펼치게 된 책이었다.

 

 

사실 난 맨처음 이책의 제목을 '청춘기' 담으로 읽었다. 청춘기의 이야기라는 담백한 제목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자로 쓰여있진 않지만 청춘들의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이 책 뒷면의 글을 보면 원래 작가의 의도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결국 '청춘기의 이야기= 청춘들의 기이한 이야기'라는 걸 느낄수 있었다. 작가노트에 말처럼 요즘은 '청춘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고 괴상한 일이 되어버린 시대'인 것이다. 작가는 책의 이야기들이 기담이라는 제목이 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것을 걱정했지만 나는 한편한편 읽을때마다 매번 가슴이 덜컹이고 울컥했다. 전체적으론 무겁지 않고 순간순간 유쾌하기도 하지만 말미마다 한가지씩 반전 혹은 무거운 감정덩어리를 터뜨리고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각각의 단편이 너무 다르면서도 좋았기에 각 편마다 짧게 리뷰를 남긴다.

 

 

<셔틀보이>
핸드폰을 바꾸고 그 번호의 전주인에게 보내진 문자가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준다면? 비슷한 상상을 해본적이 있었다. 실제로 부재하고 있는 존재(엄마)에게 이런 문자를 받는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가르쳐주는 이 없이 엇나가는 주인공이 마지막에 보내는 답장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검은 거울>
이 역시 비슷한 상상을 한적 있었다. 일본 드라마중에 아빠와 딸의 몸이 바뀌고 서로의 고충을 알아가며 화해하는 내용의 드라마도 생각났다. 이 소설은 그 드라마처럼 훈훈하지 않다는 게 반전. 엄마와 딸의 몸이 바뀌지만 각자 바뀐것을 말하지 않고 서로인척 일상을 이어간다. 딸의 시점으로 이어지던 소설 말미의 엄마의 외침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1705호>
요즘 세상에는 사소한 행동하나로 남의 평가를 받는게 무서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한 가족이 모두 목격한, 한번 이상 스쳐 지난 그 소년에게 단 한사람이라도 인사를 건냈다면 어땠을까. 귀신보다 산 사람이 무서운 세상이라도 결국 사람끼리 모여 살고 있으면서, 이웃을 포함해서 우연이이라도 몇번이고 마주친 주변의 불안한 존재에게 너무 무관심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되었다.

 

<나이에 관한 고찰>
'마음나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와닿았다.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의 마음나이는 몇살이나 될까.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본문 중126p)은 분명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있던 것일텐데, 어른이 되기도 전에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혹은 그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조차 잃어버리고 사는 아이들의 삶은 얼마나 팍팍할까.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두더지와 대화하고 비둘기부부의 대화를 알아들을만큼의 순수한 감수성을 지닌 아이로 난 자라왔을까, 내 아이가 생긴다면 그런 아이로 키울수 있을까. 단순한 서울과 시골이라는 공간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어른들과 사회가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아이들의 마음나이를 갈아먹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잔뜩 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천국의 아이들>
아이들은 굉장히 여리지만 또 굉장히 강하다는 걸 느꼈다. 오히려 이시대의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연약하고 어리석은지도 모른다. 본인들이 그렇기에 아이들을 더 강하게 키우고 싶어 속박하고 힘겹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모범생에 속하는 주인공이 컨닝사건을 계기로 집을 나가 찾은 곳이 소문이 무성한 '파라다이스'다. 소문만 듣고 겁없이 찾아간 그곳에서 파랑머리 소녀와 블루라는 고양이를 만나게 되고, 결국 그 소녀를 핑계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각각의 방으로 흩어져 저마다의 이유로 울고 있는 세 가족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즐거운 유니하우스>
드라마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출생의 비밀, 그 이야기가 그다지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보다 그저 부모와 아이간의 소통, 화해에 관해 두 가족의 이야기가 묘하게 겹쳐 만들어내는 감동이 크기 때문인것 같다. 기이하지만 괴기스럽지 않은, 오히려 사랑스럽고 애틋한 이야기였다. 쉽지 않겠지만 갈등하고 있는 가족이 있다면 타인보다 먼저 그 가족과 진심을 터놓고 말해봐야하지 않을까. 아이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범위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느끼고 있으며, 어른은 아이가 생각하는것보다 약하고 겁이 많다는 걸 서로 미리 알아두면 좋을텐데.

 

 


앞서 밝힌것처럼 기대를 잔뜩하고 읽었는데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책이었다. 이금이 작가의 소설은 참 청소년소설스럽다. 청소년들이 읽어도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고, 청소년에 관심이 있는 부모나 모든 성인들이 읽어도 재미와 공감, 교훈 등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바쁜 요즘 짬내어 읽기 좋았던 단편소설집이라는 장점도 있다. 나보다 어린 학생들에게 책을 추천할때가 참 어려웠었는데 이제 주저없이 추천해줄수 있는 책을 하나 알게된것 같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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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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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한 색으로 칠해진 표지에 고양이가 빼꼼히 얼굴을 반쯤 내밀고 있다. 그런데 표지를 열자마자 있는 화려한 색상의 그림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책을 읽다보면야 알로하의 셔츠에나 있을 법한 그림이군-하고 납득하게 될테지만, 조금더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생과사가 이런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얌전한 척 살았지만 그 안에는 얼마나 열정적이고 다채로운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가, 혹은 그런 선택들과의 갈등을 겪었는가. 만화같기도 하고 꿈같기도 한 소설책이다.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이야기는 하나하나에 솔직하고 엉성함이 묻어나서 이거 소설인데 이렇게까지 쓰여있어도 되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책을 읽다가 초반에 느꼈던 희한한 점이 하나 있다. 번역과 각주에 대한 것인데, 이렇게 발랄하고 어찌보면 가벼운 분위기의 소설에서 굳이 순 우리말을 넣어야한걸까하는 의문이다. 순우리말을 쓰는거야 당연히 좋은일이지만 순우리말이면서도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들이 있을텐데 굳이 이야기 중간중간에 주석을 따라 시선을 돌려야할 정도의 설명이 필요한 단어를 써야 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일본어가 한자로 쓰여진 언어이다보니 우리말로 고치기에 적당한 순우리말을 찾으려 더 애쓰다 그렇게 된걸까 궁금해진다.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다면. 상상해본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

인간인 이상.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치사율 100퍼센트다.

그렇게 보면, 죽음=불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죽음이 행복이냐 불행이냐는 어떻게 살아왔느냐라는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본문 중 193p)


 

책의 목차만 봐도 책의 줄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악마가 찾아왔고, 세상에서 전화와 영화와 시계와 고양이가 차례로 (아마도)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나' 역시 사라질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시한부판정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실감하기도 전에 악마가 찾아온다. 사실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악마란 존재는 주인공이 죽기 전에 여러가지 의미를 찾게끔 만들어주는 중개인 혹은 선각자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어쩌면 방해자역할을 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악마에 의해 하루하루 생을 연장해가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차례의 맨 마지막이니까말이다.

 

도처에 널려있고 일반적인 중요도가 그리 높지 않은 물건이라도 개인의 인생에서 영향을 미친 정도나 친숙도가 높은 물건이 사라지는건 그 개인에겐 엄청난 영향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모자를 만들고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물론 그는 모자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너의 생을 늘려줄테니 이 세상에서 모자를 없애겠다고 하면 그는 예스라고 답할수 있을까. 사람은 지금가지의 자신 즉 과거에 휘둘리는 존재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주인공이 자신에게 추억이된 여러 영화가 없어진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나라고 할수 있는걸까 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특히. 앞으로의 생이 길다면 자신의 의미를 미래에서 찾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고작 몇일의 생을 연장하면서 그를 위해 내 삶의 의미(그 일부라고 해도)를 없애버린다면 과연 그 몇일동안의 생의연장은 과연 의미가 있는걸까. 생에 대한 집착 및 욕구는 그렇게도 강한 본능인걸까. 악마 알로하가 하는 "그러면 무엇이라면 없앨건데요?" 라는 질문에 주인공이 고민하는 내용 중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은 물과 음식과 잠자리가 있으면 죽지는 않는다' 라는 말. 맞는 말이기에 무서운 말이다. 인간이기에 그 이상을 바라고 꿈꾸며 그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믿고 행한다. 삶의 질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을 듣고 난 후 악마의 혼잣말이 의미심장하다.

 "또...... 하느님에게 지고말았군. 정말이지 인간이란 존재는......"


사실 이 이야기는 줄거리상 죽음과 삶에 대한 사색 및 고찰이 담겨있지만, 동시에 가족간 혹은 소중한 사람들 간의 소통과 화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사실 그러한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한 개인으로 태어나서 끊임없이 누군가와 소통하고 불화하고 화해하는것.

 

<전차남>, <늑대아이> 등 유명 영화제작자인 저자의 데뷔소설인 이 작품은 정통소설처럼 빽빽하지 않다. 중간중간 마음마저 느슨하게 만드는 일러스트가 등장하기도 한다. 처음 이 책을 골랐던 이유처럼, 무겁지 않고 순식간에 읽어내릴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분명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읽다보면 누구나 공감하고 가벼운 와중에도 눈물을 쏙 빼게 만들기도 한다. 내 앞에 악마가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동시에 마지막 역자의 질문이 떠오른다. 내 삶의 '고양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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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열린책들 세계문학 227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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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삶을 살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본문 중 7p)

 

1장이 시작되기도 전에 책을 열고 읽은 첫 줄부터 내 마음에 돌을 던졌다. 아주 오랜만에(중학교 때 읽었으니 벌써 10년이상 지난) 기억 속에 있는 데미안을 어설프게 떠올리며, 이 한줄에 담긴 이야기가 이 책에서 몇 번이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리라고 담담하게 예감했다. 왠지 분위기 딱 잡고 집중해서 읽고싶던 책이라 한밤 중에 내 방 침대위에 홀로 자리잡고 책을 폈다. 다시 읽은 이 책은 여전히 유혹적이어서 왜 그동안 다시 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감명을 주었다.


책의 초반 1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두 세계에 대한 묘사와 싱클레어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을 읽어내려가며, 중학생이었던 내가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라고 새삼 느꼈다. 집(가족)과 그 외의 새로운 세계가 생기고(혹은 그 세계를 인식하고) 그 둘의 괴리감, 각각의 공간에서 내가 과연 동일한 인물인지 불안해지곤하는 것은 결코 낯선 경험이 아니다. 비단 어렸을때 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삶의 영역이 더 커질 때마다 새로운 영역이 추가될 때마다 느껴지는 그 묘한 쾌감과 불안(그 이전의 세계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을 없을 것 같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들려주는 성경에 대한 다양하고 자유로운 해석에 놀라워할 때 난 데미안의 해석에 격한 공감(해석의 의향이 아니라 다양한 상상을 할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감)을 느꼈다. 중학교 때는 한 친구의 아버지가 목사님이고 그 교회는 가까웠기 때문에, 그 외 다양한 이유로 한동안 그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녔다. 그때 난 종교라던지 신앙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고 그때 교회가는 것이 즐거웠던 이유는 친구와 함께할 시간이 더 늘었다는 것과 성경을 읽으며 다양한 상상을 해보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한 책이 아니라 그저 읽다보면 반박하고 싶거나 왠지 그 줄거리를 이용해 다르게 상상해볼만 한 방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워낙 그런 성향이 나에게 있었는지, 어쩌면 데미안을 읽고 자극을 받아 그런 상상을 더욱 했는지 그 전후관계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데미안같은 친구가 그때 함께 있었다면 신나게 수다를 떨고 친해질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상상이 슬쩍 들었다. 데미안이 날 마음에 들어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싱클레어가 그랬듯이 분명 그에게 빠졌을테니.

 

 

데미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겠지만 아주 영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주변 친구들 역시 데미안을 읽고 같이 얘기를 하면 대부분 책 제목과 동일한 이름의 데미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책의 서술자이자 데미안을 만나고 헤어지며 모든 것을 겪은 주체인 싱클레어는 왠지 모르게 인기가 없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나는 싱클레어라는 인물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두려워하고, 상처받고, 방황하고, 극복하는 그런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싱클레어는 데미안보다 더 현실적이고 나와 가깝게 느껴진다. 싱클레어가 한단계 성장하고 방황을 극복해내는 과정마다 그 내내 두려움에 떨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자 한 그 외골수같은 성향이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나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할 수 있지만 하고 있지 않은 일들은 또 무엇인지. 무엇보다 내 삶과 나 자신에게 싱클레어만큼의 집중과 고민을 쏟아부어 본적이 있는지.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싱클레어는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13살 무렵부터 겪어왔다. 그 나이가 그런 진지한 고민을 할수 있는 나이라는 것에는 적극 동의하기 때문에, 그 나이에 내가 했던 고민들은 무엇이었을지 새삼 떠올리려 애썼다. 나이와 상관없이라도 지난 삶의 과정 중에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를 의심해 볼 수 있었다.

 

 

데미안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어렸을때 한번 접했던 책이어서인지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던 것 같다. 혼란스럽지만 점차 단단하게 성장해 나가는 싱클레어의 내면과, 그의 구원자이자 이상형이자 혹은 그 자신이기도 했던 아주 매력적인 인물인 데미안, 그 둘의 자유롭고 자극적인(생각을 자극시키는) 대화 등을 엿보는 과정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특히 싱클레어가 고뇌하며 느끼는 여러사람 간의 혼동과 그 속에서의 자기발견 과정은 혼란스럽지만 어렵지 않게 느껴져서 작가의 탁월한 문체와 가독성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내용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강렬한 작품임에도 그의 문장은 그 문장만의 매력이 있어서 읽는 즐거움을 두배로 만들어준다. 얼마전 읽은 책에선 '헤르만헤세의 문장은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와 함께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깊이 있는 맛도 담겨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읽으면서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여러 문장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그만큼 와닿는 한 구절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며 마무리하려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본문중 1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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