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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레몽 드파르동 지음, 정진국 옮김 / 포토넷 / 2015년 3월
평점 :
천장이 높은방, 그 만큼 길다란 높이를 지닌 창이 하나 있다. 창밖엔 언제나 해가 쨍하게 떠서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거리를 비춘다.
이런 창은 세계 곳곳 어디에나 있어서 그 중 몇몇을 모아 이 책이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그 창이 프레임이라고 하면 그 창을 가진 방의 주인은
늘 레몽 드파르동이었다. 이 책은 그 창을 통해 '어딘가'를 방랑하고 다닌 레몽의 시선을 담은 책이다.

책의 구성은 글과 사진이 전부다. 글은 방랑을 마치고 난 후, 사진인화 및 선정 작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쓰여졌지만 방랑 전부터 스스로
고민하고 고려한 것부터 방랑 도중 스치듯 지나간 혹은 깊이 고민한 생각들, 또는 스스로의 이력이나 사진 · 영상에 대한 생각 등을 담고 있다.
따로 목차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소제목과 짧막한 글들이 정갈한 글씨체로 이어진다.
기본적으로 왼쪽 페이지는 글, 오른쪽 페이지는 사진이다. 사진은 작가 스스로 새로운 시도라 부른 '세로 사진'이라 길다란 책의 한 면을
가득 채운다. 사진 속 풍경들은 늘 어딘가로 이어진 길을 보여준다. 작가가 방랑중에 걸어갈 혹은 걸어왔던 길일 것이다. 사실 명확하게 말하자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세상 어딘가의 일부분일 뿐이다. 도시, 농촌, 사막, 산, 어떤 풍경에서의 특별할 것 없는 일부분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간판이나 간간히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표지가 될지 몰라도 굳이 그 장소가 어디인지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인물이 주가 되는 사진은 없고(그림자 혹은 상당한 거리를 둔 렌즈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등장할 뿐) 그렇다고 딱히 '풍경'이 주가 되는 사진도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글을 보면 작가는 이 사진들을 우리가 흔히 떠올릴수 있는 아름답거나 인상적인 풍경사진으로 보아주길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사진 속에서, 다른 사람, 다른 것들과 대면한다. 나는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한다. 다른 것을 더욱 잘 보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정당하게 바라본다면 무엇이 중요할까. 사진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특히 방랑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내가 모르던 것과, 내가 발견했던 것과, 나를 답아당기더니 어느새 나를 쫓고, 내게 집착하고,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나를 사로잡고 뒤흔들며 내 삶을 바꾸어놓는 것들과 마주친다는 점이다.
방랑하면서 나는 나 자신 속으로 여행했다. 이것이면
된다. (본문 중 112-4p)
작가가 글을 쓰며,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주로 떠올리고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나'와
'현재'에 대한 것이다. 다른 사진들과 달리 주제가 없는 <방랑>을 택했지만 이 두가지만은 이 사진집의
주요 키워드인 동시에 방랑을 통해 작가가 얻은 것들 중에 하나이다. 신기한 것은 작가는 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만 독자는
사진을 보며 본인 자신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가 꿈꾸는 방랑, 고로 내가 꿈꿔왔던 방랑과 그를 통해 생각하게 되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한번쯤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작가는 <방랑>에서의 사진과 글로
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내놓았다. 실제의 실행이 동반되었다는 것만이 독자와의 차이일 것이다. 작가가 쉰여덟이 되어서야 해낸 일을 나는 언제쯤
해낼수 있을까. 아득하지만 그 마음이 더욱 강렬해진다.
소설이나 일반적인 글이 주가되는 책이 아니라 '사진집'이다보니 얻는 즐거움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사진을 찍는것, 보는것을 좋아한다면
80점이 넘는 전문 사진가의 사진을 감상할 수 있고, 프랑스에서 내로라하는 사진 작가나 그들의 작품에 대해 이 책에서 조금조금 정보를 받을수
있다. 기법이나 필름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있다. 그저 똑딱이에서 DSLR보급기로 아주 조금 발전한 나는 그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새로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고싶은 게 많아진다.

표지의 사진에 눈을 빼앗기고 책을 펼쳐서는 생각지 못한 글솜씨에 빠지듯 집중해 읽다가 책이 끝날 무렵엔 다시금 책속의 사진들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글을 읽는 도중에도 사진을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쓰긴했지만 글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이 사진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그 시선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