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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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tranger 

우리말도 아름답지만, 불어 발음은 참 우아하고 예쁜 것 같다

에뜨랑제

왠지 영어  stranger와 뭔가 연관이 있을것 같기도 하고.. 


외국인, 부외자를 뜻하는 말이라는데

이 책을 처음 번역하신 분이 붙이신대로 흘러온 것 같다.

이 소설은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져 간다.

결국 인간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 것도 자연사살인사형의 흐름을 따른다.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니 거의 모든 카뮈의 책들에서 죽음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뫼르소의 언행은 이뿐이 아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   

그리하여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열두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겠구나

생을 떠나

뫼르소도, 주변 인물들도 모두 어쩌면 소외된 사람들, 이방인 들이다.

학대하던 개가 없어지자 숨죽여 우는 살라마노 영감

정부를 의심해 두들겨 패고 아랍인들에게 미행당하는 이웃 레몽생테스

뫼르소에게 끊임없이 사랑과 결혼을 묻는 마리


부조리한 세상, 부조리한 삶, 

그리고 부조리한 재판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않고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이유로 사형당하는 현실 


그런 가운데, 세상에 속해있으되 진정 그러지 못하고 

부초와 같이 떠있는 이방인 뫼르소 

재판과정에서 예심판사도, 변호사도, 검사도 모두 본인의 관점에서 뫼르소를 압박하며 그의 거짓없는 마음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어떤 위장도, 가식도 없이 "태양 때문이었다"라고 살해 동기를 말하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날씨가 사뭇 쌀쌀해졌다

내일은 첫눈이 온다고 하네..

뫼르소는 낯선곳에서 잠시 발을 멈춘 나그네가 아닐까 싶다 

오늘같은 날은 이 곡이 딱이지.. 


Stationary  Traveller -CAM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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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열린책들 세계문학 227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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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길에 대한 암시이다... 

 

데미안.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고난의 여정

 

문장 하나하나 베껴쓰고 외워두고 싶을 만큼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나는 여태 만나지 못했다.

(책을 많이 안읽어서 그런것도 있겠거니..자료를 검색하다보니, 블로그에 필사해 놓으신 분들도 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이셨을까?)

 

나에겐 한편의 시이고, 주옥과 같은 금언이면서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마음이 몽글몽글..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의 실수나 혹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소설이 아닌 현실의 프란츠 크로머를 만나

전전긍긍했던 일들

물론 그 공포들은 언제 그랬냐 싶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져가곤 했지만..

 

내심으론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데도 어른들은 나를 어린애라 하니 모르는척 행세를 해야 했던 짧은 순간들도 나 또한 겪었고..

 

그리고 성() 무언지도 모르던 시절, ‘유리반지*’라는 동화책을 읽으며 정말로 알 수 없는 섬세한 감정에 휩싸였던 기억까지..

 

(*원제목은 독일어로 데어 글라센 링에라고 되어있었고 나중에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음을 알았다. 루이제 린저 여사님의 작품)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난 이후

그가 걸어가는 삶의 길목엔 늘 데미안이 있었다.

실제로 데미안과 만났던 물리적 시간은 짧았지만

데미안과 떨어져 홀로 있었던 시간에도 데미안은 늘 그와 함께 했던 것이다.

 

그래..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또 하나의 자아이자, 성숙한 세계이며, 또한 싱클레어를 자기자신에게 인도시키는 첫번째이자 가장 큰 안내자로 보인다.

 

또한 데미안과 떨어져 홀로 고독속에 방황하며 방탕한 생활에 몸을 던지던 싱클레어가 우연히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나서 그 모든 추악한 생활을 접고 고귀함과 순결함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걸로 보아


베아트리체 또한 싱클레어가 개구리나 도마뱀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여성의 모습을 한 수호자 또는 안내자가 아니었을까?

 

또한 그 자체로 싱클레어가 속된 욕망으로는 다가가기 어려운 또하나의 고결한 이상이자 자아였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데미안에 대한 인상 묘사를 떠올려보면,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소년의 얼굴을 가지지 않고 어른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았다. 보았다고, 혹은 감지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남자의 얼굴만이 아니며 또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여자 얼굴도 조금 그 안에 들어 있는 듯했다.”

 

그리고 베아트리체를 그려놓고 나니 데미안의 얼굴과 닮은 얼굴이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다른 상황에서 다른 모습으로 싱클레어를 도운건 맞지만, 결국 둘 모두 싱클레어가 일생을 두고 찾아내야 할 그의 자아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기에 물론 연주가로서 싱클레어의 마음을 다독이고 스승의 역할을 했던 피스토리우스 주임목사가 있었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모습속에서

우리 자신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요

우리 자신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못하는 법이오

 

싱클레어가 어머니이자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가지면서도 그 욕망을 넘어서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도와준 에바도 있었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기 자신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상대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 당기지요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내게 끌려오고 있어요

그 사랑이 언젠가 나를 끌어당기면

그때 가겠어요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아요

나를 가져가 주길 원해요

 

나름대로 생각해보건대

데미안은 용기와 당당함속에 알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 이유를 알려주고

피스토리우스는 알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에바는 진정한 사랑을 알려준 위대한 스승들이었다


그 자아들은 전장에서 상처를 입고 누워있던 병상에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입술이 스치는 것을 끝으로 마침내 하나가 되어 간다. 

(어느 서평에서는 데미안이 죽었다고 하시는 분도 있지만, 나는 데미안의 겉모습의 행방은 알수 없고, 알필요도 없으며,  결국 중요한 것은 싱클레어가 확고한 자아를 찾게되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어린시절 맞닥뜨린 두개의 세계는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욕망과 고결함을 상징할수도 있을것 같은데, 이 장면에선 최근에 읽은 인간실격에서 부잣집 귀한 도련님이 사는 공간과 부모들이 돌보지 못하는 시공간을 틈타 일꾼들의 추한 행동이 벌어졌던 공간이 맞닿아 있었던 그곳이 떠올라 재미있었다


나 또한 아버지에게 정신적으로 눌려 있던 안방 벽장문을 열고 올라가면 나오는 어두컴컴한 다락방! 이 공간만큼은 나의 해방구였고 모르는 사이 조금씩 성장해가던 공간이었으니..


글을 마치며, 

어린 싱클레어의 성장과 고민, 좌절과 일어섬, 그리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까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어떤 인생의 스승을 만나고 어떤 인도자의 손을 잡고 걷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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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모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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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대엔..

장치도 없고 소품도 없다


그저 줄곧 관객을 향하는 일방적이고 끊임없는 이야기만 있을뿐.. 

배우가 네명이라 하니 그런가보다 하지만 

진짜 네명이 있기나 한건지도 믿을수가 없다 


혐오스러운 상판대기들아, 어릿광대들아, 눈딱부리들아, 가련한 몰골들아, 뻔뻔스러운 작자들아, 오락실 사격장의 허수아비들아, 멍청하게 서서 구경하는 꼴통들아. 


욕설연습을 빙자해 관객을 당황시키는것으로 극을 ..아니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는 줄곧 관객에게 설명하고 지시하고 또 설명하고 지시하고.. 그런데 자꾸만 빠져드는건 왜일까? 시키는 대로 자꾸 따라하고 싶어지면서 약간 언어의 최면에 걸리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러분이 너로 바뀌며

극렬한 욕설로 채워진다. 


심한 욕설로(번역문이라 그런지 우리가 쓰는 찰진 욕설같지는 않고 정말 애써, 공들여 관객을 모독하는 느낌이랄까?) 


아아 그런데 어째서 이런 묘한 쾌감이..

심한 모욕을 당하는데 어째서..

나의 내면에 마조히스트의 본성이 존재하기 때문일까?


그런데 얼핏 의미없는 중얼거림처럼 보였던 대사들은 사실 굉장히 날카롭고 철학적인 메시지들을 담고 있는것 같다. 


그러나 시간은 재생될 수 없습니다. 어떤 연극에서도시간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만회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시간은 상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현실입니다. 현실인 시간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연기될수 없기 때문에 현실 역시 연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제거한 연극만이 연극입니다. 시간이 함께 상연되는 연극은 연극이 아닙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만이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만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극입니다.  


얼핏 스치듯 연극제목으로 긴가민가 들어본듯했던 이 요상한 제목의 책이

노벨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대 작가의 작품인줄 몰랐다..

다시한번 나의 무식을 탓해본다. 


어쨌든 실험적이고 대단히 전위적인 작품이라는건 금방 알겠고

첫작품을 읽고 처음으로 만나게 된 작가인데


논란이 있다하니 다소 찜찜한 마음이 든다 

유고연방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촉발시켜 내전을 주도하고 인종청소를 자행한 밀로세비치를 옹호했다 하니..(피해자들이 노벨상 수상에 반발했다 한다) 


다만, 이 작품이나 작가와는 별개로.. 


위와 같은 논란과 관련하여 

스스로의 사상과 양심(오로지 자신의..)에 따라 표현하는 자유는 어디까지 인정되는지

더욱이 그것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 경우라면 더욱 그 기준이 엄격해야 하는건지

또 우리는 우리 양심에 따라 어디까지 그를 비난할수 있는지

비난하지 않는것 또한 우리 양심에 어긋나는건지 그렇지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는 제각기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자신에게 금지된 것인지 스스로 알아내야 해

결코 금지된 것을 하지 않는데도 무도한 악당일수 있어,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데미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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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에 가끔 지하철에서 

모바일 앱을 통해 장기를 둔다.

몇년을 두어도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고

급수는 고무줄처럼 왔다 갔다 한다.

왜일까 생각해본다

볼것도 없이 첫째 문제는 내 두뇌에 있겠지...

다음으로 떠오른 문제는 습관이다

어렸을때 배운 장기 습관을 도무지 깨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어렸을때 몸과 마음에 젖어든 편견과 습관을 

편견인지 습관인지도 모른채 수십년 살다가

뒤늦게 깨달은바 있어

나머지 생은 그걸 깨려고 분투하는데 바쳐지는것 같다.


어렸을때 좋은 습관을 들이되

그것보다 중요한건 타성과 편견에 젖지 않고

유연한 태도를 갖추고 유지하는게 아닐까 싶다. 

 

자연에서 배운다.  

계절은 그의 절정에서, 가장 아름다운때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 좋고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떨쳐 버러지 않는가.. 


가을이 깊어간다. 

눈깜짝할 새 한해가 끝나간다


階前梧葉 已秋聲

계단 앞의 오동잎은 벌써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 주자(朱子)의 권학(勸學) 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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