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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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흔이 넘어도 이런 쌩쌩한 글을 쓰다니.

특히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남과 여가 평생의 인연을 같이하게 되는 사연을 풀어내는 것이 통쾌한 느낌을 준다. 일흔의 나이로 그것은 특별한 로맨스가 아닌 것이지.

-수경이에요. 여자가 먼저 누구라는 걸 밝힌 연후에야 비로소 아, 네에 하고 나서 여기 웬일이냐고 형식적인 질문을 하고, 아는 사람 문병 왔다 간다고 대답하고 그럼 이만, 하고스쳐 가려다가 여자의 얼굴에 떠오른 거의 무방비 상태의 친근감이 옮아붙어 열없게 웃으며 머뭇거리는데 마침 자판기가 코 앞에 있길래, 바쁘시지 않으면 커피나 한 잔 하면서, 주머니를 뒤지는데 동전도 천원짜리도 안 나와 쩔쩔맬 때, 여자가 저어, 여기요, 하면서 동전지갑에서 꺼낸 백 원 짜리나 오백 원 짜리를 그의 손바닥에 한 개씩 똑똑 떨구어줄 때, 누가 고 손이 참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그 보기 좋은 한 쌍, 끝끝내 행복을 지켜보며 덩달아 즐거워하고자 했던, 마스코트 같은 한 쌍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나이가 들면, 내 인생의 마스코트라고 여기며 나보다 한참 어린 누군가를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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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클레어 지퍼트.조디 리 그림, 김경미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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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 보세요.
사과 꽃에서 커다란 벌 한 마리가 나왔네요.

사과꽃 속이라니, 살기에 너무나 멋진 곳일 거에요!

바람이 꽃을 흔들어 줄 때
꽃 속에서 잠이 든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요.

제가 사람이 아니라면
벌이 되어 꽃 속에서 살고 싶어요.

- <빨간 머리 앤>중에서

정말 좋은 책인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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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 엘리가 그린 세상 1 - 세상의 처음을 찾아 떠나는 철학 동화
팀 크론 지음, 엘리자 오르테가 그림, 차경아 옮김 / 을파소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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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키덜트족이라는 말이 유행이라는데, 나를 그렇게 규정짓기는 싫지만, 교보문고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어린이책 코너를 그냥 지나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특히 유아들을 위한 픽쳐스북 코너.

이 책은 평소에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이 모아진 것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걸맞기에 한 번 사본 책. 엘리자라는 여자 아이가 등장하고, 엘리자의 엄마, 욘아저씨, 아빠가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엄밀히 말하면 액자 구성이다. 별들이 들려주는 창조 신화 이야기가 액자 속에 있고, 그 밖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떨 때는 재미있어 하고, 어떨 때는 짜증내 하는 엘리자와 엄마, 욘아저씨 등이 있다. 그리고 엘리자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일기장에 그림을 그려넣듯이 그렇게 편안하고 일상적인 그림이다. 연말이라 다소 심란할 때 이 꼬마 여자아이의 그림이 주는 위안이란...

그림이 귀엽고, 별들이 들려주는 짤막한 이야기가 곧 세계의 창조 신화들이라는 점이, 아이들에게 권해주기에도 적합(어린이책이니까 당연하지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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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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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은 몸에 관한 소설이다.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고스란히 발산해 내고 있는 '몸의 한 부분'이 있다는 믿음에서 이 소설은 출발한다. 액자구조인 이 소설에서 소설 속 스케치북의 화자 운형은 엄지와 검지손가락이 없다는 외삼촌의 손을 그의 장례식에서야 보게 된다. 그 후 운형은 인간에게는 모두 감춰져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몸의 한 부분'은 바로 손이다. 손은 엄지와 검지 손가락이 없지만 생전에는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던 외삼촌의 손, 운형의 직업이 조각가라는 점, 운형이 만든 거대한 손 조각 등을 통해 응축된 이미지로 표현된다.

소재상 이 소설의 특징은 '조각'이라는 미술 장르와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를 잘 융합했다는 점에 있다. '조각'을 직업으로 하는 주인공 그리고 조각에 남겨지고야 말 손자국이나 손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감정이나 생각들을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라이프 캐스팅(사람 몸에 석고를 입혀 직접 뜨는 작업)등에서 조각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의 성실성을 엿볼 수 있다.

<그대의 차가운 손>의 저자 한강은 다른 여성 소설가들이 갖기 쉬운 피해의식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편견, 선입관이 없고 공정하다. 그러므로 등장인물들 중 누구 하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거나, 피해자로 만든다거나, 피해자의 내면으로 너무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 그렇기에 독자는 누구 하나를 미워하거나 동정하면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수고스러움 없이 비교적 편안한 독서를 즐길 수 있다.

'꽁꼼땅꼼', '맨송맨송', '날큼하게', '우렁우렁한', '기름한', '생뚱맞은', '서름서름' 같은 의태어의 신선함은 표현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소설가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 여러 명이 술을 함께 마시는 일에 '술추렴하다'라는 표현을 쓰고 신발장이라는 말 대신 '신장'이라고 말하는 것, 잠깐 자는 잠을 '토막잠'이라고 부르는 것, 이쯤에서는 작가 스스로 한국어에 대한 사명까지 더해 작업에 임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소설을 써보고 싶거나 접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소설! 지금 필요한 것은 참신한 표현들이 가득하고 마음을 울리게 하는 단 하나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 때 서슴없이 집어들어도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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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1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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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은 언제나 흥미의 대상. 이런 소재를 갖고도 무수한 작품들이 재미없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긴장감이 없거나 말도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일거다. 하지만, 귀신이라는, 언제나 말이 될 수 없다는 혐의를 처음부터 갖고 있는 이야깃거리는 나름의 논리를 가지면 충분히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그 설득력으로 인해 작품을 믿고 따라가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이 만화는 일상의 이야기에서 귀신의 흔적을 찾는다. 갑자기 이웃이었던 두 집안의 가장이 죽음을 당했다든지, 어렸을 때는 여자아이로 키워졌던 남자아이, 죽을 거라는 판정을 받은 사람이 원귀회복하는 일, 등등. 이런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한번쯤은 듣거나 겪게 되는 일이다. 영적인 것에서 이런 일들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이 만화의 주요 내용. 다소 고리타분할 수도 있지만 주인공이 고등학생인 점과 그림의 세련됨은 그런 느낌을 지워준다. 특히 하나의 소재를 길게 끌고 나가지 않는 것이 장점. 그래서 충분히 스피디하다. 그림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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