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한국에서 홀로 세탁소를 운영하며 살아가던 명정에게 해외로 나가 살고 있던 아들의 사망소식이 전해진다. 그로부터 8개월 뒤 아들의 이름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처음엔 아들의 사망소식에 대한 실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지만 그 기대는 금새 사그라진다. 그 택배에 들어있던 것은 인공지능 로봇, 그것도 괴짜 사장의 자기만족을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유형의 샘플 중 하나로 십대 중반의 아시아형 외모를 지닌 로봇이었다. 명정이 준 은결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로봇은 명정의 세탁소에서 그의  말벗이나 소소한 보조를 하며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한다.

 

저자는 '마르고 닳도록 반복되어온 로봇의 감정발생서사'라는 말을 하며 조심스러워했지만 나로서는 처음 만나본 이야기였다. 물론 영화(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 T나 I등)나 만화(20세기소년의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P)등 다양한 장르에서 접해본 적이 있지만 소설로서는 처음이었다. 로봇이 주인공인 이야기지만 그 로봇은 인간을 닮아가는 로봇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 로봇자체가 강조되기 보다는 로봇과 비교되는 인간만의 특이점이 더 두드러지며 결국 이 책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탁소라는 배경도 작품 내에서 인간 삶에 대한 비유로 여러번 이용되는 장치중 하나이다. 사람이나 삶에 대한 묘사 중 세탁소라는 배경과 결부되어 자연스럽게 비유한 문장들이 눈에 띈다. 은결이 배웠다는 세제 한스푼이 가르쳐준것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처음 그것을 세탁소 내의 스포팅 머신이나 건조기 정도로 여기던 명정은, 이름을 준 뒤로는 모셔놓은 손님 대하듯 하다가 보름쯤 지나 심신이 안정되고 상황에 익숙해지자 이윽고 사소한 일들을 맡기며 편안히 다루기 시작한다. 은결의 존재를 신기해하던 동네 주민들은 방송이 나갔을때 한두 주쯤 반짝 관심을 보이고어느덧 익숙해진다. 일상의 일부가 된다. 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있다. 세상은  한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본문 중 29p) 

 

인간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로봇덕에, 그동안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던 가치관들과, 온몸의 근육에 배어 있어 의문을 가져본 적 없는 습관들 하나하나가 새삼스레 당혹스러워지며, 무엇보다 인간으로 한평생을 살아왔지만 인간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실상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본문 중 53-4p) 


 

 

이 책의 이야기는 사실 큰 기복이 없다. 명정과 은결 가까이에 있는 주변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몇몇 사건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그들의 이웃으로서 혹은 방관자로서 바라보는 은결의 시선과 머리속은 고요하기만 하다. 아니 새로운 학습이 일어나거나 여러 복합적인 상황이 벌어질때 은결의 머릿속은 복잡한 연산을 거치고 상황 분석등을 위해 바쁘게 돌아가고 있으나 겉으로는 잠시간 행동을 멈추는 것 외에는 별다를 것이 없이 정적이다. 프로그래밍되어 있으나 자체 학습이 가능한 로봇의 머리속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하고 싶다- 등의 의지를 가지게 되는 과정은 꽤 고루하지만 차근차근 끈기있게 이어진다.

 

주인공이 느끼는 격렬한 감정이나 주인공이 휘말리는 크나큰 사건은 없더라도 주변인물들이 그를 대신해 더욱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어서 매력적이다. 초등학생때부터 세탁소를 드나들던 시호와 준교는 주변 인물중에서도 은결과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는데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휘둘리고, 미숙하고,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특정상황에서 인간이기에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은결은 명정의 표현대로라면 시호에게 '연심'을 품음으로서 점차적으로 충동과 변덕, 즉 인간다운 감정이나 제멋대로인 점을 점차 갖게 된다.

 

 

인간은 관계를 위해 적절한 빈말과 거짓말을 잘 이용하는 존재이다. 로봇인 은결은 인간의 그런 행동들을 보고 배우며 딱딱한 사실만으로 이루어진 답변외에 상황에 맞추어 적절한 맞장구를 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런 부분에서 은결이 말하는 예쁩니다-라는 대답이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그가 연심일지도 모를 마음을 처음으로 갖게 된 시발점이 된 상황에서 한번, 인간에 더욱 가까워진 로봇으로서 어린 여자아이에게 한번. 그 두번의 말 모두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다정함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 은결이 더이상 그저 로봇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은결이 저 자신이 로봇이라는 것을 스스로 지각하고 있다는 점도 자칫 감정발생의 과정에서 흔들릴수 있는 이야기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병모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보는 데 이런 스타일의 책이라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계속 읽고 싶어진다. 이야기의 진행과 마찬가지로 평온하게 끝마친 소설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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