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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평점 :
처음엔 도무지 브릿마리를 좋아하기가 힘들었다. 오베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듯 브릿마리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을까봐 무서울 정도였다. 유별난 듯 하지만 결국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인물을 끄집어내는 프레드릭 배크만의 능력이라면 이 고집불통 짠내는 여인에게서 나나 내 가까이의 누구라도 발견해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존재의 확인을 바라는 안타까운 여인. 교양있는 인간이라면 캔에 입을 대고 먹거나 컵받침없이 차를 마셔서는 안되며 포크, 나이프, 스푼의 커트러리 서랍 정리 순서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여인. 브릿마리는 늘 바쁜 남편 켄트의 불륜을 알아버린 후 홀로서기를 위해 직장과 살곳을 얻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으로 누구라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었으면, 더 나아가 자신을 필요로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브릿마리는 외롭고 불쌍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의 이런 캐릭터를 알게되면 이 책의 제목인 <브릿마리 여기있다>자체도 굉장히 짠하게 느껴질 정도랄까. 결혼 후 처음으로 집을 떠나 자신의 존재확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그녀의 곁에 많은 아이들이 모인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무언가 부족하기 마련인 아이들과의 소통은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지만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사람이 떠나고 점차 쇠퇴해져가는 도시 보르그에서 아이들은 오합지졸 축구팀을 만들어 매일같이 공을 찬다. 브릿마리에게 축구팀의 대회출전을 위해 코치를 부탁하는데 축구의 룰은 커녕 유명한 축구팀의 이름하나 알지 못하는 그녀는 어쩌다보니 보르그 축구팀의 아이들 하나하나를 챙기고 있다.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가보니 아이들이 소리가 들리는 축구를 하고 있다. 소리가 안들리는 축구와 들리는 축구의 차이점은 직접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다. 브릿마리는 어둠 속에 서서 귀를 귀울인다. 한 아이가 공을 잡으면 다른 팀원들이 고함을 지른다. "이쪽이야! 나 여기 있어!"
"소리가 들리면 존재하는 거라고 볼 수 있죠." 술에 취한 뱅크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린다.
아이들이 축구를 한다. 서로 외친다. 자기들이 어디 있는지 설명한다. 브릿마리는 움푹 들어갈 정도로 세게 과탄산소다 용기를 누른다.
"나 여기 있어요." 그녀는 속삭이며 스벤이 곁에 있어서 그녀의 속삭임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이로운 축구팀이다. 경이로운 경기다. (본문중 275p)
각기 사연있는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을 만나 조금씩(아주 조금일지도 모르지만) 유연해지는 그녀를 보는게 재미있었다. 브릿마리에게 구애하는 마을의 경찰관인 스벤과 다시 돌아와달라고 부탁하는 켄트사이에의 삼각관계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브릿마리 자체는 약간 진지하고 심각한 캐릭터인데 비해 그녀를 둘러싼 시끌벅적한 인물들과 쉴새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이 작품전체를 활기있게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축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이중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도 유쾌하고, 탁월했다. 축구대회 이후의 이야기에서는 휘몰아치는 사건 진행이 약간 정신없을 정도이긴 한데, 전반부의 차분한 분위기와의 반전을 노린 작가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맨 마지막 브릿마리가 문을 두드린 집이 과연 누구의 집일지 공개하지 않은 것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늘 바라던 대로 그녀의 존재를 알아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덤
켄트와 브릿마리의 이름이나 두 사람사이의 과거이야기가 왠지 익숙하다 싶었는데, 작가의 전 작품인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추후 약칭 할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라는 걸 책을 거의 다 읽어갈 즘에야 깨달았다.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할미전>에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을 다시 찾아봤는데 맙소사, 브릿마리는 <할미전>에서 이미 내게 심쿵장면을 선사했던 인물이었다. 켄트가 출근할 때 늘 그가 찾는 물건을 다른 서랍에 옮겨두고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게끔 만드는 사람, 그 장면을 본의아니게 보게 된 엘사가 질문하자 "그이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좋으니까"라고 속삭인 사람. 이번 책에서의 브릿마리와 <할미전>에서의 브릿마리가 너무나도 같아서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을까 의아해질 정도였다. 어쩌면 브릿마리의 이번 여행이 시작된 것도 엘사 할머니의 편지 때문일지도. 어찌됐든 다시 할미전을 훑어보고 알게된 점은 초반에 그녀를 좋아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한 나는 사실은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덤2
전 작품들처럼 작가의 위트가 곳곳에 숨어있는 이 책의 또다른 웃음포인트는 다름아닌 작가의 등장이라고 생각한다. 작중에 꽤나 밉살맞은 캐릭터(이런 캐릭터가 한둘이 아니기는 하지만)가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을 갖고 등장하는데, 후기에 역자의 스포일러로는 작가의 후기작에서는 어쩌면 주인공의 아버지로 재등장할 수도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