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처럼 벽을 타고 질질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흡사 '시체'처럼 처량하고 징그럽다. 지렁이의 머리짬에 맺힌 물방울에서 흐릿한 물빛이 반사되고 있기는 하다. 흐릿하고 지루한 빛을 둔하게 반사하면서 느릿느릿 벽을 타고 기어내린다.-21쪽
약속시간이 오후 6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들은 꼭꼭 5시부터 나와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약 30분 가량 일찍 나타나서 5시 30분에 만나게 되면 이제는 4시 30분부터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내 쪽에서 30분쯤 더 일찍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결국 6시에 만나자는 약속은 에스컬레이션을 거쳐 어느덧 5시로 변해보리고 마는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군축회담이나 하듯 다시 6시로 되돌아갈 것을 결의하고 6시로 되돌아가면 다시 동일한 에스컬레이션을 거쳐서 다시 5시에 만나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37쪽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46쪽
창살 무늬진, 신문지 크기의 각진 봄볕 한 장 등에 지고 이윽고 앉아 있으면 봄은 흡사 정다운 어깨동무처럼 포근히 목을 두릅니다. 문득, 난장촌초심 보득삼춘휘,"지극히 작은 자식의 마음으로 봄볕 같은 부모의 은혜를 갚기 어렵다'는 불우했던 맹교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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