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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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은 조용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끝이 났다.

그러나 430쪽에 달하는 이 긴 소설은 루드빅, 야로슬라브, 코스트카, 헬레나 이 4명의 이야기를 '이번엔 이쪽, 다음 번엔 저쪽' 하며 분주하게 우왕좌왕하며 들어야하는, 역동적이지만 결국 4일동안에 일어난 이야기일 뿐이다.

이 소설의 중심엔 7부 중 공동 화자 체제가 도입되는 일곱 번째 부를 포함해서 총 4개 부에서 화자 역할을 하고 있는 루드빅이 있다. 그에게 중심사건은 대학 당시 여자친구에게 보냈던 치기 어린 엽서로 인해 자신이 속해있던 체코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당한 일이다. 이로 인해 그는 이전에는 자기와 전혀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던 탄광 인부로 살아가야 했으며 6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6년동안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을 잃었으며 오직 자신을 지하의 어두컴컴한 세계로 내쫓은 대학 공산당원의 대회의,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에 대한 증오로  불타 올랐다.

또다른 화자인 야로슬라브는 루드빅의 어릴 적 고향친구다. 한참 사회주의에 열광해있던 루드빅의 영향으로 자신의 음악 행로를 사회주의를 위한 민속음악 재부흥에 쏟았던 그는 변한 루드빅을 보며 원망스러움을 느낀다.

코스트카는 대학 시절 당에서 쫓겨날 뻔한 위기에 루드빅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공헌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루드빅과 의견이 크게 달랐다. 그는 탄광 생활에서 루드빅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러나 육체까지는 가질 수 없었던 루치에로부터 육체적 사랑은 물론 정신적 사랑까지 받고 있는 인물이다.

헬레나는 루드빅이 공산당에서 추방시킨 대회의의 진행을 맡으며 그의 제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파벨 제마넥의 부인이다. 루드빅은 헬레나와 의도적으로 불륜을 저지른다. 결국 제마넥이 따로 애인이 있고 헬레나와의 진정한 결혼생활이 끝이 난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게 된 루드빅은 큰 회의에 빠진다. 그렇지만 헬레나는 루드빅을 진심으로 대하며 갑자기 나타난 사랑에 완전히 빠져버린다.

이제는 초라하게 전락한 민속음악가 야로슬라브, 기독교적 희생으로 몸과 마음을 수행하지만 결국 사회적으로는 불륜을 저지르는 셈인 코스트카, 허영심, 성적 욕구에 허덕이지만 진심으로 루드빅을 사랑한 헬레나, 온 세상에 냉소를 보내는 루드빅 이 네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오해한다. 이 오해는 하나의 '농담'이고 이들 모두가 얼켜있는 하나의 큰 헤프닝은 역사가 인간에게 거는 농담이다. 인간은 이 농담 속에서 농간되고 무력화된다.

루드빅이 제마넥에게 복수하기 위해 벌이는 행동 하나하나를 온전한 사랑으로 오해하는 헬레나, 루치에가 자신의 처녀성을 지키려 했음을 마음으로 이해하며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루드빅 그러나 루치에는 고향에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문란함으로 추방당한 인물이었고, 처녀성이 없음은 물론 코스트카에게 루드빅을 그저 다른 남자들과 똑같이 자신의 육체만 탐하려했던 병사였노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루드빅은 루치에와의 사랑을 자신의 생에 유일한 가장 완벽한 사랑으로 오해하고 있다. 제마넥에 대한 증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루드빅은 제마넥과의 재회로 자신이 복수해야할 제마넥은 이미 그 때의 제마넥이 아님을, 그동안 자신의 증오는 커다란 오해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왕들의 기마 행진'이라는 오랜 민속 행사에 자신의 아들이 왕으로 선정된 것을 자기 인생의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야로슬라브는 아들이 결국 그 행진에 다른 사람을 세웠음을 알게 된다. 한껏 부풀어있었던 야로슬라브는 아들과 아내에게 큰 배심감을 느낀다.

오해의 연쇄사슬 속에서 밀란 쿤데라는 우리가 우리에 의해 행동하고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역사(혹은 운명)가 그렇게 되도록 하는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날카로운 통찰력과 소설적 재미로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음악, 성경, 민속예술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방대한 지식 또한 읽는 재미를 더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어떤 주제라도 상관없이 소설 곳곳의 지식을 건너뜀없이 읽게하는 힘이 있다.

밀란 쿤데라 소설의 또하나의 백미는 거역할 수 없는 전언들이다. 밀란 쿤데라의 것이라면 언제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하지만 다른 작가의 문장이었다면 쉽게 수긍하지 않을 전언들이 이 소설 속에 있다. 

* 음악이 들릴 때 우리는 그것이 시간의 한 양태라는 것을 잊은 채 멜로디를 듣는다.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내지 않게 되면 우리는 그때 시간을 듣게 된다. 시간 그 자체를. 나는 휴지(休止)를 살고 있었다. 물론 오케스트라의 (약정된 기호에 의해 명백하게 그 길이가 한정되어 있는) 휴지가 아니라 한정이 없는 휴지를.
*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 나 자신의 한심함을 인식한다고 해서 나와 비슷한 이들의 한심함과 내가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비천함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결속된다든가 하는 일만큼 내게 역겨운 것은 없다. 그런 메스꺼운 형제애는 사양한다.
*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 오만한 권력은 잔인성으로만 표명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드물기는 하지만) 관용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법이다.
* 기다렸다는 듯 대번에 아무 비난이나 그대로 믿어버리는 데 대한 분노, 언제나 발동될 수 있는 그들의 그 잔인성에 대한 분노.
*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 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마지막 7부에서 화자를 루드빅-헬레나-야로슬라브 3명으로 선정한 다음, 제마넥, 루치에, 코스트카까지 모두를 모라비아 라는 시골로 불러들인 이후에, 루드빅과 야로슬라브가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조용히 정서적 공감을 느껴가고 있을 때, 야로슬라브가 내출혈로 쓰러져 힘겨워하는 순간에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리고 갑자기 급하게 모든 것의 결말을 지어놓고 그렇게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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