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가룟 유다 딜레마 - 가룟 유다에 비추어 본 진짜 기독교
김기현 지음 / IVP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박영선 목사님은 로고스 서원에서 주최한 그의 북토크에서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역사라고 하는 드라마에 우리가 맡은 배역이 있고 그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다. 자신의 처지를 팔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목사님은 여자의 위치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하셨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는 것에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여자가 맡은 배역이기 때문에 그 역할에 충실한 것이 역사라고 하는 드라마에 꼭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이런 그의 역할론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악인들의 등장도 필연이다. 그들에게도 역사를 위해 주어진 배역이 있고 그들은 그 역할을 잘 소화해 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의 중심에 가룟 유다가 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다. 그의 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원을 누리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갸롯 유다의 배반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에게도 일정한 역할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만일 그렇다면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가룟 유다가 실제 그런 역할을 했다고 답변한 것이 바로 이 책에 소개된 '유다복음'이다. '가룟 유다 딜레마'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유다복음'에 대한 응답으로 쓰였다.

'유다복음'은 최근에 발굴된 1700년 전의 문서다. 그렇게 오래된 문서가, 그것도 '복음'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 발견되었으니 이 문서가 발견되었을 당시 신학계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그리고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한 일등 공신으로 소개한 내용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도대체 '유다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소상하게 알 수 없는 일반 성도들을 위해서 저자는 영어로 번역된 유다복음을 단숨에 읽고 친절하게 펜을 들었다. 그는 '유다복음'은 아주 엉성하게 쓰인 영지주의 작품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일반 성도들은 영지주의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고, 또 영지주의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고 있기에 저자는 영지주의에 대해서 아주 소상하게 말한다.

영지주의는 신약성경에 소개된 대표적인 이단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한다. 그런데 예수의 육체성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것으로 소급된다. 그리고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으로 적용되는 아주 무서운 이단이다. 탈육체가 탈역사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가 보이고 있는 탈역사적인 모습은 영락없는 영지주의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눈에 보이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만 집중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지주의 이단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하지만 영지주의는 무섭게 우리 가운데 침투해 들어왔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후반부 '성서 밖의 유다'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결국 '유다복음'은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이며 '유다 변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유다복음'이 긍정한 유다의 행위는 부정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만큼 그의 행동은 악하다. 그리고 그의 배반이 사용되긴 했지만 그의 행위가 십자가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의 싸늘한 키스가 없었어도 주님은 구원의 길을 넉넉히 완성하셨을 것이다. 즉 그의 배반이 필연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가 필연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필연 앞에 그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예정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미리 정해 놓은 생각대로 행동했고 하나님은 그의 행동에 책임을 물으신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우리는 매사에 선과 악, 죽음과 생명을 구별하는 신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이 열매는 지금도 먹지 말아야 할 금단의 열매다. 하지만 용서가 그에게 열려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자살이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간 것은 결코 아니다. 이처럼 이 책은 당시 이슈가 된 '유다복음'이 영지주의 작품인 것을 밝히면서 가룟 유다로 촉발된 자살, 예정 등의 여러 가지 문제를 아우르면서 기독교 신앙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운행해 가시는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여자로 태어날 것인지 남자로 태어날 것인지, 아프리카에서 태어날 것인지 미국에서 태어날 것인지 장애인으로 태어날 것인지 정상인으로 태어날 것인지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맡은 배역은 결정적이다. 그리고 그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이 박영선 목사님이 하신 말의 의도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결정적이지 않다. 내가 여자로 어떤 일을 할지,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된 것은 없다. 그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다.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지만 그런 일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없이 감사한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림절 묵상 - 이블린 언더힐과 함께 하는
이블린 언더힐 지음, 크리스토퍼 L. 웨버 엮음, 김병준 외 옮김 / 비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소설가 공지영은 '창비'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 방송 '라디오 책다방'에 출연했다. 진행자들과 최근에 출간한 그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주인공의 독백에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을 넣었어요. 가장 타락한 종교가 천상의 이야기만을 하고, 가장 건강한 종교가 이 지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거죠. 작품에서 그 독백을 가장 좋아해요." 공지영이 말하는 종교란 물론 기독교다. 지상의 이야기, 일상과 역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직 천상의 이야기만 하는 교회. 우리가 너무 흔하게 보고 있는 교회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은 올바른 영성이 결코 아니다.

 

<대림절 묵상>의 저자 이블린 언더힐은 공지영의 이 말에 공감할 것 같다. 이블린 언더힐은 성공회 평신도 신학자로서 신비주의 영성가다. 그녀가 저술한 책들은 한결같이 영성과 신비주의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영성이라는 말은 사실 그 뜻이 상당히 모호하다. 고려신학대학원 변종길 교수는 2000년 성경신학회에 발표한 논문 <화란 교회의 영성과 경건>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모호하기에 각자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추구하는 영성은 변종길 교수나 공지영이 우려하는 영성이 아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오히려 이분들이 추구하는 영성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참된 영성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참된 영성은 인간적인 것을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으로 정의하면서 대림절 첫날 묵상을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두렵고 떨리는 '영적'인 사건이다. 성육신을 통해 인간적인 것이 폐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영적인 삶은 인간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교부 아타나시우스도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들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그녀는 영성에 관한 교회의 이런 올바른 전통을 잘 이어받고 있는 셈이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절기다. 그런데 이런 절기가 자칫 우리의 일상과 상관없이 지켜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주님의 초림 즉 성육신을 기리면서 주님의 낮아지심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럴 경우 예수님의 성육신은 겨우 개인의 영성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을 통해 구원받는 것은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를 포함한 전 우주다. 그녀는 이와 같은 사실을 독자들이 놓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대림절에 고통 중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의 탄식을 들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성은 우리의 일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만일 영성이 우리를 일상에서 도피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올바른 영성이 아니다.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일상과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곧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녀가 신비주의자로 소개하는 사도 요한 역시 예수님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곧 이단이며 적그리스도라고 일갈하지 않았는가! 눈에 보이는 우상이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요한이 경계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지주의 이단이었다. 이와 같은 영지주의의 위협은 오늘에도 늘상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성도의 일상과 그 일상이 모여 의미를 갖는 역사를 터부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교회는 영성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성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성이 심지어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고까지 한다. 아니 모든 면에서 영성은 정치와 관련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사실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정파를 초월한 성경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영성에 포함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애써 세상을 외면하고 있다. 그렇다고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침묵과 맹종으로 너무 비겁하게 정치에 참여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언더힐은 개인의 영성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신비주의 영성가답게 그녀는 기도에 대해 매우 강조한다. 잘못된 신비주의는 경계해야 하지만 신앙의 신비로운 측면은 간관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바로 기도다. 그녀에게 기도는 간구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상태'. 성도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기도하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야 한다. 문을 닫되 틈을 주지 말고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단 둘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문을 조금 열어 둔 채 하나님께 나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기도의 신비를 통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성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물론 한국교회는 기도에 열심이다. 하지만 그 기도의 대부분은 간구이다. 간구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역시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잃어버렸다고 한 나들목 교회 김형국 목사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간구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에 너무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양식조차도 지극히 개인을 위한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더힐의 기대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그의 영성의 또 다른 특징은 지극히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영성이 개인의 감정이나 지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 즉 삼위 하나님에서부터 나온다고 분명히 못 박는다. 또한 기독교 신비주의는 성경적 언어와 생각으로 흡수된다고 한다. 참으로 명쾌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신비주의와 영성 운동이 얼마나 교회를 혼탁하게 하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 주된 원인은 성경보다 체험에 더 큰 권위를 두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경은 물론이고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언더힐은 성경과 아울러 사도신경과 같은 교회의 신조를 영성의 기초로 확고하게 붙들고 있다. 이것이 그녀의 큰 강점이며 참된 영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영성은 사변적이지 않다. 그녀는 기독교 영성이 이 땅의 악과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악과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르쳐 줄 수는 있다고 한다. 참으로 실천적인 신앙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악과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고심한다. 필요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악과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악과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그리 상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악과 고통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게 바로 성육신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악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대림절을 보내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실천적 영성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사랑'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완전하게 현존하신다고 한다.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이는 요한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오해하지 말라. 사랑은 종교적인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말과 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하게 행함에 사랑이 있다. 성육신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악과 고통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나의 성육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림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취해야 할 참된 영성이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대림절이 본디 성육신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인데 이 책은 재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전체를 통해 드러난 그의 영성의 색깔을 보자면 굳이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싣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별 것이겠는가! 일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땅의 고통과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섬기듯이 섬길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신비를 더 깊이 더 풍성하게 경험한다면 이런 참된 영성의 삶을 살아갈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사실 이 책은 그녀가 직접 쓴 것은 아니다. 그녀가 그동안 출간한 책 중에 대림절과 관련된 글 혹은 대림절에 읽었으면 좋을 듯한 글들을 크리스토퍼 L. 웨버라는 분이 편집한 책이다. 성탄절 전 428일과 성탄절 이후 13일 총 41일 동안 매일 정해진 주제를 따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글을 통해 주님을 묵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편집자가 매일 글의 마지막에 묵상 요약문을 적어 두고 또 기도문도 따로 실었다. 매일 순서에 따라 읽어 가며 묵상하고 기도한다면 성육신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참된 영성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당한 확신 - 기독교 제자도의 믿음, 의심, 그리고 확실성
레슬리 뉴비긴 지음, 박삼종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창조과학 전임 사역자인 이재만 선교사는 <노아 홍수 콘서트>(두란노, 2009)에서 진화론을 과학이 아니라 신앙으로 소개했다. 진화론이 가진 '전제'를 잘 지적한 말이다.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합리'와 '객관'이라는 것도 사실 그 토대가 상당히 취약하다. 그러면 창조는 어떨까? 창조 역시 신앙이다.

우리는 창조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그렇다면 창조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창조 과학자들은 그럴 필요를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레슬리 뉴비긴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이런 시도 즉 신앙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는가! 명백한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했던 때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과학자들이 이르고자 하는 궁극적 실재이지 않은가!

만일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진다면 과학은 더 없이 좋은 전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뉴비긴은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한다.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과학과 기독교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가 서로 다르다. 궁극적 실재가 다르니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고 결국 서로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과학과 다른 옷을 입고 있다고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 과학에 괜히 아부할 필요가 없다.

<타당한 확신>(SFC, 2013)은 종교 즉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확신에 대한 타당성을 변증하는 책이다. 레슬리 뉴비긴은 35년간을 선교사로 사역한 사람답게, 여전히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 책을 썼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다. 모더니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계몽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영향은 지금도 아주 막강하다. 뉴비긴이 이 책의 3장에서 잘 정리했듯이 계몽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이 현대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원론은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진 가설에 불가하다. 교회는 이런 이원론에 의문을 제기하며 기독교적 확신을 붙들어야 한다. 뉴비긴은 이 책을 통해 이런 과학적 이원론이 왜 생기게 되었으며 그 폐해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계몽주의의 특징인 과학적 사고의 틀에 기독교가 들어갈 필요가 없다. 복음이 진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과학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이처럼 '사회 통념 구조'의 틀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정책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오히려 '사회 통념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대안으로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즉 교회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자긍심과 확신을 가져야 한다.

모두 일곱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목차만 보더라도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논리적이다. 각 장 제목을 따라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유럽은 계몽주의가 태동하기 전까지 믿음이 지식에 이르는 길임을 받아들였다(1장). 하지만 회의주의가 범람했고 교회는 확실성을 붙들기 위해 의심하는 법을 배웠다(2장). 그러나 확실성에 대한 추구는 도리어 회의주의로 환원하게 된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3장). 사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4장). 이것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5장). 성경의 이야기를 충족할 수 있는 비평의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6장). 과학적 확실성이 아니라 믿음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교회는 복음을 변증할 때 과학적 틀에 의존하기보다 성경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어야 한다(7장).

결국 뉴비긴의 주된 비판은 계몽주의가 양산한 과학적 사고다. 계몽주의는 기독교가 넘어야 할 산이다. 맥그래스는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국제제자훈련원, 2011)에서 계몽주의가 출현하고 난 다음 신앙은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났다고 평가했다. 도대체 계몽주의가 무엇이기에 신앙을 공적인 영역에서 사역인 영역으로 밀어냈단 말인가? 계몽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 책은 친절하게도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는 계몽주의의 발현과 그 특징 그리고 문제점까지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다.

계몽적 세상은 합리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으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학문의 이름으로 과학적 확실성을 강제한다. 이것은 폭력이다. 이런 폭력 앞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이미 무소불위의 권위를 확보한 탓이다.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도킨슨도 믿음은 비합리적인 것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신이 존재하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증거는 과학적인 증거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학적 합리성과 객관성의 근거가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뉴비긴이 바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확실성으로는 궁극적 실재 즉 진리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뉴비긴은 헝가리 과학자인 폴라니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이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모든 과학의 이면에는 '암묵적 지식'이라는 '믿음의 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을 합리적이지 않다고 터부시하던 그들이 사실 더 견고한 믿음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계몽주의가 내세우는 합리적 혹은 객관적 진리라는 것은 또 다른 신앙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허겁지겁 과학적 합리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교회의 모습이 달갑지 않다. 물론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것을 도구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확실성이라는 무대가 우리의 주된 놀이터가 되면 곤란하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소득은 전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가 계몽주의에 의존했다는 그의 비판은 정직하다. 기독교 선교는 계몽주의의 폭발적인 부흥을 동력으로 삼았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싸움도 계몽주의라고 하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도 계몽주의는 우리들 가운데 꿈틀거리고 있다. 과학적 확실성에 편승하기 위해 성경을 과학적 확실성의 무대로 가져온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받아들인 성경 비평의 방법도, 근본주의자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성경 무오성의 교리도 모두 과학적 확실성의 인정을 받으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성과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간 애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가? 과학이 성경을 향해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파괴된단 말인가! 도대체 그런 권위를 누가 과학에게 주었단 말인가!

신앙은 과학적 확실성을 담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뉴비긴이 동방신학의 '부정신학'에 대해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섬겼던 동방신학은 계몽주의의 횡포로부터 비껴 나 있다. 과학적 확실성과 상관없이 교회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믿음으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동방정교회 교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복음에 대한 자세와 확신을 배우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회심하는 이유는 복음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다. 복음이 흔들림 없는 과학적 확실성을 제공해 주기 때문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초청을 받고 그분께 인격적으로 헌신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즉 그분을 믿었기 때문에 궁극적 실재이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우리는 알기 위해 믿는다"는 명제는 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해도 혹은 의심이 들어도 하나님께 질문하며 자신의 인격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 주는 신비며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붙들어야 할 확신이다.

서문이 없어서 조금은 불편했다. 책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 채 읽어 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것도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독해 가면서 이런 불편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유익을 얻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과학이 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즉 과학적 확실성에 주눅 들지 않고 믿음의 확실성을 붙들며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그래서 지금도 과학적 확실성을 절대 진리로 믿고 있는 이 시대에 매우 절실한 책이다. 아울러 이 책은 진리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교회와 성도를 얽매고 있는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살펴보게 한다. 물론 그 시대정신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오늘 나와 여러분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 편에 서라 - 공동선은 어떻게 형성되며, 우리 사회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짐 월리스 지음, 박세혁 옮김 / IVP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에 관한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내용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종교인 혹은 종교 기관의 정치적인 활동에 관한 것이었는데 무려 74.6%나 되는 사람이 종교인 혹은 종교 기관의 정치적 활동을 반대했다. 이 결과는 일반 시민들이 종교가 공적인 영역인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마 대다수 성도들의 생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어쩌다 종교 즉 기독교 신앙이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나게 되었을까?

짐 월리스의 <하나님 편에 서라>(IVP, 2014)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공적인 사명에 대한 책이다. 복음은 결코 사적이지 않다. 예수님은 개인의 속죄만 이루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은 온 세상이고(갈 6:14)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요 3:16) 세상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셨다(요 1:29).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아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만 섬길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복음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그런데 이 왜곡된 현실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월리스는 이런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급진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앙은 보수적이다. 1948년에 태어난 그는 대학생이던 시절 보수적인 교회들이 인종 차별에 무관심한 것을 보고 신앙에 회의를 느끼며 교회를 떠난 경력이 있다. 그 후 사회운동을 하던 중 가난한 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회심하게 된다. 1970년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지만 기성 신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지금은 워싱턴 D.C.의 도심 빈민가에서 소저너스 공동체를 세워 그곳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타임>이 그를 미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50인에 선정할 만큼 그는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의 관심은 복음의 공공성 회복이다. 이미 출간된 <부러진 십자가>(아바서원, 2012), <회심>(IVP, 2008)을 보면 그가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 신앙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 편에 서라>는 C. S. 루이스가 쓴 <나니아 나라 연대기>에 나오는 아슬란에게서 영감을 얻어 집필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회심은 영혼의 운명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둘째, 신앙은 정치적 좌파와 우파의 입장을 초월한다. 셋째,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서 공적인 삶에서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

복음의 공공성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확보된다. 공동선이란 모든 이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미 우리가 믿는 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천명했다(갈 6:10). 이 말씀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의 한계를 허물어 버리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더구나 마지막 때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선을 베풀었는지 아닌지를 보시고 심판하지 않은가!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인 크리소스토무스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확언하였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동선의 추구는 정치라고 하는 공적인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개인적으로 선을 베푸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책과 예산 확보는 공동선을 위해 필수적인 요건들이다. 이때 정치적인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로 환원된다. 정책과 예산이 가난한 자들과 관련된 신학적인 문제가 된 이상 교회가 정치라고 하는 공적인 영역에 간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월리스는 정치·경제 문제가 사실은 신학적인 문제 즉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밝히며 교회를 공적인 자리로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런데 대개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앞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조사한 통계에서 보듯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그리고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은 개인 구원에만 매달려 있는 성도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월리스는 이런 구도 자체를 거부한다.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좌파의 길도 우파의 길도 아닌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이념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갈 때 정치적 진보와 보수를 초월할 수 있다.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진보와 보수는 서로 그 가치를 존중하며 함께 일해야 한다. 실제 월리스는 진보적인 사람이지만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진보의 가치인 사회적인 책임뿐만 아니라 보수의 가치인 개인의 책임 역시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강조한다. 그리고 역시 보수의 가치인 가정과 결혼, 성 윤리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해 매우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국가주의 역시 경계해야 할 우상이다. 월리스는 이점도 명확하게 집고 넘어간다. 미국은 결코 다른 나라와 다른 '예외적인 나라'가 아니며 이라크 침공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911테러는 잘못된 것이지만 전쟁이라는 폭력으로 이것을 해결하려고 한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전쟁을 통해서 해결된 것은 거의 없다. 폭탄을 퍼부을 것이 아니라 빵과 기술을 줬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그가 국가를 신으로 섬기지 않고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노예제도를 종식시킨 월버포스나 인종 차별 정책에 저항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존경한다. 특히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는 너무나 유명하다. 하지만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하지만 어떤 꿈을 꿀 것인지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이들은 복음을 개인적인 영역으로 축소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연약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기 위해 헌신했다. 오늘 주위를 둘러보면 여러 형태의 노예제도와 차별이 엄연히 존재한다. 또 다른 월버포스와 킹 목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월리스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예전과 달리 이웃 사랑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갈망하는 것도, 세상을 변화시킬 복음을 찾고 있는 것도 젊은이들이다. 하지만 대다수 교회 청년들에게 이런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이 많은 선교 단체는 어떨까? 월리스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때 만난 선교 단체 학생들을 소개하고 있다. CCC 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은 죽어야 한다고 했고 IVF 학생들은 그저 기도만 하고 있었다. 오늘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여전히 축소된 복음을 배우고 있으면 젊은이들이라도 소망이 없다.

책의 내용 중에 논쟁을 불러올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월리스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다"고 말한다(208쪽).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존중하며 섬겨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선물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요 1:12).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은 불필요한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또 구체적인 예가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예를 들어 56쪽을 보면 "주요한 사회 개혁 운동의 핵심에는 언제나 신앙 공동체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교회가 공적인 영역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211~212쪽을 보면 "… 루즈벨트의 업적과 … 케네디의 성과는 … 강력한 노동운동과 흑인 민권 운동 덕분에 가능했다"가 나온다. 이것 역시 월리스가 주장하는 시민 사회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사회 과학적으로 검증된 자료를 각주로 돌려 소개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한국교회가 복음의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신학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일반 은총론이다. 일반 은총론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한다. 이 일반 은총은 불신자들과 함께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일반 은총론으로 짐 월리스처럼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세상으로 이끌고 나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였다. 이 귀한 신학적 유산을 제대로 물려받고 실행해 나갔더라면 한국교회도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 편에 서라>는 기독교 신앙을 공적인 영역으로 이끌기 위해 성경적 기초를 찾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한 책이다. 비록 분석과 적용 대상이 미국이지만 자본에 의해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것이나 복음을 개인의 속죄로만 이해하는 것 등은 우리나라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월리스의 조언들은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매우 실제적이고 절실한 지침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기독교적 해답을 모색하고 있는 저자의 노력과 통찰에 감사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해답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한국의 짐 월리스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조의 선물 - 키에르케고르의 선물에 대한 단상
이창우 지음 / 대장간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살아가면서 좋지 않은 다양한 일들을 경험한다. 아프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질병으로 혹은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기도 한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런 일을 경험한다. 그런데 나타나는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저항하는 이들도 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이창우 목사의 <창조의 선물>(대장간, 2014)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짧지만 깊은 성찰을 담은 책이다.

 

이창우 목사는 현재 침례신학대학원에서 종교철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는 특히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이 책도 키에르케고르가 선물, 즉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인생에 대해 적은 글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친 책이다. 이 책은 총 4(Chapter)으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지금도 창조 중에 있다(1). 고난은 창조의 과정이기 때문에 고난을 보고 실족하면 안 된다(2). 사람의 욕망은 진공상태에 있기에 이웃의 것을 탐내기보다 예수님을 닮으려는 욕망으로 선용해야 한다(3). 그럴 때 인생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된다.

 

1장에서 그는 인간의 창조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창조의 완성은 재창조 즉 중생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재창조를 창조의 완성이라고 말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우려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먼저 첫 번째 창조를 불완전한 창조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창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온전한 창조였다. 그리고 재창조를 창조의 완성이라고 하면 재창조는 필연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범죄와 타락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이미 예정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타락 전 예정설이다. 교회사를 통해 별 소득 없는 논쟁으로 판별된 것을 재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완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에 동참할 필요가 없다는 저자의 말도(10) 수긍하기 어렵다. 피조 세계 역시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뒤틀렸고(3:17~18) 지금도 허무한 데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하며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8:19~22).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피조 세계를 새롭게 해 줄 날을 고대하고 있다. 이렇듯 새로운 창조가 필요한 것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 모두며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이 이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2장에서 그는 실족이 복음의 핵심이며 교회는 실족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불완전한 우리가 창조의 완성을 통해 안식을 누린다. 그런데 이 안식은 고난이 제거된 안식이 아니다. 도리어 고난 속에서의 안식이다. 고난 없는 삶이 없다. 주님은 우리를 초대할 때 멍에를 벗으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도리어 멍에를 지고, 즉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실족하게 된다. 그저 구원만 얻기 위해 달려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이처럼 저자는 기복 신앙으로 변질된 복음을 비판하며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바르게 역설한다.

 

실족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주목하지 않고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이 마뜩하지 않다. 아마도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철저히 고수한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것을 가정해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데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62).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 인간이시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먼저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한 채 생애와 가르침에만 집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애와 모든 가르침은 너무 소중하다.

 

3장의 제목은 '존재론적 진공'인데 종교철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그는 철학적으로 인간의 타락과 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간에게 재창조가 필요한 까닭은 죄 때문에 뭔가 부족한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타락은 존재의 결핍이다. 이 존재의 결핍은 물질이든 명예든 그 어떤 것으로든 채울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친다. 이게 욕망이다. 그런데 이 욕망은 대개 비교에 의해 생긴다. 이웃의 것을 탐하는 것은 이웃이 가진 것을 보고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욕망이다. 사실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 자체는 진공상태에 있고 중립적이다. 이 욕망이 이웃을 것을 탐내는 것으로 발현된다면 곤란하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망으로 나타난다면 이 욕망은 선한 욕망이 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을 때 분명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다. 이 명령으로 아담은 자유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아담은 불안하게 되었고 이게 타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이 명령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내모는 것이 되고 만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을 지키지 않아서 형벌을 주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지 않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자유와 불안에 대한 그의 설명은 유익하지만 죄는 해명하고 분석하기보다 자복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임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3장에서 소개하는 가인과 아벨에 대한 해석 역시 약간 생소하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 속에 있는 분노를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우리들도 마음이 악하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실까? 물론 분노의 마음을 풀고 예배드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믿음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11:4). 차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으로 아벨을 죽인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인류 최초의 문화가 이와 같은 살인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그의 분석도 흥미롭다. 물론 르네 지라르를 인용한 것이긴 하지만 살인의 뿌리에 시기가 있고 시기는 욕망 때문에 일어난다는 점에서 현재 세상의 문화를 잘 분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저자의 말대로 10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그야말로 반문화적이며 세상을 거스르는 명령이다. 이처럼 어떤 점에서 교회는 현대의 문화를 거슬러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이다(12:1~2). 세상의 것을 탐하지 않는 비결은 예수님을 욕망하는 것 외에 길이 없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곧 새로운 창조라고 하는 그의 지적은 너무나 당연하다.

 

4장의 제목은 '선물'이다. 어떠한 삶이든지 삶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부과된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고난은 수용되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그의 말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공감을 불러 오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수용이라는 것은 거부와 반항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시편의 기도를 보면 고난 중에서 곧 바로 감사로 나가는 경우가 드물다. 거의 다 탄식하고 하나님께 불평한다. 그러던 중에 그의 고난을 수용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기도란 이런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도 조금 조심스럽다. 물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충분히 알겠다. 자신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설득했다. 히스기야도 더 살기 위해 하나님을 설득했으며 더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흥정을 했지 않은가! 우리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것이 우리다. 이것이 우리가 누려야 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당하는 불행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들에 대해 의심하며 묻는 것에서 자유롭게 된다. 많이 때론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이런 지식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물론 감사는 비교를 통한 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의 감사는 세리와의 비교를 통한 감사였다. 다른 이들과 같지 않아서 하는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다.

 

그런데 저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지식과 결부시키는 것은 약간 어색했다. 아마도 철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그렇게 추론해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을 지식 일반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 과연 어떨지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는 지나치게 의심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아마도 지성과 의심이 근본인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인 것 같다. 하지만 주님은 세례 요한과 도마의 의심을 해소해 주셨다. 바울 역시 성도들이 가진 종말에 대한 의심 부활에 대한 의심을 소상히 풀어 준다. 의심을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의심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더 관건이다.

 

사용 설명서가 없는 기계를 다루기가 어렵듯이 서문이 없는 책은 매우 읽기 어렵다. 저자의 집필 의도를 전혀 엿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랬다. 서문이 빠진 것이 편집자의 실수였는지 모르겠으나 독자를 아주 난처하게 만들었다. 마치 구름 헤매는 기분이었다. 각 장을 연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결론 부분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이 고난을 성경적 관점에서 성찰한 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책을 다 읽고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보니 다행히 서문 혹은 출판사 리뷰 형식으로 책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의 말대로 조금은 어려운 이 책은 저자처럼 종교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을 위해서 쓴 책인 것 같다. 앞으로 깊이가 있지만 일반 성도들도 쉽고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는 좋은 글들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