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 예수님의 심장
하재성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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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분이 사정이 생겨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이곳 성도들은 교회에 올 때 모두 방패를 가지고 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목사님은 옳은 이야기 성도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성도들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도들이 두른 방패에 맞아 튕겨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재미난 표현이지만 사실 씁쓸한 이야기다. 필요한 이야기, 옳은 이야기가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옳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도 마음이 더 완고해졌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달라진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차이도 있겠지만 말하는 사람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적어도 예수님은 지적질만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자세히 듣고 있노라면 그 속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따뜻한 피, 긍휼말이다.

 

최근 세간의 화제인 ‘미생’ 속의 대사에 따르면 ‘직장은 전쟁터고 직장을 벗어나면 지옥이다’. 이런 곳에서 사람들은 자존심을 구겨가며 무시당하면서 살아간다. ‘먼지처럼 일하다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학생들과 주부들도 다르지 않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 같다. 이들을 품에 안고 등을 두드리며 용기를 주실 것 같다. 교회에서 조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고 열패감을 느낀다면 숨이 막혀 죽을 노릇아니겠는가! 교회는 이런 분들이 위로를 얻고 쉼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물론 위로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분노하시기도 했고 책망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서 냉정함이 아니라 따뜻함을 느끼는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에 긍휼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면 예수님의 몸인 교회 역시 따뜻한 피가 흐르는, 긍휼이 넘쳐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서로를 돌아보고 함께 기뻐할 뿐만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곳이 공동체로서의 교회다. 자신을 환대하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교회를 통해 성도는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하재성 교수의 <긍휼, 예수님의 심장>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이 얼마나 긍휼이 풍성한 분인지 다시 한 번 더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성경을 덮고 있었는지 모른다. 성경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본능을 따라 조급하고 냉정한 예수님을 만들었을 수 있다. 물론 그 예수님은 가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세상과 달리, 우리가 이루어 놓은 업적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품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이 한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예수님께로 가서 긍휼을 얻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긍휼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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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신학 입문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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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은 손주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물론이고 그들이 자라 학교에서 시험을 치고 연애를 하며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할아버지는 자신의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들려줄 말을 준비해 놓고 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어렵게 들릴 때도 있다. 어떻게 손주가 할아버지의 말을 다 알아듣겠는가! 이럴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 복을 걷어 차버리는 격이다. 잘 몰라도 인내하며 듣다보면 할아버지의 엄청난 지혜를 전달받을 수 있다.

 

이 책의 느낌이 그러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평생 신학의 길을 걸어온 노 신학자가 후배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는 이미 어디가 위험한 지점인지 무엇이 패착인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말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꼭 씹어야 한다. 막히는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내하며 계속 읽어 나갈 때 손주를 위하는 할아버지와 같은 바르트의 숨결을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신기하게도 손주의 문제가 무엇인지 꼭 집어내는 능력이 있다. 바르트는 교회의 위기가 신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신학을 소수의 전유물로 삼는 것을 경계하면서 신학이 모든 성도들과 교회의 사명임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을 보며 알 수 있다. 그의 지적은 백번 옳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 역시 신학의 부재가 그 원인이다. 교회와 목회에 신학의 자리가 없다. 신학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분위기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그의 바람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신학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며 바른 신학을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음미하면서 책장을 넘기다보면 바르트 할아버지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니 바르트는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사람이었다. 기도가 신학하는 최우선의 자세임을, 신학의 자리가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보라! 그가 당시 기적을 성경에서 밀어내고 있었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힘겹게 싸웠던 사실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르트의 유산을 어느 정도 이어받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섣부른 선입견 때문에 아직 바르트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이 책을 펼치기를 바란다. 할아버지가 되어 들려준 그의 신학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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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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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가 얼마만인가! 황석영의 강남몽을 읽고 난 후 거의 1년쯤 지난 것 같다. 소설에는 왜 그리 손이 안 가는지. 이재철 목사님은 목회를 위해서는 세계문학전집은 꼭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래가지고 목회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사람의 심리를 잘 이해할 때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게 이 목사님의 지론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게 괜한 시간낭비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 만큼 문학이 뭔지 잘 모르고 있 문학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것을 많이 놓친 것이 아쉽다.

 

억지로라도 소설을 읽게 되어 다행이었다. 100세 노인은 일단 재미있다. 흥미가 있으니 책장이 잘 넘어갔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이야기가 전개되니 100세 할아버지 알란이 살아온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고 그 만큼 이야기에 더 깊이 빠졌다. 하지만 현실감은 없다. 원자 폭탄 제조법을 알게 되는 것이라든지, 트루먼, 스탈린, 처칠에 이어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 전 세계의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재미있는 그러나 현실감은 떨어진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세상만사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알란의 어머니가 알란의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알란에게 해준 말이다. 그러니 알란의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에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다소 철학적인 이 말이 알란의 평생 좌우명이 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알란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놀랄 만큼 평정심을 유지한다. 마치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일들이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도 그는 요지부동이다. 세상은 그를 구속하지 못했고 그는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갔다.

 

100년 동안 그렇게 살았는데 아무리 요양병원이라지만 자유가 억압된 곳은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100세 생일잔치가 준비되었지만 알란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창문을 열었고 그 곳을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버스터미널에서 네버어게인 조직원이 트렁크를 잠시 맡아 달라고 부탁하지만 알란의 손에 들어온 트렁크는 조직원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알란의 뜻대로 움직인다. 그로 인해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결국 알란은 발리 섬에서 행복한 삶을 마무리한다.

 

주어진 삶을 사는 것과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스티븐 코비가 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이라고 일러주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주어진 삶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자신이 갇혀 있는 방의 창문을 넘어가지 못한다. 아니 창문이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할 것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문을 통해서 드나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만큼 사라의 의식은 견고하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갇혀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자유가 어떤 것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리는 지금 주어진 삶이 익숙하다. 사실 주어진 삶에 충실한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어진 삶이 아니라 주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주도적인 삶을 희망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방을 둘러보기 바란다. 어디엔가 틈이 있을 것이다. 그게 창문일 수도 있다. 창문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창문을 열고 자신이 숨 쉬고 있었던 곳을 넘어가보기 바란다. 그 일탈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염려하지 말라.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세상만사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지 않는가! 자신을 억압하는 곳을 벗어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며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창문을 열고 창문을 넘어야 한다. 생각의 틀을 뛰어넘어는 자에게 인생은 큰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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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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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에서 참사가 일어나던 때 교회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교회 주변에 사는 이라고 자신을 밝힌 후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는지에 대해 항의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분은 하나님이 그 일의 원인자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난 하나님이 악의 조성자가 되지 않도록 애썼다. 하지만 결국 우리 둘은 같은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고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통에 대한 나의 설명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난 그때 전화 너머의 사람에게 아이티에서 일어난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원수가 한 일이라고 말해주어야 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악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신비다. 일제 식민지배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취해 악이 선을 가져왔다고 착각하곤 한다. 이런 생각은 악을 미화시키고 더 나아가 악을 필연적인 것으로 둔갑시킨다.

 

이 책은 신정론에 대한 연구서는 아니다. 하지만 신정론에 대해 알아가기에 충분하다. 이 책의 저자인 토마스 G 롱은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악과 고통, 이로 인한 신앙의 위기에 대해 설교자가 침묵할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비라는 말로 자신과 성도들을 억압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여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연구해서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썼는데 쉽지 않은 주제를 간결하면서도 쉽게 잘 설명하고 있다. 간주곡으로 삽입된 욥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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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 산다는 것
크리스틴 폴 지음, 권영주.박지은 옮김 / 죠이선교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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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타자를 통해 존재한다. 타자는 인간존재의 근원인 셈이다. 그래서 타자의 부재는 자신의 부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이들은 타자의 부재로 인한 자신의 부재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타자의 부재를 힐링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지만 힐링은 자신에게 타자 즉 공동체가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해줄 뿐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마음을 쉽게 열지 않지만 그만큼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공동체를 염원하고 있다.

 

교회는 본질상 공동체다. 하나님은 공동체로 살아가는 교회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공동체가 교회의 본질이며 사명인 셈이다. 그런데 교회의 공동체성은 교회가 건물과 교인을 가지고 있다고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틴 폴이 이 책을 집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다니면서 정작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교회를 모르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공동체로서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 가는지 알고자 한다면 크리스틴이 이 책에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감사하고 약속을 지키며 진실함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손대접하는 것. 크리스틴 폴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이 책에서 제시한 4가지는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그 면면을 보고 실행에 옮기자면 여간 벅찬 것이 아니다. 이들 모두는 타락한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것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는 감사보다는 불평을,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신뢰를 깨뜨리는 것을, 진실보다는 거짓을 그리고 손대접하기보다 섬김을 받기를 더 선호하지 않은가! 이런 우리의 본성에 무릎을 꿇는다면 지금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사람의 발에 밟힐 것이다.

 

지금 세상은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의 세계다.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극한 경쟁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타인은 함께 가야 할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일어서야 할 존재다. 이런 경쟁에서 사람은 철저히 고립되어간다. 이런 세상에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야 말로 빛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교회는 공동체다. 교회에서조차 소외와 고립을 경험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책임과 사명에 눈을 뜨고 헌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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