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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치하야 아카네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불꽃, 손자국, 반지, 화상, 비늘, 음악. 맨 처음 간결하게 제목만이 쓰여진 목차를 보다 이 책에는 표제작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편소설집에 수록되는 한편의 제목을 소설집의 이름으로 붙이는 것이 흔한편이어서 나도모르게 목록에서 흔적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보통 단편집에서 모든 단편이 마음에 들기란 힘들기에 표제작에 우선적으로 기대를 걸고 책을 읽어나가는 버릇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되었다. 아무튼 그런 내 평소의 기대를 공평하게 나눠버렸기에 각 작품들이 꽤 궁금했다. 연애문학상을 받았다고 할 정도이니 하나하나 진한 연애이야기가 실려있겠지, 연약하게 사랑하고 꿋꿋하게 상처받으면서 얼마나 휘둘리고 있으려나 책을 펴기 전부터 꽤나 두근두근 했다.
우선 각 단편의 인물들이 무관한듯 연결된 구조가 좋았다. 스쳐간 혹은 주인공의 주변인물에 불과하던 인물이 다른 단편에서 주인공으로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 색다르다. 각 작품들 사이에 긴밀하게 연결된 그 퍼즐을 머리속으로 끼워 맞춰 시간대나 장면들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려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런 연출은 에쿠니의 가오리의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해도>라는 책에서도 볼 수 있는 구성이다. 그외에도 가끔 동일작가의 단편소설에서 발견되지만 사실 소설보다는 단편만화집에서 더 흔하게 보여지는 구성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일본 만화작가 야마시타 토모코의 단편집을 보았는데 그 책도 마침 같은 형식이었다. 거기다 문체나 등장인물들의 말투가 비슷한 느낌이 있어서 소설을 읽는데도 만화책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왠지 내 머리속에서 야마시타 토모코의 그림체는 치하야 아카네의 글에 마치 삽화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특히 마지막 단편 음악은 가장 싱크로율이 높았다.)
손자국과 반지, 화상과 비늘의 화자들이 한집에서 살고있는 두 인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손자국과 반지의 인물들이 가정을 꾸리고 첫아이를 낳은 젊은 부부라면, 화상과 비늘의 인물들은 오랜 인연을 이어왔지만 아직 연애를 시작하지도 않은 어린 대학생들이다. 한 커플의 남녀 시선을 비교하는 것도, 두 커플끼리의 소통방식이나 내면을 비교하여 보는 것도 가능해서 읽고 난 후에도 한 단편을 거기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편들과 이어지게 생각하고 되새기게끔 만드는 면이 있었다. 각각의 단편을 평하기엔 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후반으로 갈수록 몰입도가 좋았고, 등장인물들의 매력도도 높았던 것 같다. 각자가 평범하지 않은 사연들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든 부딪히고 뱉어내고 풀어내려는 그 시도들이 사랑스럽다. 연애, 혹은 사랑에 대해 작가들이 글을 쓸 때 전하고자 하는 말은 뻔하지만 결국 이게 아닐까. 본문의 내용을 추록하여 마무리한다.
"있잖아, 지카게 씨. 아마도 이 세상은 불안정하고, 뭐든 간단히 망가져버려. 변하지 않는 것 따위 없고, 뭔가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게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그래도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음악」본문 중 213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