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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7월
평점 :
소설을 읽을 때 인물들간의 관계도를 그리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관계도를 그리자면 노트 한페이지 가득 사람 이름으로만
채우게 될것 같다. 책의 초반부 주인공의 어머니와 아버지, 또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중심으로 그들이 인생에서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후 어린 파트릭 모디아노가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으로 인정받는 21살이 된 어떤 날을 거치기까지 그의 삶이 지나온 순간들과 장소와
사람들과 그것을 증명해주는 여러 증거 및 서류들이 자유스럽게 흘러간다.
파트릭-라는 주인공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 파트릭 모디아노의 자전적 소설이다. 늘 그의 소설이 그랬듯이 덤덤하고 명료한
문장들이 무언가를 추구하며 집요하게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자신의 과거이야기를 이토록 냉정하고 담백하게 할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기성찰 및 성장의 과정과 고난을 겪으며 느낀 감정의 파노라마를 그린 그런 글이 아니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타인이 바라보는 것처럼 자신이
과거에 지나온 모든 행적을 쫓는다. 그 당시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다시금 궁금해하기도 하고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 조금은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주인공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소설은 참 드물다. 하지만 파트릭 모디아노의 글은 늘 그렇다. 심지어 작가 자신의
이야기마저 이렇게 같은 방식으로 풀어낼 줄은 몰랐다. 심지어 자신을 '혈통있는 척하는 한마리의 개'로 표현했을 땐 어찌나 놀랐는지.(더구나 이
표현이 나오기 직전까지 화자이자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더더욱 그랬다.)
나는 혈통있는 척하는 한 마리의 개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뚜렷한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너무나 파란만장하고 불확실해서 마치 반쯤 지워진 글자들로
신분증명서나 행정서식을 채우려 애쓰는 것처럼, 나는 이 흐르는 모래 속에서 몇 가지 흔적이나 몇 가지
표지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본문중 10p)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모디아노의 글은 쉽지 않다.' 치밀한 증거들로 이어진 장면과 스토리를 세세하게 기억하기도 어렵고,
주인공들은 늘 무언가를 찾아헤매지만 그게 무엇인지 끝내 명확히 밝히지 않으며, 그 무언가를 찾아내며 온전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일도
드물다.(그의 소설을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점은 그의 소설을 하나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만한 부분이다.)
주인공들은 오열하거나 깊이 좌절하지 않으며 반대로 완전히 행복해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조금은 강박적으로
시간의 파편들을 긁어모아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들은 그저 열심히 찾고 모아 보여줄 뿐인데, 희한하게도 그 인물이 찾아내고자 하는 무언가에
독자는 몰입하게 된다. 쉴새없이 읽게되고 인물들이 깊이 파고들지 않는 감정과 과거를 마음껏 상상하며 소설에 빠져든다.
특히 <혈통>의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 이전 이후로 나온 작가의 다른 작품들의 단서가 곳곳에 심어져있다는 것이다. 여러 인물,
주소, 그리고 인물의 삶의 모습이 유사하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책을 읽기 바로 얼마 전에 <어두운 삼정들의 거리>를
읽었는데, 그 작품의 주요 인물들의 이름(게이 오롤로프, 페드로, 드니즈까지)이 책 초반에 주르륵 나열되어 순간 당황스러워 했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 증거를 보여줄 줄이야.
자전적 소설이라 하더라도 작품의 모든 부분이 사실일리는 없다. 소설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럴듯한 허구'를 포함해야 하기에. 하지만 그의 삶
곳곳에 작가가 된 이후로 만들어진 작품들의 모티브를 준 인물이나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실 난 해설을 읽기
전엔 반대의 생각도 했었다. 작가로 데뷔한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뒤에 <혈통>이 나온 것으로 보아 사실은 자신의 팬들을 위해 다른
작품들의 요소를 허구로서 심어준 것을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 쪽을 믿을지는 자유이지만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를 한 가지 늘려주었다는
점만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러한 점 때문에 누군가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혈통>을 먼저 읽으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그 반대의 순서로 이 작품을 접했고 이 방법 또한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