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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문자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7월
평점 :
추리소설은 그리 찾아보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꽤 여러 권 읽었던 것 같다. 추리소설이 한층 더 잘 팔린다는 더운 여름,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 중 하나인 '11자 문자 살인사건'이 재출간되었다. 하드커버에 꽤나 두꺼운 책이지만 그의 책이 늘 그렇듯 좋은 가독성과 술술 진행되는 사건의 전개에 빠지듯 읽어갔다. 제목에서 언급되는 11자 문자는 다음과 같다. 서늘한 느낌이 절로 드는 살인 예고장의 문자이다.
'무인도로부터 살의를 담아'(monologue 1 중, 8p)
위의 문자가 쓰인 범인의 첫 번째 모놀로그를 뒤로하고, 본편의 이야기는 추리소설 작가인 여자 주인공 '나'의 애인 가와즈 미사유키가 살해당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이야기의 전반은 가와즈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가 남긴 말과 그의 유품을 건네받는 과정에서 일어난 수상쩍은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 후 일어나는 연쇄적인 살인사건 등을 담당 편집자이자 친구인 후유코와 함께 취재라는 명목하에 적극적인 추리에 나서는 '나'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진행은 빠르고 주인공 '나'의 추리와 함께 독자가 보기에도 무언가 수상한 허점들을 틈틈이 남겨가며 사건은 계속 벌어진다.
그리고 책의 후반에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은 이 책의 소개에서 밝혔던 두 가지 시사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절대적인 선인과 악인이 없는 살인사건이 가능한가, 최선은 과연 모두에게도 선인가 하는 질문들. 전자에 관해 생각했을 때 나는 살인사건에서 선인은 없을 수 있지만 악인이 과연 없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아마도 불가능하리라는 쪽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그런 마음으로 가해자가 곧 악인이 되는 뻔한 공식을 깨뜨리는 좀 더 파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어서인지 요트 여행에서부터 이리저리 얽힌 이야기는 그저 각 인물들의 합리화 과정 같았달까. 악인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대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결국엔 한 사람이 죽었고 그 인물을 죽인 범인은 악인인가 하는 질문에 내 대답은 역시 '악인이다'라는 입장이다.
타인의 죽음에 관여하여 어느 정도 주도적인 행동을 했는가와 그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느냐는 두번 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최선이라는 이름으로 한 결정에 누군가는 진심으로 동의하고, 누군가는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또 누군가는 분위기에 압도당해 그저 끌려갈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한 희생은 '최선'이라는 말로 무마될 수 있는 문제일까. 개인적으로 '최선은 모두에게 선인가'라는 질문에는 즉시 아니라는 대답을 돌려줄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서 늘 최선의 선택을 하길 원하고 그 과정에서 익숙하게 다수결의 논리를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다수의 의견이 늘 옳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희생당하는 소수의견이 있음을 알고 소수가 언제가 다수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가 있는 것도 흔한 일이다. 이 사건에서 이 설명이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비슷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런 사건이 벌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결정하게 된 '최선'이란 과연 믿을 수 있는 선택일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가가 던진 이런 화두를 독자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자신만의 답을 내리길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고 가해자에게 징계를 내리기 위해 범인을 찾는 탐정이나 경찰을 주인공으로 두지 않고, 일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아닐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사건의 전말을 경찰에 신고하거나 누군가를 벌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하나 남기고 침울해진 기분으로 혼자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소설의 이 마지막 장면에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