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게 사는 법
김지수 지음 / 팜파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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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 전시회가 열렸을 때,
일간지 및 각종 미술지에서는 그에 관한 기사를 일제히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실었다.
마크 로스코를 노래한 우리나라 시(황동규)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보그》의 기사는 그래서 단연 돋보였다.  

그때 나는 홍대에 있는 어느 커피숍에서
거의 처음으로 《보그》를 제대로 읽기 시작한 참이었는데,
다행히 그 커피숍에 《보그》의 기간본이 몇 권 더 있어서
그 자리에서 두세 권을 더 읽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시중의 어떤 잡지들보다

《보그》의 피처 기사들이 훨씬 더 양질의 콘텐츠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글의 수준이나 소재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는 어쩌면 당연했다.
《보그》는 광고 수익에서 탑을 기록하고 있는 잡지 중 하나로,
만성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찌들어 있는 여느 잡지들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 취재나 글쓰기가 이루어질 터였다.
그러니 파울로 코엘료를 만나러 남프랑스로 날아가고,
프랭크 스텔라를 만나러 뉴욕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일 같은 건 《보그》에서만 가능하고
그래서 독자는 “패션지” 《보그》에서
다른 잡지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피처” 기사를 읽을 수 있던 것이다. 

이후, 정기구독자 수준으로 《보그》를 찾아 읽으면서 나는
이것이 꼭 《보그》의 경제적 이점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보그》의 피처디렉터 김지수가 없었다면,
《보그》의 피처 기사들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김지수의 인터뷰는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글의 형식이 이렇듯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마치 인물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김훈의 인터뷰에서는 자기자신을 《현의 노래》의 여인과 동일시했고,
오정희 인터뷰에서는 오정희 소설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글쓰기를 선보였다. 

잡지의 글쓰기와 단행본의 글쓰기는 분명 다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단행본의 독자가 그래도 패션지의 독자들보다는 더 까다로울 것이라고 짐작하기 쉽다.
패션지의 독자인 적이 한번도 없었던 (보수적인) 나를 이토록 유혹했던 김지수가
첫 단행본을 출간한 것이 그래서 무척 흥미롭다.
단행본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다는 생각을 전부터 했었다. 

이 책에는 《보그》에서 읽은 적이 있던 글도 몇몇 있지만
김지수의 글을 이렇게 한꺼번에 모아놓고 읽어보니
글이 참 다층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새롭다.
너무나 사적인 이야기인 듯싶다가
그 주인공 일인칭 시점이 사실은 주인공 다인칭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건 김지수 자신의 이야기인 듯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무척 개인적인 이야기로 폭로적인 고백을 하며 독자의 말초적 흥미를 자극하다가도
어느새 이야기는 더 보편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작은 소재의 컬럼 같지만 여성용 자기계발서의 느낌도 난다.
패션지 《보그》에서 패션이 아닌 피처로 살아남기 위한 김지수만의 글쓰기 방식이었던 것일까. 

이 시대에 글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남들도 흥미 있게 들을 수 있도록 한다는 건
참 놀라운 힘이다.
김지수의 인터뷰집도 단행본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패션지 독자들만 독점했던 김지수가
더욱 많은 단행본 독자들에게도 널리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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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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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은 조용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끝이 났다.

그러나 430쪽에 달하는 이 긴 소설은 루드빅, 야로슬라브, 코스트카, 헬레나 이 4명의 이야기를 '이번엔 이쪽, 다음 번엔 저쪽' 하며 분주하게 우왕좌왕하며 들어야하는, 역동적이지만 결국 4일동안에 일어난 이야기일 뿐이다.

이 소설의 중심엔 7부 중 공동 화자 체제가 도입되는 일곱 번째 부를 포함해서 총 4개 부에서 화자 역할을 하고 있는 루드빅이 있다. 그에게 중심사건은 대학 당시 여자친구에게 보냈던 치기 어린 엽서로 인해 자신이 속해있던 체코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당한 일이다. 이로 인해 그는 이전에는 자기와 전혀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던 탄광 인부로 살아가야 했으며 6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6년동안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을 잃었으며 오직 자신을 지하의 어두컴컴한 세계로 내쫓은 대학 공산당원의 대회의,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에 대한 증오로  불타 올랐다.

또다른 화자인 야로슬라브는 루드빅의 어릴 적 고향친구다. 한참 사회주의에 열광해있던 루드빅의 영향으로 자신의 음악 행로를 사회주의를 위한 민속음악 재부흥에 쏟았던 그는 변한 루드빅을 보며 원망스러움을 느낀다.

코스트카는 대학 시절 당에서 쫓겨날 뻔한 위기에 루드빅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공헌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루드빅과 의견이 크게 달랐다. 그는 탄광 생활에서 루드빅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러나 육체까지는 가질 수 없었던 루치에로부터 육체적 사랑은 물론 정신적 사랑까지 받고 있는 인물이다.

헬레나는 루드빅이 공산당에서 추방시킨 대회의의 진행을 맡으며 그의 제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파벨 제마넥의 부인이다. 루드빅은 헬레나와 의도적으로 불륜을 저지른다. 결국 제마넥이 따로 애인이 있고 헬레나와의 진정한 결혼생활이 끝이 난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게 된 루드빅은 큰 회의에 빠진다. 그렇지만 헬레나는 루드빅을 진심으로 대하며 갑자기 나타난 사랑에 완전히 빠져버린다.

이제는 초라하게 전락한 민속음악가 야로슬라브, 기독교적 희생으로 몸과 마음을 수행하지만 결국 사회적으로는 불륜을 저지르는 셈인 코스트카, 허영심, 성적 욕구에 허덕이지만 진심으로 루드빅을 사랑한 헬레나, 온 세상에 냉소를 보내는 루드빅 이 네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오해한다. 이 오해는 하나의 '농담'이고 이들 모두가 얼켜있는 하나의 큰 헤프닝은 역사가 인간에게 거는 농담이다. 인간은 이 농담 속에서 농간되고 무력화된다.

루드빅이 제마넥에게 복수하기 위해 벌이는 행동 하나하나를 온전한 사랑으로 오해하는 헬레나, 루치에가 자신의 처녀성을 지키려 했음을 마음으로 이해하며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루드빅 그러나 루치에는 고향에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문란함으로 추방당한 인물이었고, 처녀성이 없음은 물론 코스트카에게 루드빅을 그저 다른 남자들과 똑같이 자신의 육체만 탐하려했던 병사였노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루드빅은 루치에와의 사랑을 자신의 생에 유일한 가장 완벽한 사랑으로 오해하고 있다. 제마넥에 대한 증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루드빅은 제마넥과의 재회로 자신이 복수해야할 제마넥은 이미 그 때의 제마넥이 아님을, 그동안 자신의 증오는 커다란 오해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왕들의 기마 행진'이라는 오랜 민속 행사에 자신의 아들이 왕으로 선정된 것을 자기 인생의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야로슬라브는 아들이 결국 그 행진에 다른 사람을 세웠음을 알게 된다. 한껏 부풀어있었던 야로슬라브는 아들과 아내에게 큰 배심감을 느낀다.

오해의 연쇄사슬 속에서 밀란 쿤데라는 우리가 우리에 의해 행동하고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역사(혹은 운명)가 그렇게 되도록 하는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날카로운 통찰력과 소설적 재미로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음악, 성경, 민속예술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방대한 지식 또한 읽는 재미를 더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어떤 주제라도 상관없이 소설 곳곳의 지식을 건너뜀없이 읽게하는 힘이 있다.

밀란 쿤데라 소설의 또하나의 백미는 거역할 수 없는 전언들이다. 밀란 쿤데라의 것이라면 언제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하지만 다른 작가의 문장이었다면 쉽게 수긍하지 않을 전언들이 이 소설 속에 있다. 

* 음악이 들릴 때 우리는 그것이 시간의 한 양태라는 것을 잊은 채 멜로디를 듣는다.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내지 않게 되면 우리는 그때 시간을 듣게 된다. 시간 그 자체를. 나는 휴지(休止)를 살고 있었다. 물론 오케스트라의 (약정된 기호에 의해 명백하게 그 길이가 한정되어 있는) 휴지가 아니라 한정이 없는 휴지를.
*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 나 자신의 한심함을 인식한다고 해서 나와 비슷한 이들의 한심함과 내가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비천함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결속된다든가 하는 일만큼 내게 역겨운 것은 없다. 그런 메스꺼운 형제애는 사양한다.
*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 오만한 권력은 잔인성으로만 표명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드물기는 하지만) 관용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법이다.
* 기다렸다는 듯 대번에 아무 비난이나 그대로 믿어버리는 데 대한 분노, 언제나 발동될 수 있는 그들의 그 잔인성에 대한 분노.
*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 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마지막 7부에서 화자를 루드빅-헬레나-야로슬라브 3명으로 선정한 다음, 제마넥, 루치에, 코스트카까지 모두를 모라비아 라는 시골로 불러들인 이후에, 루드빅과 야로슬라브가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조용히 정서적 공감을 느껴가고 있을 때, 야로슬라브가 내출혈로 쓰러져 힘겨워하는 순간에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리고 갑자기 급하게 모든 것의 결말을 지어놓고 그렇게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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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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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지독하게 그는 이순신에 몰두했을까
'미치도록 잡고 싶다'는 <살인의 추억> 광고 카피처럼, 이순신에 다가가고 싶어하던 김훈의 열망이 진하게 전해져 오는 소설이 <칼의 노래>이다.

김훈이 읽었을 수많은 자료들, 조심스레 더듬어 보았을 무수한 장소들, 순간 단위로 떠올려 보았을 이순신의 시간들, 무심히 전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을 김훈의 시간들은 하나의 완벽한 소설을 위해 행해졌다기 보다는 이순신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김훈은 이순신을 영웅화하지 않았으며, 이순신을 둘러싼 사건들을 강조하지도, 거기에 감정몰입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이순신의 시간들을 복원했을 뿐이다. 이순신 전기를 쓰고, 임진왜란 소설을 썼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늘여지고 삭제됐던 시간의 무수한 결들을 그는 복원해냈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이순신을 왜곡하지 않을 최선의 방법이다.

이순신이 죽게 될 거라는 복선을 느끼자마자 2페이지가 채 넘어가지 않은 시점에서 소설은 끝난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한 마디를 떠올리자마자 비감을 느끼기도 전에 끝나 버리는 것이다. 아들 면이 죽는 사건도 그 사건의 생생한 묘사가 아니라 오랜 후에 가끔씩 이는 하나의 슬픈 이미지로 존재한다. 소설 앞뒤로 붙은 사진자료와 연보, 지도도 소설 속에서 자신이 범했을지 모르는 왜곡에 대해 독자들에게 더욱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소설'일까? 논픽션이라면 이순신에 대한 더욱 객관적이고 사심없는 글을 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순신을 왜곡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긴 하지만 그의 생각과 감정까지 완벽하게 살려낼 수 있기를 바랐던 걸까? 어쨌든 이 소설은 김훈의 바람대로 죽은 인간에 완벽하게 다가가기 위한 개인의 몸부림과 노고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문학이란, 문제의식 그리고 거기에서 이어지는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걸 최근의 우리 문학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문학은  투철함 보다는 가벼움, 냉소 혹은 외면으로 나아간다. 김훈의 문학은 여기에 다양성을 부여해주는 좋은 작품이다.

처음 읽는 김훈의 소설은 쉽게 낯익어지지 않았지만, 이동하는 함대의 뒤를 따라 까맣게 몰려드는 백성의 고깃배들, 광양만 바다 위에 섞여 떠다니는 조선 포로와 적군의 잘린 머리, 노량해전 발진 전 날 백성들에게 된장을 나누어 퍼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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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힘찬문고 33
이경자 지음, 시모다 마사카츠 그림, 고향옥 옮김 / 우리교육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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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은 보고 있기가 힘들었지만, <살인의 추억>은 달랐다.

언제나 나에게는 절망 뒤에 꼭 희망이 따라야 하고, 비극 뒤에 꼭 희극이 따라야 한다. 결국 궁극적인 주제에서는 모든 게 비극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늘 코미디와 희망이 있어야만 감동을 받는다.

일본에 살고 있는 가쯔짱의 생활도 그래서 감동적이었다.

나에게 동화는 두꺼운 명작 혹은 픽처스북 뿐이다. 그렇지만 <바이바이>는, 소설이 어른들의 마음을 멀리서 위안해 주듯이 읽기류 동화가 어린이들의 마음을 보듬어 줄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나에게는, 두꺼운 명작과 얇은 픽처스북 사이에 위치한 읽기류 동화의 매력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동안 우리에게 유명한 창작동화를 읽으면서 어른 작가들이, 자기가 상상하는 모습대로, 혹은 바라는 모습대로 어린이들을 묘사하는 게 아닌가 찝찝했었는데, 이 동화를 보니까 아니다.

진실한 작가는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쓰는 작가는 더욱 진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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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세계사 - 서양 고대편
역사사랑 지음, 정준호.이주열 그림 / 을파소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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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목차부터가 흥미진진하다. 이전의 어떤 사람도 풀지 못한 고르디온의 매듭을 과연 누가 풀 것인가, 눈 덮인 알프스를 코끼리(우리가 열대 동물이라고 알고 있는)를 이끌고 넘은 한니발, 알몸으로 거리로 뛰쳐나간 아르키메데스 등등.

역사에 약간만 관심이 있어도 이 목차들이 아이들에게 충분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읽어보면 이 책은 역사책은 아니다. 고르디온의 매듭을 끊은 알렉산드로스의 이야기는 결국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그 위기를 넘어설 것인가를 말한다.

일방적인 지침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퀴즈 형식이 가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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